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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

보미의 독서 기록장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늦은 10월 독후감
10월에 읽고 썼어야하는 독후감인데 취업으로 인해 밀리고 밀려 결국 다음 해 1월에 작성하게 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읽는 것부터 힘들었다. 처음엔 자연과학 서적인 줄 알았고, 후엔 에세이인 걸 알았으나 에세이 치고는 과학 용어나 과학적 정보가 너무 많았다. 자연과학이라고 치부하고 읽기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래서 그런가 집중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지쳐서 읽기를 멈추고 책을 덮어두었다. 정말... 하루에 한쪽 겨우 읽듯이 읽어나가 끝낸 책은 우습게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잔하지만 큰 여운을 남겼다. 이토록 힘겹게 읽어낸 책을 다시 한 번 차분히 읽고 싶다고 느끼는 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이 서적이 던지는 묵직한 메세지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 "질서[order]"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르디넴 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 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 ruler 뒤에는 지배자 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지구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매 1분 1초, 그보다 더 작은 시간 단위로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 곁에 남는 것 없이 우리는 무로 돌아가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이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오래된 유적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그 의미가 퇴색하며, 그렇게 변하고 무너진 자리 위에 또 새로운 것이 세워진다. 우리가 자연을 깎아 없앤 것들은 지구 어딘가에서 또다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인간은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성별, 직업, 경제적 위치, 인종 등으로 나누고, 동물조차 포유류, 어류, 척추동물 같은 범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로 인해 슬픔과 소외감을 느끼며 나 자신이 외부인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돌아오고,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또 다른 형태로 사라진다. 수증기가 물로, 물이 얼음으로, 다시 기체로 바뀌며 끊임없이 순환하듯이, 우리 삶의 모든 것도 형태만 변할 뿐 계속 이어진다. 어느 것에 해당 되지 않는다고 우리의 존재 역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떠한 형태로도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분류와 소외감, 잃어버림과 얻음의 순환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본질을 이야기한다. "다르다", "틀렸다"고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학적 설명과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때로는 과학이 틀렸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만든 분류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단순히 분류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어떤 기준도 우리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상이 전부 싫고, 왜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을 때, 이 책은 조용히 위로를 건넨다. 분류와 정의의 틀을 해체하며, 잃는 것과 얻는 것의 순환 속에서 우리가 지금 있는 순간의 소중함과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백인은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그것은 "그냥 과학의 문제"라고 그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무 문제 될 것 없다는 투로.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 보미
정용준의 소설 만세: 좋아하는 것을 지키는 용기의 이야기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는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땐 정용준 작가가 소설, 그리고 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엿보게 된다. 그러다 중반 쯔음에는 남의 일기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이 이야기가 그저 소설가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에세이를 통해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가 직업적인 의미를 넘어서,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는 소설가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것들을 바로 세울 수 없더라도 그것을 버티고 선 이들의 삶에 “수고했어. 최선을 다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말해 주는 것. “힘들어? 그러면 관둬.” “열받아? 그러면 하지 마.” 이런 말들은 이제 지겹다. 뭐든지 쿨한 것. 하나도 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을 쓰고 읽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초라하고 세련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래서 경쟁력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나쁜 전망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어요. 당신이 소설을 그렇게 지킨다면 소설 역시 당신을 그렇게 지켜 줄 것입니다.” 내가 특히 감명 깊었던 부분은 지인이 예전에 글에 대한 트라우마로 글 쓰기를 망설이던 내게 보내줬던 문장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열망하고 꿈꾸고 이루고 싶은 것에 다른 사람의 인증이나 보증은 필요 없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를 설득할 근거를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근거를 통해 내 마음과 감각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유는 내 감정과 감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유가 있다 한들 원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를 핑계 삼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가치는 객관적이고 복잡한 셈법과 무관하게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존재한다. 왜냐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느끼고 있는 감각과 감각의 정도를 부정할 수는 없다. 뜨겁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게 뜨겁다면 뜨거운 것이다. 사랑하면 안 된다. 사랑할 가치가 없다. 그것과 함께하면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뜯어말려도 사랑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이 인간이다. 너 그러다가 망한다, 넌 후회할 거야, 하는 조언을 듣고, 이해했고, 긍정했음에도 기어이 해 버린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 품어 은밀히 보고 꿈에서도 보고 상상으로 경험해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환상통은 진짜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내가 통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통의 환상’이 아닌 ‘환상적인 통’이다. 어떤 세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이고 실제보다 더 실재한다.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마음에 품고 상상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붐비고 어쩔 줄 모르게 되는, 때문에 쓰고 싶고, 읽고 싶은, 이 감각과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감각과 감정과 상상에 스민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냥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것은 존재한다. 이 부분은 내가 한동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때, 지인이 발췌해 준 문장들로서 개인적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작가의 글이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고, 단지 나의 열망과 감각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이 어렵고, 시간이 없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많고, 해야 하는 이유는 찾기 어렵지만, 그저 하고 싶은 마음만 존재할 뿐이다. 