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gn In

소설 감상 서평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을 때
주인공 장진주는 회사에서도 모두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생각을 한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자신에게 욕을 하고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여느 때와 같이 무시당한 하루를 보낸 장진주는 한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때 한 사내가 와서 한 나무를 가리키며 저 나무의 있는 스위치는 스위치를 내린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그을 좋아하도록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를 싫어하도록 만드는 스위치라고 했다. 장진주는 고민도 없이 스위치를 내렸고 집에 가니 자신을 쌀쌀맞게 대하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참고 다음 날 회사에 갔다. 모두가 장진주를 무시하지 않고 살갑게 대했다. 모두가 자신을 챙기고 자신의 잘못에 사과를 했다. 장진주는 너무 행복했다. 회사에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집에 올 때는 스위치를 다시 올리고 엄마를 만났다. 그렇게 아침에는 회사를 가는 길에 스위치를 내리고 저녁에는 집에 오는 길에 스위치를 올렸다. 30분은 족히 걸리지만 괜찮았다. 하지만 장진주는 점점 귀찮아졌고 스위치를 내린 상태로 생활하게 되었다. 자신을 좋아하는 회사동료가 생기고 그와 연락을 하며 행복한 회사생활을 했다. 집에서 엄마가 자신을 싫어해도 그냥 무시했다. 그런데 어느날 회사에서 엄마에게 전화가 왔을 때 받기 싫어하는 자신을 보며 장진주는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을 유일하게 좋아해줬고 자신에게도 너무 소중한 사람이 어느 순간 거북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은 스위치를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회사동료와 저녁에 약속을 해서 스위치를 올릴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날에는 꼭 올려야겠다며 그냥 집으로 갔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 가는 길에 스위치가 있는 나무로 갔다. 하지만 그 나무는 베어 없어졌었다. 장진주가 절망하며 울고 있을 때 그 스위치의 존재를 알려준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가 오늘 아침 나무가 베어졌다며 좀만 어제 왔었으면 올릴 수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장진주가 계속 애원을 하자 사내가 한 스위치를 꺼냈는데 그 스위치는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였다. 장진주는 고민하다가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 사내는 장진주에게 누구나 스위치를 가지고 있고 그건 누구나 올리고 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나다라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장진주는 자신의 마음 속에 스위치를 떠올리며 힘껏 인사한다. 이 소설을 읽고 든 생각 이건 김동식 작가의 소설집 중 하나의 인간, 인류의 하나 중 스위치 하나로 바뀌는 내 세상의 내용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모두가 자신을 다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최근에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에 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 이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 깊었다. 모두가 날 싫어하는게 아니라 생각해도 다 나를 피하고 있는 것만 같고 다 날 싫어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아 다 날 좋아했으면 그냥 뭐 하나만 누르면 다 날 좋아했으면 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할 때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는 조건같은 건 없다. 그렇지만 만약에 이렇게 모두가 날 싫어하는 것 같을 때 저 스위치가 내 앞에 있다면, 그리고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었더라면, 그럼 나는 그 스위치를 내렸을 것 같다. 힘든 이 순간에는 정말 다 날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날 좋아해주는 가족들 생각은 안나고 싫어하는 그 상대들에게만 신경을 써서 지체없이 행동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을 있었으니 이제 그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날 싫어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내가 지금 당장 너무 힘들고 또 공교롭게 그때 조금 친구들의 행동이 변하고, 아니 어쩌면 안변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에 더욱 그렇게 받아드리고 사소한거 하나하나 다 의미를 부여하고 생각하고 슬퍼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그 친구들은 여전히 날 좋아해주고 있었다. 이 얘기가 소설과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저 소설을 읽고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고, 읽으면서도 사실은 좋아하고 있는데 주인공만 못느끼는건가?라고 생각하며 읽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은 다를지라도 나에겐 인상 깊게 다가왔다. 인상깊었던 구절 누구나 스위치를 가지고 있고 그건 누구나 올리고 내릴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남이 아니라 나다. 적ㅡ로 난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처음에 읽었을 땐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언가 엄청 중요하고 크게 다가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몇 번이나 곡씹어읽어보고 읽어보았다. 사실 아직도 조금은 이런 의미가 맞나?라고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는 누구나 스위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그 스위치를 내리느냐 올리느냐 즉 마음가짐을 어떻게 먹냐에 따라 날 좋아하는 사람이 날 싫어할 수도 날 싫어하던 사람이 날 좋아할 수도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남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라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지가 아니라 내가 뭔가 잘못된 행동을 했나 내가 그 사람한테 상처가 될 행동을 했나를 생각해보고 이 행동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계속 난 아무것도 안했는데 저사람은 날 싫어해라고 생각을 하고 그렇게 행동을 하니까 남들이 날 더 싫어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것을 알고 행동을 바꾸려고 한다면 즉, 내 안의 스위치를 내리려고 한다면 즉각적으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점차적으로 효과가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읽을 때에 그래 내 행동이 문제일수도 있어 내가 바껴보자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서평을 쓰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이 책의 내용을 잊고 또 그냥 예전처럼 왜 날 피하려 하는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시 이 서평을 쓰면서 내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젠 이 내용을 잊지 않고 내 행동을 먼저 바꿔봐야겠다.
