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 뒷마당은 아무도 쓰지 않은 거대한 편지지가 됩니다 어제까지의 어지러운 발자국도 지우고 싶었던 후회 어린 마음들도 하얀 침묵 아래 고요히 머뭅니다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그저 비어 있는 풍경 속에 나를 앉혀둡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여백이 바로 당신의 쉼표라고 세상은 온통 하얗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서두르지 않는 눈송이처럼 나의 마음도 이 여백 위에 잠시 머물다 보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있는 그대로를 가만히 두는 일임을
온기의 정주(定住)
겨울에 머문다는 것은 차가운 바람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따뜻한 방 하나를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외투 깃을 바짝 올리고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른 채 걷는 속도를 늦추어 봅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하얀 입김이 서로의 어깨를 보듬는 다정한 구름처럼 보입니다 시린 세상이 문틀을 흔들 때마다 나는 더욱 깊이 나에게 머뭅니다
밖으로 흩어지던 마음들을 불러 모아 작은 촛불 하나 켜두고 마주 앉으면 비로소 들리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얼어붙은 창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위로와 내 안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낮고 단단한 생의 의지들
이 시린 계절의 한복판에서 내가 나를 온전히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겨울은 이미 따스한 안식처가 됩니다
겨울 햇살의 긴 꼬리
낮달이 걸린 오후 두 시 창가 깊숙이 발을 들이미는 노란 고양이 같은 햇살 한 줄기 여름날엔 그리도 따갑더니 겨울의 햇살은 어찌 이리도 수줍은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내 발등 위에서 잠시 졸다 갑니다
해의 꼬리가 조금씩 짧아질수록 나는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그 온기를 한 방울이라도 더 붙잡으려 슬그머니 의자를 옮겨 앉습니다
찰나의 따스함이 소중한 건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린 계절 속에서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와준 다정한 안부이기 때문입니다
함박눈이 지우는 길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어제까지 내가 걸어왔던 삐딱하고 어지러운 길들이 하얀 이불 아래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멍하니 창밖을 내다봅니다 길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겨울이 내어준 가장 자유로운 지도입니다
서둘러 발자국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지나가길 기다리는 대신 아무도 밟지 않은 저 정결한 고요 위에 나의 마음을 가만히 눕혀 봅니다
상처 난 기억도, 서둘러 냈던 욕심도 눈 아래 묻히면 그저 포근한 풍경일 뿐 세상이 이토록 깨끗해진 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말없이 건네주는 것이겠지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를 보게 됩니다 멈춰 선 자리에서 시작되는 나만의 고요한 행진
언 땅에 귀를 대면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날 나는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단단한 대지 위에 귀를 대어 봅니다
딱딱한 흙 속에 갇혀 숨을 거둔 줄로만 알았던 생명들이 낮고 웅장한 목소리로 봄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차디찬 지표면 아래에서 수천 마리의 씨앗들이 제 몸의 온기를 모아 껍질을 녹이고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치열하고도 고요한 전투 멈춘 것은 계절이 아니라 나의 성급한 시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가장 조용할 때 가장 뜨겁게 일하고 가장 멈춰 있을 때 가장 멀리 나아가는 저 강인한 대지의 맥박을 듣습니다
단단한 계절의 고백
차가운 공기가 가슴 깊이 들어올 때면 비로소 마음이 한곳으로 모입니다 어디로든 흘러가려 애쓰던 생각들이 어느새 단단한 평화가 되어 내 안에 조용히 머뭅니다
얼어붙는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던 마음들이 제 자리를 찾아 서로를 꼭 붙잡아주는 일입니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을수록 나는 내 안의 온도를 더 가만히 살핍니다 밖은 서늘한 침묵뿐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다정한 기운은 오직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불씨입니다
비록 거창한 꽃은 피우지 못해도 이 시린 계절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단단해졌습니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건 내 안에 켜둔 작은 등불 하나가 가장 차가운 밤에도 식지 않고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 안의 계절
창밖엔 찬 바람이 서성이고 있지만 내 방 안엔 작은 온기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따뜻한 차의 향기, 무릎 위에 놓인 포근한 담요 한 장,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스탠드의 주황빛
세상이라는 커다란 계절 속에서 나는 나만의 아주 작은 계절을 만듭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외투를 벗듯 긴장을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나에게 머뭅니다
추위가 세상을 넓게 덮을수록 나의 방은 더욱 아늑하고 깊어집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한 풍경 이 작은 공간이 오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안식처입니다
정적의 무늬
불을 끄자 방 안으로 겨울밤의 깊이가 밀물처럼 들어옵니다
가구들이 제 자리에 낮게 엎드리고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 정적의 살결을 툭, 툭 건드리는 시간
창가에 비친 그림자를 가만히 봅니다 낮 동안 나를 옥죄던 이름표들을 떼어내고 오직 실루엣으로만 남은 담백한 나를 대면합니다
말들은 눈송이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비워진 가슴 속엔 차갑고도 투명한 평화가 나이테처럼 둥글게 고입니다
아무것도 더할 필요 없는 이 완벽한 멈춤
나는 비로소 나라는 고요 속에 깊이, 정주합니다
불씨의 안부
겨울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작은 화로 하나씩을 들여놓습니다
찬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맞잡을 때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눅진한 온기 그것은 서로의 내밀한 겨울을 말없이 쓰다듬는 다정한 안부입니다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야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것들 우리가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거창한 햇살이 아니라 작은 체온 하나라는 그 평범한 진리
식지 않는 마음들이 모여 이 시린 계절의 외벽을 데우고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불씨를 나누며 가장 추운 밤을 가장 따뜻하게 통과하고 있습니다
고요의 품
이제 알겠습니다 겨울은 나를 가두러 온 것이 아니라 포근한 품으로 나를 쉬게 하려 온 것임을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은 것은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내 마음의 낮은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다정한 권유였습니다
외투를 벗고 겨울이 내어준 침묵의 의자에 앉아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습니다 시린 계절을 지나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이 정적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아름답다고 겨울은 나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립니다 창밖의 어둠마저 푸근해지는 밤 나는 이 깊은 고요의 품 안에서 가장 평온한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스무 편의 고요를 함께 건너와 주신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글이 당신의 시린 손을 녹여주는 작은 온기가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고요의 품에서, Līlā (लीला)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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