정용준 작가는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자”고 말하며, 머리가 내 마음을 잘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한다고 덧붙인다. 이 에세이는 글쓰기를 넘어, 예술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는 말들이 담겨 있다.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너무 많은데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방해만 될 뿐이다. 마음이 있다면 그것에 사랑이 있다면 읽거나 쓸 것이다. 어떻게든 읽기를 향해 쓰기를 향해 나아가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자.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자. 상황이 어렵다. 시간이 없다. 재능이 없다. 반응이 안 좋다. 전망이 어둡다. 끊임없이 말하는 똑똑한 머리는 내 마음을 잘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 할 테니. 읽다 보면 이 에세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공감이 되고, 그래서 위로가 깊이 와닿는다. 작가의 조언이 마치 꼰대들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쉬운 ‘노력 부족’이나 ‘돈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그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바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메시지로 느껴진다. 작가는 애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 그만큼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진정성 있는 조언을 전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과정을 담고 있다.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어떻게 소설을 향한 열정을 쫓아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안도감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고, 여러 방해를 극복하며 노력한 과정을 보며, 나 역시 좋아하는 일을 쫓아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정용준의 글은 단순히 소설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하는 한마디, “그것은 존재한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를 전달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내 안의 열정을 확인하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지속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 블로그 글의 부제는 좋아하는 것을 지키는 용기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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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구의 증명 –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과 상실을 증명하다
2015년에 출간된 작가 최진영의 글, 구의 증명은 너무 담담하고 담백하게도 청춘과 같은 나이에 불같이 사랑했고 그 상대를 잃은 이의 감정을 열거한다. 또한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 상실을 다룬 작품이며, 그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고통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다. 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이 되자고 했다. 구의 증명을 읽으면서 몇 번을 멈추고 다시끔 읽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나를 소설 속으로 이끌게 하는 힘. 그리고 담이와 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끔 하는 힘. 담이와 구의 감정에 휘말려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구의 죽음과 그로 인한 담이의 고통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모든 감정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어느새 내가 담이가 되고, 내가 구가 되고 있었다. 작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게,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과 그 상실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고, 때로는 가끔은 그 감정과 시선이 너무 버거워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책 속의 담이가 느끼는 감정, 구의 상실을 견뎌내는 이야기는 마치 내 삶 속 어느 순간을 꺼내어 쓴 것 같았다. 특히, 담이가 구를 먹으면서도 스스로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도 정신을 다시 다잡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정말 강렬했다. 이걸 읽으면서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소설로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열예닐곱 살 때부터 매일 짐을 이고 나른 구의 팔 근육은 마르고 팽팽하여 근사했다. 솜씨 좋게 깎아놓은 연필 같았다.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맨 정신으로 행하기 어려우나 담은 구가 그 누구에게도 발견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하나로 구를 몸 안에 숨겨냈다. 구와 담이가 하는 생각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것들과 너무 닮아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나 삶에 대한 방황, 타인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죽음의 불합리함을 고민하는 모습들. 마치 우리가 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질문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게 아닐까 싶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노마, 병으로 죽은 이모, 돈에 의해 죽은 구... 이런 것들이 과연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이 불합리함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 불합리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나만 살아 있다. 나만 이 몸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이 점에서 최진영 작가의 글은 단순히 창작 소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감정들을 진솔하게 쏟아낸 자서전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을 구의 증명이라고 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하려 했을까? 구는 증명을 해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했어야만 하는가? 구의 존재와 그의 죽음,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담이가 곧 구의 증명이란 것을 깨달았다. 구는 담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단순히 구의 증명을 담이가 구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연인을 '뜯어먹는' 행위에만 집중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뜯어먹는 것 그 이상을 내포했다. 작품 속에서 '담이가 구를 뜯어먹는 행위'는 단순한 연인의 관계를 넘어선다. 이 장면을 단순히 직관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직관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담은 구가 원했던 것처럼, 구가 죽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무로 돌려주는 것 뿐이라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깊이는 단순히 로맨스나 상실을 넘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구가 죽었다고, 내 이름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 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있는데. 만지고 안을 수 있는데. 이 소설 속에서 구는 담이고 곧 담이 구이기에 담이 살아나아가는 것이 곧 구의 증명이라, 그래서 제목을 구의 증명으로 지었는가 싶었다. 구는 담을 통해 증명해나아가고 있음으로.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그때 구의 소원을 마음으로 거듭 외워본다. 고통과 생과 담대함, 그 의미가 점점 뭉개지고 흩어진다. 다 읽고 나서는 제법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았다. 그래서 담이는 오래 살았을까하는. 구도 담이 오래오래 살길 바랐고, 담이도 그랬는데. 이 소설에서 구는 담이고, 담이 구라서 결국 담이가 살아가는 것이 구의 증명일텐데, 담이는 증명해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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