  • 서율이
일제강점기, 농민들의 아픔
이 소설은 일제강점기 때의 소설이다. 등장인물 형인 응칠과 동생인 응오의 얘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추수의 계절 가을에 있었던 일이다. 성실한 농군인 응오가 벼를 털 때가 왔음에도 계속 벼를 털지 않고 계속해서 두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렇게 계속 두다가 그 벼들을 도둑맞았다. 형 응칠은 그 벼를 훔친 도적을 잡기 위해 응오의 논에서 숨어있다가 도적을 잡게 되었다. 그런데 그 도적은 바로 동생 응오였다. 응칠은 그런 응오에게 매질을 한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모습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응오가 벼를 털지 않고 있던 부분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지주로 보면 자기로도 그 벼는 넉넉히 거둬들일 수는 있다마는, 한 번 버릇을 잘못 해놓으면 어느 작인까지 행실을 버릴까 염려하여 겉으로 독촉만 하고 있는 터이었다. 실상이야 고까짓 벼쯤 있어도 고만 없어도 고만, 이라는 내용이 있다. 지주는 자기의 돈으로 충분히 자신들이 먹고살 벼를 거둬들일 수 있는데 버릇이 잘못든다는 그런 이유로 농인들이 힘들게 지은 벼들을 다 가져간다. 그 벼들을 가져가지 않아도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어떤 글을 읽었는데 농부들은 벼들을 다 재배하고 나면 지주들에게 주는 돈, 농사를 짓는 데에 드는 돈을 갚고 하다보면 오히려 빚만 더 생기게 된다는 내용을 보았다. 농사하는데에 드는 돈이 많은 것도 한 몫하지만 지주들이 거둬가는 것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이 문제다. 굳이 그 벼들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을텐데도 굳이 많은 양의 벼를 거두어가 농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지주들이 가져가는 벼의 양을 조금만 줄인다면 다같이 잘먹고 살 수 있었을텐데 지주들의 흉포함이 보였다. 그러다 응오가 자신의 벼를 자신이 훔친 것에 의아했다. 왜 굳이 그 벼를 훔쳤을까 자신의 것이니 그냥 벼를 베도 충분했을 것인데 왜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의아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읽다보니 알 수 있었다. 벼를 베게 된다면 그 소식이 지주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것이고 그러면 찾아와서 벼를 달라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였다. 그래서 자신이 땀을 흘려 노력과 정성을 다해 키운 벼를 '훔친' 것이다. 이 부분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자기가 애정을 다해 키웠을 것들이 다른 사람 손에 홀랑 넘어가버릴 것을 아니까 훔쳐버리는 것에 얼마나 지주들의 횡포가 심했으면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살아본 것도 아니고 그런 비슷한 경험도 겪어본 적 없이 그저 그런 적이 있다고 책이나 영상을 통해서 배운 것이 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떠오르는 경험은 없었다. 그저 일제강점기 때 우리 농민들에게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 그 아픔이 어땠을지 이런 생각을 더 하게 되었다. 역사시간에 일제강점기에 대해서도 배우고 이런 내용을 어렴풋이는 알고 있었지만 자세히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농부, 지주에 얽힌 얘기보다는 문화통치, 무단통치 같은 정치적 내용 등에 더 초점을 맞춰 아는 내용들이 더 많았다. 이 소설을 읽고는 내가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그런 게 아닐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다 안다고 끝이 아니라 계속해서 알아보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서율이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제목에 있는 질문은 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이다. 저 질문에 관한 내용으로 이야기가 이어진다. 주인공 존은 기분전환을 하려고 회사에 휴가를 내고 여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트럭사고로 인해 정체가 되어 오랫동안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존은 그렇게 기다리기가 싫어서 반대편으로 차를 돌려 무작정 가기 시작했다. 끌리는대로 느낌대로 차를 운전했다. 기름도 없고 해도 저물어가고 있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른 상태로 하염없이 헤매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불이 보여 다가가니까 '세상 끝의 카페'라는 카페가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카페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존은 들어갔다. 종업원이 메뉴판을 주었다. 메뉴들은 여느 카페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뒷장에는 기다리는 동안 생각해볼 것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 죽음이 두렵습니까? 충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이 질문들을 중심으로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답을 찾고자하는 과정에 대해서 카페 종업원, 주방장, 손님들과 다같이 얘기한다. 처음에는 이 책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쉽게 술술 읽히고 나 또한 저 질문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계속 읽게 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 작가가 약간은 꿈과 같은 현실이 아닌 것만 같다는 식으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당신은 왜 여기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 카페는 뭐가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보이는 장소인데 어떤 어려움으로 이곳에 왔는가? 