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돌아오는 계절 01

Lila

봄이 돌아오는 계절
바람의 결이 바뀌었습니다
살을 파고들던 시린 칼날 대신
뺨을 간지럽히는 낯선 온기
아직 세상은 갈색의 침묵 속에 머물러 있지만
코끝에 닿는 공기의 무게는
어딘가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비워냈던 자리마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고이고
멈춰있던 심장이
낮은 목소리로 박자를 맞추기 시작합니다
​오고 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가장 어두운 밤을 통과한 나에게
다시, 계절이 돌아오고 있다는 것을

첫 비의 인사

잠든 땅을
누군가 조심스레 두드린다
겨울의 먼지를 씻어내는
투명한 손길

빗방울마다
오래전 잊었던 이름들이
깨어났다

비는 나를 불러 세웠다
다시, 처음으로

젖어야만
비로소 열리는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햇살의 무게
어제와 같은 창가인데
무릎 위에 내려앉은
빛의 무게가 달랐다

가만히 어깨를 감싸 안는
다정한 손
날카롭게 얼어붙어 있던
마음의 모서리들이
노란 온기 아래
부드럽게 깎여나갔다
나는 그 무게를
기꺼이 감당하며
빛 속에 머물렀다
어디선가 꽃이 피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잠든 사이
내가 울고 있던 사이에도
어딘가의 가지 끝에서
어딘가의 돌틈 사이에서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는 것들
아무도 봐주지 않아도
제 시간이 되면
스스로 열리는 꽃잎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안의 어딘가에서
꽃이 피고 있을지 모른다
봄 냄새를 처음 맡던 날
문을 열었을 때
왈칵 쏟아지던
낯선 공기

따뜻해진 바람이 아니라
흙이 숨을 쉬는 냄새였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살아나 내뿜는
달콤하고 시큼한 숨결

잊고 지냈던 후각이 깨어나자
내 안의 서랍들도
하나둘 열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 냄새였지
나는 코끝을 스치는
그 아득한 냄새를 따라
다시 한 번
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새순의 용기

​그렇게 여린 몸으로
어떻게 그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올 생각을 했을까
가지 끝에 돋아난
아주 작은 초록
만지면 툭, 터질 것 같지만
그 안에 겨울을 통과한
가장 거대한 것이 들어있다
나무는 아파하지 않는다
그저 제 안의 것을 믿고
밀어낼 뿐
연분홍 새순의 어깨 위로
봄볕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봄바람에 흔들리다
오늘 바람이 좋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그 사이의 온도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 하나가
바람을 타고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러나 나쁘지 않았다
이 흔들림이

가만히 서서
바람에 몸을 맡겼다

흔들리는 것이
아직 열려있다는 뜻이니
씨앗의 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땅 위에는
아직 아무 흔적도 없다

그러나 땅 아래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장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둠 속에서
혼자서
소리도 없이.

껍질을 밀어내는 일
뿌리를 내리는 일
위를 향해
방향을 잡는 일

나의 어떤 시절이
그랬다

보여줄 것이 없어
초라하다고 느꼈던 날들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 같아
두려웠던 밤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나의 뿌리였다

씨앗은 서두르지 않는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안다
녹아내리는 것들에 대하여
꽁꽁 묶어두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억지로 녹이려 했다면
더 단단하게
얼어붙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가만히 두었을 뿐인데
때가 되니
스스로 경계를 허물었다

녹아내린다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는 뜻이었다
같이 핀다는 것

길가에 나란히 서서
일제히 잎을 여는
꽃들을 바라본다

누구 하나 먼저 핀다고 자랑하지 않고
늦게 핀다고 서두르지 않으며
각자의 속도로
피어나는 풍경

나란히 피어나는 것만으로
어느새
봄이 되는 것
돋을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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