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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미

보미의 독서 기록장
우린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 스토너 독후감
이 소설은 시작부터 주인공이 결코 대단하거나 선명하게 기억될 인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남들이 상상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도, 시대를 바꾼 영웅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살아간 한 인간의 삶이 펼쳐질 뿐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이미 중·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는 "나와 같은 말로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조용한 위로로 다가오고, 한창 청년의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살아가는 삶 또한 나름의 충만함과 존엄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청소년이나 그보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성공과 성취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야와 함께 잔잔한 위로의 손짓을 건넨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다시 빛을 발하는 이유 역시, AI가 많은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조용한 응답을 건네기 때문이 아닐까. 1891년 미주리 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스토너는 농부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농업을 배우고, 기계화가 진행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그는 농업이 아닌 영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결국 영문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여인 이디스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채 살아가다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삶에는 미주리를 벗어나는 극적인 사건도,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환점도 없다. 괴수가 등장해 영웅이 되거나, 도망자의 신세가 되거나, 큰돈을 손에 쥐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작은 말다툼과 오해, 타인으로부터의 적대가 조금씩 쌓여 작은 틀어짐이 더 큰 균열로 이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큰 울림으로 남는 이유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성장해온 이들 앞에 놓인 커다란 장벽 앞에서 굳이 그것을 넘지 않더라도 삶은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그것이 큰돈이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삶 역시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설령 삶이 조금 힘들어지더라도 그것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스토너의 삶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 있는가. 그는 죽음 앞에서 큰 후회 없이 삶을 마주한다. 물론 "그랬다면 어땠을까"라는 가벼운 미련은 남지만,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거나 다시 살고 싶다는 후회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을 실패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성공한 삶은 얼마나 남게 될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과거의 선택을 떠올린다. 그때 돈이 아니라 가족을 택했더라면, 가족이 아니라 돈을 택했더라면, 떠났더라면, 머물렀더라면. 선형적인 단 한 번의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가 사랑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면, 『스토너』는 그것을 삶 전체로 확장시킨다.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 어떤 무엇에게라도 우리는 한 번쯤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무엇인가에 진심을 다해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에 마음을 걸 수 있을까. 너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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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폭발』: 인간의 갈망과 분리된 자아에 대한 재사유
『자아폭발』은 인간이 언제부터 계급을 나누고, 돈과 물질에 집착하기 시작했는지를 질문하며 출발한다. 저자 스티브 테일러는 고고학적·인류학적 증거를 통해, 과거 인류 사회가 비교적 평등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왜, 그리고 언제부터 현대 사회는 경쟁과 불평등, 폭력과 소외가 만연한 구조로 변질되었는가. 테일러는 그 원인을 인간의 '자아'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사건에서 찾고, 이를 타락, '자아폭발'이라 명명한다. 책에 따르면 자아폭발이 일어난 이후 인류는 자신을 세계와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타인과 자연을 지배하거나 소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이 인식의 전환은 계급의 형성, 전쟁, 폭력, 종교적 권위, 국가 시스템의 출현으로 이어졌으며, 저자는 이러한 흐름이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누적되어 현대 사회를 구성했는지를 설명한다. 동시에 자아폭발 이후에도 이를 바로잡기 위한 시도—영적 전통, 공동체적 운동, 사회 개혁—가 반복적으로 등장해왔음을 짚어낸다. 이 장에서 다룬 모든 문제[전쟁, 가부장제, 사회적 불평등]는 근본적으로 같은 원인으로 연원을 찾아갈 수 있다. 창의성, 재능, 기술적 과학적 기량들과 같은 인간의 긍정적인 업적도 마찬가지다. 인류 대차대조표의 플러스면과 마이너스 면은 동일한 현상의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결과다. 그 현상은 바로 타락, 더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자면 '자아폭발'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사회적 현상을 단순한 제도나 경제 구조의 문제가 아닌, 인간 인식 구조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예리하며, 폭력과 불평등을 '타고난 악'이 아닌 역사적·심리적 산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정작 '자아폭발'이라는 핵심 개념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증거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기후 변화로 인해 사하라시아 지역이 건조해지며 자원이 부족해진 시기에 자아가 급격히 커졌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시기의 자아의 급격한 팽창을 반복적으로 '자아폭발'이라 언급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다소 단정적으로 느껴진다. 