이 구절이 제게는 조금 낯선 사실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주의권 교회와 선교단체의 색채에 물들어있던 제가 정대운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로 이 곳에 온 이후, 이전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신론’에 관심이 갔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은 사뭇 다른 모습이셨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던 복음주의권 교회에서 저는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그만두었습니다. 나아가, ‘예수’를 실재했던 인물로 새롭게 믿게 되었고, 페미니즘과 사회주의라는 좌파적 사상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교도 신학은 제가 ‘느낌’ 기반의 믿음이 아닌(100% 느낌 기반은 아니지만), ‘지식’기반의 믿음을 쌓을 수 있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동앗줄이었습니다. 삼송에서 알아가는 하나님은 이전보다 조금 더 ‘신적인 존재’에 가깝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저 때문에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으신다는 말은 머리로는 이해되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조금 어렵기도 합니다. 불순종, 불신앙이 온전히 내 책임이라는 것도 신자인 저에게는 주의와 경계하는 사실이지만 추후에 전도를 하거나 복음을 전할 때 정말 그들이 ‘듣기 싫은’ 구절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머니께서 신론 수업을 들으셨다고 하니,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과 어머니가 배우신 내용을 대조하며 제가 확대 혹은 축소한 신적 이해의 영역을 바로잡고 싶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