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끝자락에서 바람의 인사를 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공기는 투명하게 얼어붙어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로 선 나무들을 보며, 이제는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의 가장 깊은 방에 불을 밝혀야 할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저에게 겨울은 단순히 춥고 긴 계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했던 한 해의 성취와 상처를 눈 아래 묻어두고, 오직 ‘나’라는 본질과 마주하는 정직한 멈춤의 시간입니다.
이 시들은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만든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듯 쓴, 저의 내밀한 고백들입니다. 홀로 눈길을 걸으며 내 안의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얼어붙은 대지 아래서 조용히 숨 쉬는 생명의 약속들을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삶의 겨울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 글들을 건넵니다. 이 하얀 정적 속에서 당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추운 계절, 제 마음 한 자락에 기꺼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겨울, 하얀 정적이 내려앉은 창가에서 Līlā (लीला) 드림
첫눈의 은유
가을이 두고 간 빈 가지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하얀 침묵 세상의 모든 채색을 지우며 겨울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옵니다
어제까지의 발자국을 덮고 울퉁불퉁했던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듬어주는 손길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에 가만히 나의 이름을 써 봅니다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쓰는 마음은 상처보다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나의 가장 깨끗한 고백입니다
차갑게 내려와 온기로 녹아드는 눈처럼 나의 시린 기억들도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투명한 물방울로 피어나기를
얼음 아래 흐르는 노래
강물은 멈춰 선 듯 보였습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 몸을 가두고 단단한 유리 갑옷을 입은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두꺼운 얼음장 그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자갈을 굴리며 가는 낮고 묵직한 물소리가 들립니다
멈춘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고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중이라고 강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겨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나의 삶에도 혹독한 정적이 찾아올 때 내 안의 가장 깊은 중심만은 봄을 향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이제는 믿기로 했습니다
성에가 그린 지도
밤새 창문에 서린 성에를 봅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틈을 타 나도 모르는 사이 창문에 피어난 차갑고도 눈부신 유리 꽃들
날카로운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에 이토록 섬세한 무늬가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의 아픔도 멀리서 보면 저토록 아름다운 결정체였을까요
손가락 끝으로 성에를 녹여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듭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차가운 세상이 어쩐지 어제보다 선명해 보입니다
얼어붙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내 안의 슬픔이 딱딱하게 굳어 결정을 이룰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야 할 투명한 길 하나를 발견합니다
외투 깃을 올리며
겨울은 질문을 던지는 계절입니다 가진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무엇을 남겨두었는지 묻습니다
몰아치는 칼바람 앞에서 나는 서둘러 외투 깃을 올리고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넓혔던 어깨를 접고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 작아지는 시간
작아질수록 체온은 선명해집니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투 안쪽 심장과 가장 가까운 그곳에서 나만의 온기가 소중하게 고여 있습니다
세상이 차가워질수록 내가 나를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깃을 세운 어깨의 무게로 깨닫습니다 나는 오늘, 가장 낮은 자세로 나를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겨울밤의 도서관
세상의 소음이 눈 아래 묻히고 밤은 가장 두꺼운 책장을 넘기듯 조용히 다가와 곁에 앉습니다
불 꺼진 거실, 창밖의 가로등 빛이 읽다 만 삶의 여백 위에 내려앉을 때 나는 비로소 문장과 문장 사이 숨겨진 나의 진심을 읽어 내려갑니다
화려한 수식어는 낙엽처럼 져버렸고 날카로운 형용사들은 성에가 되어 굳었지만 오직 '나'라는 주어 하나만이 시린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빛납니다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이 고요를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는 밤 겨울은 나에게 가장 긴 문장을 선물하며 스스로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용기를 줍니다
포근한 섬
겨울밤, 두툼한 이불 속으로 차가운 몸을 가만히 밀어 넣습니다. 바깥세상의 바람은 창문을 두드리지만 이불 속은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작고 포근한 섬이 됩니다.
내 몸의 온기가 이불결에 스며들어 차가웠던 공간을 조금씩 데워가는 시간. 행복은 멀리 있는 거창한 빛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안아줄 때 생겨나는 이 소박한 온기임을 깨닫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밤은 깊어가고 이불 속의 온도는 내 마음만큼 깊어집니다. 낮 동안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줄을 비로소 느슨하게 놓아주는 정적의 시간. 세상이 아무리 차갑게 식어 있어도 나를 지켜주는 이 든든한 품 하나로 나는 오늘 밤, 가장 평온한 꿈을 꿉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비밀
잎사귀들이 소풍을 떠난 뒤에야 나무는 비로소 제 몸속에 숨겨둔 하늘로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어느 가지가 햇살을 더 좋아했는지, 어느 줄기가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냈는지 숨김없이 드러난 그 가녀린 선들이 겨울 하늘 위에 수묵화처럼 번집니다 비어 있어서 쓸쓸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무는 가장 가벼운 몸으로 가장 깊은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우리도 가끔은 이토록 홀가분해져서 남들에게 보여주려 애썼던 모습 대신 투명하게 비치는 나의 진심을 가만히 마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앙상해진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품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겨울 바다의 정적
여름내 소란하던 파도 소리는 차가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모래사장 위를 걷는 나의 발자국만이 유일한 대화가 되는 쓸쓸한 해변 바다는 얼어붙지 않으면서도 얼음보다 차가운 침묵으로 나를 맞이합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끝자락은 붙잡으려 애쓰던 모든 욕망들이 사실은 거품이었음을 무심히 보여줍니다 수평선 끝을 바라보며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파도에 흘려보냅니다 돌아올 때는 더 맑은 소금기로 돌아오기를, 얼어붙은 마음의 앙금들을 저 깊은 수심 속에서 녹여내기를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는 비어있음이 주는 평온한 온기가 차오릅니다
겨울 새의 날갯짓
모두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날 때 홀로 시린 공기를 가르며 작은 날개를 파닥이는 새 한 마리
먹이 없는 들판과 얼어붙은 나뭇가지 사이 그 작은 몸짓이 애처로워 보이지만 새는 한 번도 자신의 길을 의심해 본 적 없는 듯 당당합니다
찬 바람을 피하기보다 그 바람의 결을 타고 더 높이 오르는 법을 겨울 새는 비행의 몸짓으로 가르쳐줍니다 시련은 부러뜨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날개가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하기 위해 오는 것임을
나의 삶도 가끔은 이토록 시리지만 겨울 새처럼 쉼 없이 날갯짓하다 보면 어느덧 차가운 공기마저 나를 떠받쳐주는 부드러운 힘이 되겠지요
별빛의 위로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밤하늘의 별들은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여름날 습기에 가려졌던 희미한 빛들이 겨울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고개를 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밤 나 홀로 깨어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별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간직해온 오래된 위로를 빛의 속도로 건넵니다
시린 밤은 슬픔을 키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빛들을 하나둘 발견해가는 시간입니다
오늘 밤, 내 마음의 가장 어두운 방에도 별빛 한 조각 스며들어 고요한 꿈 하나 피워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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