해당 시기에 실제로 인간의 자아가 '폭발적으로' 커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확한 심리적·생물학적 증거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정 시점을 자아폭발의 결정적 순간으로 규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폭발』은 세상과 나의 자아, 그리고 나의 갈망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 있어 새로운 시선을 제안하는 책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지난 6000년 동안 인류는 일종의 집단적 정신병을 앓아 왔다. 역사가 기록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류는 정신이상이었다. 믿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정신이상으로 초래된 결과들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광기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정상적이고, 건강하고, 합리적인 행동이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 수없다. 가장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습관이 관행으로 자리잡아 마치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고, 자원—특히 돈—이 한정되며, 국가가 그것을 관리하고 분배한다는 사회적 약속 속에서 살아간다. 이미 자아가 폭발한, 다시 말해 세상과 자신을 분리해 인식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구조 안에서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강박은 거의 필연에 가깝다. 그 돈으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더라도, 그저 온라인 은행 잔고에 찍힌 숫자에 불과하더라도, 심지어 지구가 멸망한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갈망한다. 이 갈망은 개인의 탐욕이라기보다, 세계를 나와 분리된 대상으로 인식하게 된 자아 구조 속에서 오히려 합리적인 선택처럼 작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와 같은 사상은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불교는 자아를 세상과 분리된 존재로 보지 않으며, 우리는 이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 숨 쉬는 일부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물론 『자아폭발』은 이러한 관점을 불교와 같은 종교적 가르침이 아닌, 인간 인식 구조의 변화라는 틀 속에서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한다. 불교가 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이 책은 우리가 왜 자연과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하는지를 "본래 인간이 가졌던 능력과 질서"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해졌을 뿐, 다시 돌아가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올바른 방향이라는 주장이다. 다만 이러한 논의가 실제 과학 이론으로 더욱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양자역학과 같은 영역이 더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양자역학이 무슨 상관이냐"는 반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를 포함한 주변의 모든 존재가 결국 동일한 구성 요소로 이루어졌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이는 불교와 『자아폭발』에서 스티브 테일러가 도달하고자 하는 결론과 맞닿아 있다. 즉, 인간과 세계를 분리된 존재로 인식하는 현재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예외적인 상태이며, 연결성과 공존을 인식하는 방향이 오히려 자연의 이치에 가깝다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우리의 젊음, 아름다움, 건강, 낙관주의 그리고 우리의 삶 자체도 삼켜 버린다. 삶의 매 순간순간이 우리를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한다. 이처럼 시간을 선형으로 보는 관점은 우리에게는 자명해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그것은 남성 지배, 유일신 종교나 육체에 대한 적대감만큼이나 타락한 정신의 산물이다. 결국 『자아폭발』은 인간 사회의 병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흥미롭고 도발적인 관점을 제시하지만, 동시에 그 핵심 개념이 다소 은유적 설명에 의존하고 있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인간다움'과 '문명'을 다시 질문하게 만들며, 현재의 사회 구조가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라 변화 가능한 상태임을 사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는 원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우리는 도로부터 떨어져 나온지 수천 년 만에 다시 도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완벽한 미덕의 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는 오웬 바필드의 용어로 표현하면 "원초적 참여"의 상태에서 시작된 다음부터 우주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상실했으며, 이제는 "최종적 참여"로 접근하고 있다. 또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6000년간 정신병을 겪고 나서 이제 최종적으로 정상적인 정신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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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독후감 | 끝없는 싸움과 명예에 대한 이야기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단순한 바다에서의 사투를 그린 소설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삶에서 맞닥뜨리는 싸움, 명예,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쇠퇴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노인의 혼잣말이 많아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다. 특히, 상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바다가 잔잔하고 이야기도 조용히 흘러가서 책장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잔잔함은 마치 폭풍 전야처럼, 이후 펼쳐질 처절한 싸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노인은 작은 배로 멕시코 만류에서 홀로 고기를 잡는 어부였다. 