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헌금을 이야기하신다. 다시 돈에 관한, 소유권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부(富)의 본질을 드러내는 이야기다.
헌금함 앞에서 부자들(복수, 남성)의 '풍족한 가운데 일부'와 가난한 과부(단수, 여성)의 '가난한 가운데 전부'가 부딪친다. 전부라고 해도 달랑 두 렙돈이다. 전부라고 해도 액수로는 부자들의 일부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다. 눈으로 보며 손으로 세어 볼 때 두 렙돈은 '겨우'이다. 액수로만 볼 때, 두 렙돈보다는 훨씬 많을 '일부' 앞에서 두 렙돈은 '겨우'이지, '전부'라는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 헌금함에 떨어질 때, 그게 그녀의 '전부'임을 알아 주셨다. 예수님은 그냥 '전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그녀의 두 렙돈이 자기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생명과도 직결될 수 있는 '생활비'의 '전부'라서, 그녀의 '전부'는 모든 것이 꽉 찬, 온전한 '전부'임을 밝히 드러내셨다.
헌금함 앞에서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이다. 돈(물질, 소유)을 들고 우리는 헌금함,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헌금함은 가장 구체적인 '코람데오(하나님 앞에서)'의 현장인 것이다. 그래서 핵심은, 전부냐 일부냐의 논쟁이 아니라,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눅20:25)' 고 하신 때부터 말씀하신, 모든 것의 소유권에 대한 문제이고, 하나님 나라 부(富)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부유한 부자로 살래, 부요한 부자로 살래?
오늘 말씀에 등장한 부자들은, 이 땅에서 재물이 넉넉한 부유(富裕)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내가 가진, 내 모든 것이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인정하는,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전부'로 바쳐 선포한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 나라의 부요(富饒)한 자로 세워진다.
나에게는, 부유함이 돈의 리치(rich)함을 뜻한다면, 부요함은 생명을 낳는 땅의 비옥함(fertile)이나 땅이 열매를 맺는 기름짐(productive)의 정도를 의미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생명 낳고 열매 맺을 수 있게 기도와 말씀으로 영적으로 얼마나 비옥하고, 기름져 있느냐가 부요함의 핵심이다.
예수님의 말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눅20:25)'는 말씀처럼 이곳은 땅과 하늘의 질서가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땅은 하늘 아래 있고, 하늘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땅의 질서를 덮어야 한다. 이게 뒤바뀌면 땅의 부유를 쫓다가는 결국 떠도는 부유(浮遊)하는 인생이 되고 만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하다. 무엇을 하는, 부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단순한 '적용'이라 불리는 행동으로 그렇게 그 부요함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적용이 아니라 먼저 기도의 마음을 주신다. 그 부요함을 소망하느냐고 물으신다. '네, 주님'하고 대답하니, 지난 3일 봉독한 히브리서 말씀 한 구절이 생각나게 해 주신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12:2]
기도하자. 기도로 예수를 바라보자. 부요케 하시리라. 그리고 내 힘이 아닌 성령으로 가난한 과부의 뒤를 따라 헌금함으로 나를 이끄시리라. 전부를 바치게 하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