라고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읽다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말하는 질문의 의미는 나는 왜 어떤 이유로 존재를 하는가였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사람들은 그 존재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하는 일들을 하고 하루하루 만족하면서 살아간다고 얘기한다. 이런 존재 목적을 이른 시기에 깨달을 수도 조금 늦게 깨달을 수도 심지어는 평생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깨닫게 된다면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아니까 그것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그걸 못하고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도 없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책에서 각 질문을 주인공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예시들을 들으며 설명해주었다. 여러 예시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예시가 인상 깊었다. 하나는 어부에 관한 이야기였다. 한 사업가가 어떤 작은 마을에 가서 한 어부를 만나게 되었다. 어부는 아침에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자신은 낚시를 하고 아내는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들이 충분히 먹을 생선들을 잡고 나면 다같이 앉아 저녁을 먹고 지는 태양을 보며 아내와 산책하며 산다고 사업가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사업가가 물고기가 많이 잡히냐, 그렇다고 하니까 그러면 왜 사업을 하지 않느냐 사업을 해서 사람들을 채용해서 물고기를 잡게 하고 그것을 팔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지 않냐고 얘기했다. 그러자 어부는 그럼 돈을 많이 벌면 뭘하냐고 질문했다. 사업가는 돈을 많이 벌고 은퇴하고 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면 되지 않냐고 얘기한다. 그러자 어부가 하고 싶은 거 뭐요? 저는 낚시를 좋아하니까 또 낚시를 하구요? 사업가가 네, 물고기가 적을 수 있겠지만 낚시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부가 그러고 저녁에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고요? 사업가가 네, 아이들의 나이가 들었겠지만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어부가 그럼 왜 굳이 그래야하나요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 대화를 읽고 나도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현재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가 있는데 굳이 성공한 후 그 일들을 해야할까? 지금의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을 포기하고 성공을 위해 아득바득 노력하고 성공한 후에야 비로소 내가 하고 샆은 일을 해야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한 번 친구가 나한테 굳이 미래에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을 불행하게 노력해야할까 난 그렇게 살기 싫다 지금 불행한데 미래에 행복한 게 무슨 의미가 있냐라고 얘기를 했다. 그때 나는 어느정도는 이해했지만 그래도 지금하면 미래에 돈도 많이 벌고 더 행복할 수 있을테니까라는 생각이 더 먼저 들었다. 근데 이 책의 이 부분을 읽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은 시험들이 있으니까 조금 힘들더라고 시간이 지나 대학을 가고나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먼저 하면서 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걸하면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을 충분히 벌 수 있다는 얘기들을 했다. 어짜피 지금 당장 불행한다해도 꼭 미래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면 지금도 행복하게 건강한 삶을 산다면 미래에도 쭉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예시들을 통해 질문의 의미를 찾아갔다. 사실 모든 예시들이 저 질문들과 연관되어있다고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를 진행하며 주인공이 자신이 이해한 것을 얘기하며 질문의 확실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당신은 왜 여기있는가?는 자신의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자신이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장 내일 죽는다 해도 아 나 ㅇㅇ안해봤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 내일 죽는다해도 아쉬움이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는 말그대로의 질문이다. 나는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하지만 두번째, 세번째에 대한 질문엔 답할 수 있다. 난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앞으로 이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질문의 답을 찾고 정말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서율이
무관심의 겨울