그런데 팔십 사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있었다. 노인은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다. 모두가 그를 "운이 다한 늙은 어부"라고 여겼지만, 그는 다시 바다로 나간다. 그리고 결국 거대한 청새치를 낚는다. 하지만 이 승리는 온전히 그에게 남겨지지 않는다. 상어들이 나타나 청새치를 갉아먹으며, 노인의 사투는 결국 무너진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앙상한 뼈뿐. 하지만 이 싸움은 무의미했을까? 헤밍웨이는 그 싸움이 헛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때로는 그것이 끝내 허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노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웠지만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돌아온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싸웠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노인의 모습은 우리 삶과 닮아있다. 이 소설이 헤밍웨이가 마지막으로 쓴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노인은 어쩌면 헤밍웨이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때 문학계를 주름잡았던 그 역시 점점 젊은 작가들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노인이 청새치를 잡아도 상어들에게 빼앗겼듯, 헤밍웨이 역시 자신의 문학적 성취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너는 단지 살기 위해서, 먹거리로 팔기 위해서 고기를 죽인 게 아니야. 노인은 생각했다. 어부로서 긍지를 가지고 죽인 거야. 너는 고기가 살아있을 때도 사랑했고 죽은 다음에도 사랑했어. 네가 녀석을 사랑한다면 녀석을 죽인 게 죄는 아니야. 아냐, 더 죄가 된다고 해야 하나? 노인이 상어와 싸우면서 "이래도 되는가?" 고민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그는 상어를 젊은 세대, 새로운 경쟁자로 보았을 수도 있다. 이들과의 경쟁이 때때로 잔혹하게 느껴질지라도, 결국 인간은 그런 싸움을 통해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록 패배할지라도, 싸웠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소설에서 마놀린과 노인의 관계는 세대 간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마놀린이 노인을 따르고 존경하지만, 마지막에는 노인이 마놀린의 도움을 받게 된다. 보호하던 자가 보호받는 자가 되는 이 전환은 인생의 섭리를 상징하는 듯하다. 마놀린의 이름이 '마노(상어) + 린(빛나다)'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는 그가 한편으로는 새로운 세대의 상징이면서도, 여전히 노인을 존경하고 그 명예를 빛내는 존재라는 점을 시사한다. 노인은 결국 마놀린에게 자신의 경험과 가치를 남긴 채 조용히 잠든다. 그리고 마놀린은 노인이 남긴 유산을 이어갈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그 싸움이 결국 허망하게 끝날지라도, 싸운다는 사실만으로 의미가 있는가? 노인은 청새치를 빼앗겼지만,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대로 바다로 나아갔고, 끝까지 싸웠으며, 돌아와서도 그의 명예를 잃지 않았다. 이 소설을 읽고 나니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로 나아가, 크고 작은 청새치를 낚고, 상어와 싸우며, 때로는 빈손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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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 노동과 가족, 그리고 잊혀지는 존재에 대하여
『변신』은 단순한 환상소설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과 가족의 관계, 그리고 인간 존재의 가치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이야기의 흐름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곱씹어볼수록 그레고르 잠자가 겪는 변화가 단순한 신체적 변신이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잃어가는 과정이라는 점이 선명해졌다. 가족이 이사에 대한 결정을 단호하게 내리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겪고 있는 완전한 절망감 때문이고,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 그들과 관계가 있는 어느 누구도 겪은 적이 없는 지독한 불행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그레고르는 생각했다. 그레고르는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하며 돈을 벌었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그에게 감사했지만, 점차 그의 노동을 당연하게 여겼고, 그레고르 역시 가족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노력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 기쁨조차 사라지고 지쳐갔다. 초반에 그는 일을 그만두고 싶어 하며 사표를 내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가족들 때문에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벌레가 된 이후에는 더 이상 노동의 의미나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과거를 단순히 회상하는 것에 그친다. 하지만 처음에 그토록 뿌듯했던 기쁨은, 적어도 그 정도의 기쁨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어느덧 그레고르가 가족을 부양하는 일이 그레고르 자신에게도 가족들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가족들은 여전히 감사하며 그레고르가 벌어온 돈을 받았고 그 역시 기꺼이 자기가 번 돈을 가족들에게 내놓았지만 특별한 기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특히 초반부에서 그레고르는 자신이 벌레가 된 사실보다 직장에 가지 못하는 현실을 더욱 걱정한다. 가족과 회사의 반응을 의식하며, 변명을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자신의 변신을 합리화하려 한다. 이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그가 사회적 역할을 얼마나 강하게 내면화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점점 인간으로서의 사고를 잃고, 본능적으로 살아가는 존재로 변해간다. 그레고르가 노동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가족의 역할도 달라진다. 그레고르가 벌어오던 돈이 끊기면서, 가족들은 각자 사회적 역할을 새롭게 부여받는다. 아버지는 다시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고, 여동생은 처음에는 오빠를 돌보는 역할을 자처하지만 점차 그 역할에 소홀해진다. 어머니는 요리를 하며 가정부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 이전까지 경제적 책임을 오롯이 짊어진 그레고르가 사라지자, 가족의 구성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가정부의 존재도 흥미로운 요소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자 기존의 가정부는 집을 떠나고, 새로운 가정부가 들어온다. 