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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번째_봉독뉴스_250116_숨 좀 쉬고 싶은 당신에게

[나를 살리는 성경 읽기_봉독뉴스_40호]
샬롬 :)
안녕하세요, ‘나를 살리는 성경 읽기’ <봉독>, 봉독지기-김세규 전도사입니다.
지난 한 주 평안하셨어요 😊
○ 네, 저는 평안했습니다
사실 평안할 수 없는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네, 저는 평안했습니다. 아들의 대학 입시도 그 끝을 향하고 있고, 저도 본격적으로 강도사 고시 준비하느라 분주하고, 어머니는 작은 수술까지 받았지만, 네, 저는 평안했습니다.
‘평안’의 기준이 바뀌어서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하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평한 상태, 그래서 몸도 마음도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뒹굴뒹굴할 수 있는 환경이, 저에게 ‘평안(平安)’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을 얻기 위한 전투를 치르며, ‘평안’은 결과로서, 그저 아무 일 없는 물리적·환경적으로 정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안’의 무대는 결과가 아닌 ‘과정’이었습니다. ‘평안’은 주 안에서, 주님과 함께하는, 역동적이고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이번 주도 큰 파도처럼 덮치는 여러 사건들을, 주님의 은혜로, 이번 주의 분량만큼 ‘평안하게’ 서핑하듯 잘 타고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평안했습니다.
○ 그래야 숨이 좀 쉬어져
제가 고 3 때 어머니는 고깃집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영업이 끝난 후, 그 지친 몸으로 다시 ‘갈멜산기도원’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광신’을 속으로 염려했습니다. 제가 본 최고의 ‘비효율’이었습니다. 쉬어서 회복하지 않고, 또 가서 일(?) 하며 더 지치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진짜 염려되어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진짜 기도원에 왜 가?”
“아들, 그래야, 숨이 좀 쉬어져!”
어머니의 답은 답 같지 않은 답이었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그 답을 알아들을 길이 없었습니다. 숨 쉴 곳이 없어 거기까지 간다고? 여기 있는 공기 마시며 하는 기도랑, 거기 있는 공기 마시며 하는 기도랑 다르다고? 이 역시 제가 들은 가장 ‘비효율적인’ 답변이었습니다.
○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제야 숨이 좀 쉬어져요!’
2005년 하나님이 저를 다시 인격적으로 만나 주신 후, 본격적인 교회·신앙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잊고 있던,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비효율의 정점에 있던 문장이 다시, 여기저기에서 제 귀에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드리고 나가는 집사님들의 대화 속에서, ‘목장’이라고 불리는 교회 소그룹 나눔 속에서, ‘카톡’하며 도착하는 문자 속에서 말입니다.
“이제야 숨이 좀 쉬어져요!”
주님의 은혜로, 그 말이 더 이상 비효율적으로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신비롭게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이 쉬는 ‘숨,’ 그분들이 마시는 ‘숨’은 나의 ‘숨,’ 내가 아는 ‘숨’과 무엇이 다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의 숨결 같은 사랑, 봉독
교회 한 지체가 물었습니다. 봉독을 왜 하냐고요. 이 질문은 희한합니다. 왜냐하면 같은 질문에 매번 다른, 다양한 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제 답은 이랬습니다.
“봉독하면 숨이 쉬어져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숨’은 저에게 가장 중요한 단어가 되었습니다. 봉독으로 ‘숨’을 다시 만났을 때 마치 성경-말씀을 여는 ‘키’를 손에 쥔 듯했습니다. 봉독하며 ‘숨’과 ‘생명’은 서로에게 ‘직통’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했고, ‘실감’했습니다.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말씀을 받들어 읽는 봉독은 결국, 「하나님의 생기(נְשָׁמָה, 네샤마)」 즉, 「하나님의 숨(רוּחַ 루아흐)」 을 받아 마시는, ‘숨’ 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읽다’를 넘어 ‘말씀-(숨처럼)-마시다’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알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말씀으로 ‘숨쉬어 살고 싶다’는 바람으로, 말씀을 봉독할 때, 주님은, 어머니가 말한, 내 믿음의 선배들이 말한, ‘이제야 숨이 쉬어지네!’의 은혜의 탄성을 제 입에도 넣어 주셨습니다.
숨이 쉬어져 쉼을 얻고 평안해졌습니다.
살 것 같았습니다.
○ 하나님의 숨통, 봉독
봉독을 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항상 ‘숨∞호흡’이 먼저입니다. ‘살겠다’가 시작되는 곳이 ‘숨’이고, ‘숨’이 충만할 때가 바로 ‘평안’입니다. 봉독은, 창조주 하나님이 당신의 숨으로, 당신의 피조물을 숨 쉬게 해 주신 ‘숨통’이었습니다. 봉독은, 아버지 하나님이 당신의 숨으로 당신의 자녀를 자녀답게 살게 하시는 ‘숨결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다음 주는 요한복음 봉독 마지막 시간입니다.
17~21장까지 봉독합니다. 사도 요한과 함께, 성령 하나님이 그로 쓰게 하신 ‘복음’으로, 하나님의 숨쉬기 운동, 봉독을 같이 하기 원하시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숨이 쉬어지고, 이제야 살 것 같은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숨쉬기 운동장, ‘봉독당’은 23일 목요일 저녁 7시에도 오픈합니다.
우리, 같이 숨-쉬어요.
우리, 같이 살아요.
‘나를 살리는 성경 읽기’ <봉독(奉讀)>에 내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봉독> 상세 안내 페이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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