'나'인 김씨가 안 씨와 사내와 선술집에서 만났다. 처음에는 김 씨와 안씨가 만나서 파리를 사랑하는가,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는가와 같은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계속해서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다른 곳으로 가서 얘기를 마저하자고 말한다. 그때 한 사내가 자신이 돈이 있다고 같이 가도 되냐고 묻는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하게 되었다. 중국집에 가서 사내가 저녁을 사고 자신의 아내가 오늘 죽었는데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서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그 시체를 팔고 받은 돈을 오늘 다 쓰고 싶으니 같이 해달라고 사내는 부탁했다. 저녁을 먹고 나와서 중국집 주변의 양품점에 갔다. 사내는 안 씨와 김 씨에게 넥타이를 하나씩 사주었고 나와서 귤장수에게 귤을 샀다. 그 후 어디로 갈 지 방황을 하다가 소방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보고 사내는 그 소방차를 따라가자고 했다. 불구경을 하러 가는 것이였다. 김 씨는 불이 더 오래 타기를 바랐고 안 씨는 화재에 흥미가 없었다. 그 때 사내는 불 속에서 아내의 환상을 보았고 남은 돈을 수건에 싸서 불 속으로 던졌다. 안과 김은 사내가 돈을 다 썼다고 여기고 작별을 하려 했지만 사내는 둘을 붙잡고 같이 지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받아야할 돈이 있다며 어느 골목길을 지나 한 집으로 향한다. 돈을 갚으라고 했지만 내일 오라는 소리와 함께 사내는 돈을 받지 못한다. 그 후 셋은 여관으로 향하고 김은 모두 한방에서 자는 게 좋겠다고 얘기하지만 안은 피곤하다며 따로 자자고 한다. 결국 각각 다른 방은 쓰고 아침에 안이 김을 깨우며 사내가 죽었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 둘은 빠르게 여관을 벗어나며 안은 김에게 자신은 사내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안은 김에게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다고 얘기한다. 제목인 서울, 1964년 겨울은 도시화가 진행되며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서로에게 무관심해지고 개인주의가 되어가는 당대 상황을 잘 드러내는 제목이다. 소설 초반에 김 씨와 안 씨가 아무 의미 없는 내용을 또 그저 자신만 아는 내용의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 사내가 여관에서 혼자 있기 싫다고 하지만 무시하는 모습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의 특징이나 차이가 인상 깊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중점적으로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김, 안, 사내로 구체적인 이름을 말해주지 않고 익명화한다. 이는 현대 도시인의 삶의 방식인 개인주의, 의사소통의 단절, 개성 상실 등을 나타내고자 한 의도적인 장치이다. 또 이름을 드러내지 않음으로 특정한 개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수많은 현대인들에게서 보이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처음에는 크게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몇 번을 읽어보니 안과 사내의 차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 둘의 차이에 더 비극적이고 착잡한 느낌이 들었다. 안은 집에 부동산만 해도 3000만 원정도 있고 대학원도 다니는 학생이다. 하지만 사내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 없어서 아내의 시체를 팔고 4000원의 돈을 받고 월부책값을 받으려 다닌다. 안은 사내의 말에 공감하지 않고 사내를 고려하지 않으며 얘기한다. 또 사내가 죽을 것을 예상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편한 대로 행동한다. 안이 사내의 상황에 대해서 툭툭 던지듯 하는 말이 남의 일에는 관심없이 자신만 생각하는 모습을 부각한다. 이것이 빈부격차가 심한 상황에서 돈이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상황을 알고는 있지만 자신과는 관련없는 일이라고 치부하여 무시하고 모른 척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나는 김 씨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 씨는 여관에 갔을 때 사내를 생각하고 같은 방을 쓰자고 얘기한다. 하지만 안 씨가 피곤하다, 따로 사용하자라는 말에 적극적으로 사내를 돕지 못하고 따로 방을 사용한다. 또 다시 한 번 사내를 생각하여 화투라도 사서 놀자라고 얘기하지만 놀꺼면 둘이서 놀으라는 안의 말에 김도 피곤하다고 들어간다. 그리고 사내가 죽고 개미 한 마리가 자신의 바는 김 씨와 같은 사람이 더 많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김 씨는 여관에 갔을 때 사내를 생각하고 같은 방을 쓰자고 얘기한다. 하지만 안 씨가 피곤하다, 따로 사용하자라는 말에 적극적으로 사내를 돕지 못하고 따로 방을 사용한다. 또 다시 한 번 사내를 생각하여 화투라도 사서 놀자라고 얘기하지만 놀꺼면 둘이서 놀으라는 안의 말에 김도 피곤하다고 들어간다. 그리고 사내가 죽고 개미 한 마리가 자신의 발을 잡는 것 같아서 그 자리를 피했다. 여기서 개미는 양심의 가책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김은 힘든 사내를 생각하여 같은 방을 쓰자, 화투치고 놀자고 얘기를 한다. 하지만 안씨의 말에 금방 포기를 해버린다. 이런 모습이 김이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있고 연대감, 소통을 지향하지만 용기가 없어서 금방 좌절되는 사람임을 보인다. 남에게 도움은 주고 싶지만 그렇지 않을려고 하는 주변 반응에 의해 그런 마음을 포기하는 모습이 요즘 현대인들에게서 정말 많이 보이는 것 같다. 다들 누군가 아파할 때 도와주고 싶지만 주변에서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행동으로 실행하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를 돕고 싶지만 그렇지 못했던 경험이 있는가? 있다면 돕지 못했던 이유가 다른 사람들은 돕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당신은 '안'과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김'과 같은 사람인가.
  • 서율이
Made with Slash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