이 새로운 가정부는 그레고르를 두려워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순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며, 오히려 가볍게 조롱하듯 다룬다.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과 달리, 가정부는 오히려 그를 당연한 집안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는 그레고르가 가족 내에서조차 점점 존재감을 잃어가지만, 외부 노동자로서의 시선에서는 단순한 처리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족들의 태도도 점차 바뀐다. 처음에는 문을 닫고 그를 철저히 격리하지만, 그럴 때는 여전히 '가족'과 '오빠'로서 최소한의 보살핌을 제공한다. 하지만 점점 그레고르를 방치하면서도 문을 열어둔 채 생활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거리낌의 해소가 아니라,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를 잊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느껴졌다. 그레고르는 이를 자유라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가족들이 그의 방을 창고처럼 사용하며 무관심해지는 과정이다. 『변신』은 사회에서 역할을 잃은 존재가 어떻게 철저히 배제되고, 결국 망각되는지를 보여준다. 노동할 수 있을 때는 가족에게 필요했던 그레고르는, 더 이상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없게 되자 점차 ‘오빠’가 아닌 ‘괴물’이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아무런 슬픔도 남기지 않은 채 가족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진다. 결국, 그는 처음부터 한낱 부속품처럼 기능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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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늦은 10월 독후감
10월에 읽고 썼어야하는 독후감인데 취업으로 인해 밀리고 밀려 결국 다음 해 1월에 작성하게 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읽는 것부터 힘들었다. 처음엔 자연과학 서적인 줄 알았고, 후엔 에세이인 걸 알았으나 에세이 치고는 과학 용어나 과학적 정보가 너무 많았다. 자연과학이라고 치부하고 읽기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래서 그런가 집중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이면 지쳐서 읽기를 멈추고 책을 덮어두었다. 정말... 하루에 한쪽 겨우 읽듯이 읽어나가 끝낸 책은 우습게도 다시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잔하지만 큰 여운을 남겼다. 이토록 힘겹게 읽어낸 책을 다시 한 번 차분히 읽고 싶다고 느끼는 건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이 서적이 던지는 묵직한 메세지가 좋아서일 것이다. 그 "질서[order]"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르디넴 ordinem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 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 ruler 뒤에는 지배자 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 지구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매 1분 1초, 그보다 더 작은 시간 단위로 모든 것은 변하고 결국 곁에 남는 것 없이 우리는 무로 돌아가기 위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이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지 않을까. 오래된 유적도 시간이 지나면 무너지고, 그 의미가 퇴색하며, 그렇게 변하고 무너진 자리 위에 또 새로운 것이 세워진다. 우리가 자연을 깎아 없앤 것들은 지구 어딘가에서 또다시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인간은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성별, 직업, 경제적 위치, 인종 등으로 나누고, 동물조차 포유류, 어류, 척추동물 같은 범주로 구분한다. 그러나 이런 분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이로 인해 슬픔과 소외감을 느끼며 나 자신이 외부인처럼 여겨질 때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잃어버린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다른 형태로 우리 곁에 돌아오고, 얻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또 다른 형태로 사라진다. 수증기가 물로, 물이 얼음으로, 다시 기체로 바뀌며 끊임없이 순환하듯이, 우리 삶의 모든 것도 형태만 변할 뿐 계속 이어진다. 어느 것에 해당 되지 않는다고 우리의 존재 역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떠한 형태로도 이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 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분류와 소외감, 잃어버림과 얻음의 순환 속에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본질을 이야기한다. "다르다", "틀렸다"고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의문을 제기하며, 과학적 설명과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가치를 상기시킨다. 때로는 과학이 틀렸을 수도 있고, 사람들이 만든 분류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그렇게 단순히 분류되거나 정의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어떤 기준도 우리보다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상이 전부 싫고, 왜 긍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세상이 나를 미워하는 것만 같을 때, 이 책은 조용히 위로를 건넨다. 분류와 정의의 틀을 해체하며, 잃는 것과 얻는 것의 순환 속에서 우리가 지금 있는 순간의 소중함과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어떤 인종은 다른 인종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백인은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그것은 "그냥 과학의 문제"라고 그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아무 문제 될 것 없다는 투로. 이 사다리,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다. 이 사다리, 그것은 위험한 허구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말은 그 허구를 쪼개버릴 물고기 모양의 대형 망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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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준의 소설 만세: 좋아하는 것을 지키는 용기의 이야기
