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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8수_삼상27:1-12_널 혼자 두면 이런 일이 생겨

[Holy-PT][20241218수_삼상27:1-12]_널 혼자 두면 이런 일이 생겨
🖋️
1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2 그래서 다윗은 일어나서, 자기를 따르는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넘어갔다.
3 이리하여 다윗은 가드에 있는 아기스에게로 가서 거처를 정하였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살았는데, 다윗이 거느린 두 아내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었다.
4 다윗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하여지니, 그가 다시는 다윗을 찾지 않았다.
5 다윗이 아기스에게 간청하였다. "임금님이 나를 좋게 보신다면, 지방 성읍들 가운데서 하나를 나에게 주셔서, 내가 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이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함께,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
6 그러자 아기스는 그 날 당장 시글락을 다윗에게 주었다. 그래서 시글락이 이 날까지 유다 왕들의 소유가 되었다.
7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서 거주한 기간은 일 년 넉 달이었다.
8 바로 그 기간에,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습격하곤 하였다. 그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1)들라임에서 술 광야와 이집트 국경선에 이르는 전 지역에 살고 있었다.
9 다윗은, 그들이 사는 지역을 칠 때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옷을 약탈하였다. 약탈물을 가지고 아기스에게로 돌아가면,
10 아기스는 으레 "그대들이 오늘은 2)어디를 습격하였소?" 하고 묻고, 그럴 때마다 다윗은, 유다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여라무엘 족속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또는 겐 족속의 남쪽 지역을 털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대답을 하곤 하였다.
11 다윗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가드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 다윗이 그런 일을 하였다고 폭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
12 아기스는 다윗의 말만 믿고서,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서 그토록 미움받을 짓을 하였으니, 그가 영영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 어떤 게 ‘살 길(道)’ 같냐?
결국, 성경은 어떤 게 ‘살 길(道)’이냐,에 대한 이야기다. 다윗은 오늘도 그 ‘살 길’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그가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가려고 하는 ‘살아나는 길(1절)’이 하나님의 ‘살 길’로 보이지 않는다. 다윗은 어떻게 그 길을 찾은 걸까? 그 길은 어디에 닿았고, 누구를 만나,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을까? 그래서 결국 다윗은 살아났을까? 다윗이 선택한 ‘살아나는 길’을 따라가 보자. 멀리서 볼 때, 최근에 내가 찾은 ‘살 길’과 비슷해 보여 익숙하고 심지어 편안하게 다가온다.
○ 다윗이 혼자 생각하였다
오늘 본문 삼상 27장 1절은 이렇게 생각한다. “다윗이 혼자 생각하였다(1절)” 그리고 곧이어 그가 생각한 내용이 소개된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1절, 새번역)
이 죽을 것 같은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은, ‘혼자’ 생각했다. 늘 하나님께 기도로 묻던 다윗이 어찌 된 일인지, 이 중요한 순간, ‘혼자’ 생각한다. 진정한 위기는 ‘사울의 손’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였다’였다. 혼자 생각해 낸 ‘내 계획’과 ‘내 힘-열심’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며 찾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 살 길을.
○ 초강력 자석에 이끌리듯
적의 땅이 어찌 내 살 길이 될까? 영화로 치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다! 다윗이 혼자 생각해 낸 ‘살아나는 길’은, 바로 적이었던 블레셋 사람의 땅, ‘가드’였다! ‘한 사람’, 사울의 손을 피해 달아난 곳은, ‘블레셋-가드’로 상징되는 ‘세상’ 한복판이었다. 그가 찾아낸 ‘살 길’이 더 크고 악한 세상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어찌 이런 선택이 가능할까? 이게 성경이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삶으로 풀어 증명하는 선택 공식이다. 하나님 없는 생각, 하나님 없는 선택, 하나님 없는 살 길의 끝에는 ‘세상-악’이 있다. 나는 다윗이 ‘생각하고 선택하다’라는 고차원 사고 행위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자마자, 다윗은, 마치 초강력 자석에 이끌리듯 ‘세상-악’에 끌려가 철썩 붙은 것 같다. 너무 당연하게,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 편안하게 말이다. 그쪽으로 ‘살 길’을 낸 순간, 동시에 하나님의 눈(靈眼)은 닫히고, 세상 눈이 켜진다. 번개보다 빨리, 그 길이 ‘살 길’이라는 합리화가 이루어지고, 세상이 주는 확신으로 가득찬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1절)
○ 장사 다윗도, 환경에 장사는 아니다!