정용준 작가의 에세이 소설 만세는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땐 정용준 작가가 소설, 그리고 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들을 엿보게 된다. 그러다 중반 쯔음에는 남의 일기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이 이야기가 그저 소설가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작가는 에세이를 통해 소설을 읽고 쓰는 이유가 직업적인 의미를 넘어서,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는 소설가뿐만 아니라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다.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서서히 기울어지는 것들을 바로 세울 수 없더라도 그것을 버티고 선 이들의 삶에 “수고했어. 최선을 다했어.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어.” 말해 주는 것. “힘들어? 그러면 관둬.” “열받아? 그러면 하지 마.” 이런 말들은 이제 지겹다. 뭐든지 쿨한 것. 하나도 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을 쓰고 읽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초라하고 세련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래서 경쟁력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나쁜 전망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럴 가치가 있어요. 당신이 소설을 그렇게 지킨다면 소설 역시 당신을 그렇게 지켜 줄 것입니다.” 내가 특히 감명 깊었던 부분은 지인이 예전에 글에 대한 트라우마로 글 쓰기를 망설이던 내게 보내줬던 문장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열망하고 꿈꾸고 이루고 싶은 것에 다른 사람의 인증이나 보증은 필요 없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를 설득할 근거를 마련할 수는 있겠지만 근거를 통해 내 마음과 감각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유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유는 내 감정과 감각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유가 있다 한들 원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 것이고,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이유를 핑계 삼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와 가치는 객관적이고 복잡한 셈법과 무관하게 바로 내 곁에, 내 안에 존재한다. 왜냐고? ‘내’가 원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느끼고 있는 감각과 감각의 정도를 부정할 수는 없다. 뜨겁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내게 뜨겁다면 뜨거운 것이다. 사랑하면 안 된다. 사랑할 가치가 없다. 그것과 함께하면 절대로 안 된다. 아무리 뜯어말려도 사랑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그것이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것이 인간이다. 너 그러다가 망한다, 넌 후회할 거야, 하는 조언을 듣고, 이해했고, 긍정했음에도 기어이 해 버린다. 보이지 않으면 마음에 품어 은밀히 보고 꿈에서도 보고 상상으로 경험해 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환상통은 진짜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내가 통증을 느낀다면 그것은 ‘통의 환상’이 아닌 ‘환상적인 통’이다. 어떤 세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이고 실제보다 더 실재한다.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을 생각했다는 것만으로, 그것을 마음에 품고 상상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붐비고 어쩔 줄 모르게 되는, 때문에 쓰고 싶고, 읽고 싶은, 이 감각과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감각과 감정과 상상에 스민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그냥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것은 존재한다. 이 부분은 내가 한동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을 때, 지인이 발췌해 준 문장들로서 개인적으로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작가의 글이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고, 단지 나의 열망과 감각을 따르라는 것이다. 상황이 어렵고, 시간이 없고, 재능이 부족하다고 해도, 결국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 많고, 해야 하는 이유는 찾기 어렵지만, 그저 하고 싶은 마음만 존재할 뿐이다. 정용준 작가는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자”고 말하며, 머리가 내 마음을 잘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한다고 덧붙인다. 이 에세이는 글쓰기를 넘어, 예술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감동과 용기를 주는 말들이 담겨 있다. 글을 쓰면 안 되는 이유는 너무너무 많은데 글을 써야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방해만 될 뿐이다. 마음이 있다면 그것에 사랑이 있다면 읽거나 쓸 것이다. 어떻게든 읽기를 향해 쓰기를 향해 나아가려고 애를 쓸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많이 고민하지 말자. 똑똑한 이성과 논리에 내 마음을 맡기지 말자. 상황이 어렵다. 시간이 없다. 재능이 없다. 반응이 안 좋다. 전망이 어둡다. 끊임없이 말하는 똑똑한 머리는 내 마음을 잘 모르거나 모르고 싶어 할 테니. 읽다 보면 이 에세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공감이 되고, 그래서 위로가 깊이 와닿는다. 작가의 조언이 마치 꼰대들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쉬운 ‘노력 부족’이나 ‘돈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그가 직접 경험하고 느낀 바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메시지로 느껴진다. 작가는 애정하는 일을 하는 것이 그만큼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결국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진정성 있는 조언을 전하고 있다. 또한, 작가는 글쓰기를 시작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대학원 문예창작과에 지원하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과정을 담고 있다. 러시아어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어떻게 소설을 향한 열정을 쫓아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안도감을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고, 여러 방해를 극복하며 노력한 과정을 보며, 나 역시 좋아하는 일을 쫓아 살 수 있겠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정용준의 글은 단순히 소설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하는 한마디, “그것은 존재한다”는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를 전달한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내 안의 열정을 확인하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지속할 용기를 얻었다. 그래서 이 블로그 글의 부제는 좋아하는 것을 지키는 용기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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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구의 증명 –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과 상실을 증명하다
2015년에 출간된 작가 최진영의 글, 구의 증명은 너무 담담하고 담백하게도 청춘과 같은 나이에 불같이 사랑했고 그 상대를 잃은 이의 감정을 열거한다. 또한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 상실을 다룬 작품이며, 그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고통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다. 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이 되자고 했다. 구의 증명을 읽으면서 몇 번을 멈추고 다시끔 읽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나를 소설 속으로 이끌게 하는 힘. 그리고 담이와 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끔 하는 힘. 담이와 구의 감정에 휘말려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구의 죽음과 그로 인한 담이의 고통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모든 감정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어느새 내가 담이가 되고, 내가 구가 되고 있었다. 작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게,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과 그 상실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고, 때로는 가끔은 그 감정과 시선이 너무 버거워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책 속의 담이가 느끼는 감정, 구의 상실을 견뎌내는 이야기는 마치 내 삶 속 어느 순간을 꺼내어 쓴 것 같았다. 특히, 담이가 구를 먹으면서도 스스로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도 정신을 다시 다잡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정말 강렬했다. 이걸 읽으면서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소설로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열예닐곱 살 때부터 매일 짐을 이고 나른 구의 팔 근육은 마르고 팽팽하여 근사했다. 솜씨 좋게 깎아놓은 연필 같았다.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맨 정신으로 행하기 어려우나 담은 구가 그 누구에게도 발견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하나로 구를 몸 안에 숨겨냈다. 구와 담이가 하는 생각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것들과 너무 닮아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나 삶에 대한 방황, 타인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죽음의 불합리함을 고민하는 모습들. 마치 우리가 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질문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게 아닐까 싶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노마, 병으로 죽은 이모, 돈에 의해 죽은 구... 이런 것들이 과연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이 불합리함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 불합리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나만 살아 있다. 나만 이 몸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이 점에서 최진영 작가의 글은 단순히 창작 소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감정들을 진솔하게 쏟아낸 자서전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을 구의 증명이라고 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하려 했을까? 구는 증명을 해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했어야만 하는가? 구의 존재와 그의 죽음,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담이가 곧 구의 증명이란 것을 깨달았다. 구는 담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단순히 구의 증명을 담이가 구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연인을 '뜯어먹는' 행위에만 집중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뜯어먹는 것 그 이상을 내포했다. 작품 속에서 '담이가 구를 뜯어먹는 행위'는 단순한 연인의 관계를 넘어선다. 이 장면을 단순히 직관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직관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담은 구가 원했던 것처럼, 구가 죽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무로 돌려주는 것 뿐이라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깊이는 단순히 로맨스나 상실을 넘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어째서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구가 죽었다고, 내 이름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 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있는데. 만지고 안을 수 있는데. 이 소설 속에서 구는 담이고 곧 담이 구이기에 담이 살아나아가는 것이 곧 구의 증명이라, 그래서 제목을 구의 증명으로 지었는가 싶었다. 구는 담을 통해 증명해나아가고 있음으로.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그때 구의 소원을 마음으로 거듭 외워본다. 고통과 생과 담대함, 그 의미가 점점 뭉개지고 흩어진다. 다 읽고 나서는 제법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았다. 그래서 담이는 오래 살았을까하는. 구도 담이 오래오래 살길 바랐고, 담이도 그랬는데. 이 소설에서 구는 담이고, 담이 구라서 결국 담이가 살아가는 것이 구의 증명일텐데, 담이는 증명해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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