다윗은 부하 육백 명을 거느리고 마침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시스에게 넘어갔다(2절). 그 길이 살 길인 것만 같다. 다윗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해지자, 그가 다시는 다윗을 찾지 않았다(4절). 그러니 이 길이 살 길이 맞는 것 같다. 그렇게 두려워하던 ‘사울의 손’에서 벗어난 것 같자, 다윗은 아기스에게 간청, 시글락을 얻어 ‘살기’ 시작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여기서 일 년 넉 달(7절)을 살았다.
다윗은 뭐 하며 살았을까? 이 ‘세상’에서의 다윗의 삶을 드러내는 단어들이 속속 드러나는데 다음과 같다.
침노(습격), 살인(남녀를 가리지 않고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고), 약탈, 거짓말,이다.
선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싸우고, 죽이고, 빼앗고, 거짓말한 게, 그가 ‘살아나는 길’이라 믿었던 ‘블레셋-가드-세상’ ‘속에서’ 한 일의 전부다. ‘선’인 하나님과 끊어진, ‘죄’인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의 요약이고 핵심이다. 하나님 없는 환경에, 다윗도 예외일 수 없다. 하나님 마음의 합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한 닉네임이고, 능력이다. 하나님 없는 환경에, 장사, 없다.
○ 세상은 꽉 물고 늘어진다
이렇게 다윗을 끌어들인 세상은 결코 다윗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다시 하나님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윗을 문 이빨을 더 깊숙이 박는다. 가드 왕 아기스에게 다윗은 얼마나 예뻤을까? 삐리리한 것들만 있었는데, 마침내 제대로 된 에이스가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갖고 싶었지만, 적이라 가질 수 없었던, 그 에이스 다윗이 제 발로 들어와 나의 왕국의 신하가 된 것이다. 다윗이, 원래 자기 나라,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토록 미움받을 짓만 하고 있는 게 이렇게 기쁠 수 없었다(12절). 하나님 나라에 대적할수록, 그는 나의 충신이 되었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계속 그렇게 하게 할 수만 있다면, 마침내 ‘그가 영영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12절)’고, 왕은 생각했다. 너를 어찌 얻었는데, 내 너를 꽉 물어 절대 빼앗기지 않으리라.
세상 악의 이빨이 다윗의 목을 문 격이다. 이제 다윗은 어떻게 될까? 거기가 삶의 땅이 아닌 죽음의 땅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깨닫게 될까? 그 ‘세상’에서 다윗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또 혼자 생각할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보시면 어떤 ‘살 길’을 준비하고 계실까?
알 수 없다. 오늘 본문은 일단 여기서 끝나고, 궁금하면 우리는 내일 다시 말씀 앞에 모여야만 한다.
○ 너를 혼자두지 마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이 모든 악의 시작은,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는, 나를, 너를, 우리를, 혼자 두어서는 안 된다. 말씀 앞에 두어야 하고, 말씀 옆에 있어야 한다. 말씀이 환경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앞에 있는 말씀, 옆에 있는 말씀 ‘속에서’ ‘사는 것’이다. 나를 돌아 보면, 말씀 환경에서도 혼자 생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 혼자 생각하지 않고 말씀에 ‘묻는 것’은 결국 기도다.
어제(17일) 신대원 마지막 채플이 있었다. 신대원 마지막 예배 때 나에게 주신 말씀이 놀랍다. 마치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고, 다시 본질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주님은, 임석순 목사님을 통해 나에게 아주 선명한 메시지를 주셨다. 그것은 신대원에서 품고 나가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내가 사모하고 분투해야 할 것이었다.
오직 기도
오직 성령
○ 기도 버튼부터 켤게요!
기도와 성령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그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에게 있는 것이고, ‘살 길’은 그것으로 인도함 받는 것이다.
말씀 앞에 서 있는 내게 주님이 내비를 켜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너는 말씀 위에서도 얼마든지 너 혼자 생각하고 네 살 길을 찾을 수 있는 놈이야. 세규야, 네 힘으로 말씀 속으로 들어가 말씀 안에서 살 수 없어. 세규야, 내비를 켜 줄게. 기도와 성령. 켰어? 그럼, 일단 출발하자!
오늘 기도와 성령으로 나와 함께 생각해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네, 주님, 기도 버튼부터 켤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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