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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번째_봉독뉴스_241030_진짜 봉독이 뭐냐 뭔요

[나를 살리는 성경 읽기_봉독뉴스_31호]
샬롬 :)
안녕하세요, “말씀이 빛나는 밤에” 봉독지기 김세규 인사 드립니다.
○ 늦가을와 초겨울이 디졸브되고 있어요
가을비가 온다고, 이제 가을인 것 같다고 인사드린 게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늦가을과 초겨울이 디졸브 되는 11월입니다. 11월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월(月)입니다. 이상하게(?) 주일 외에는 다른 빨간 날이 없는 그 단정한 모습이 좋습니다. 그래서 차분해집니다. 9월에는 추석 명절, 10월의 여러 연휴들로 들떴던 마음들이 가라앉고 루틴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더없이 높습니다. 가장 높아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그 끝까지 치솟아, 마치 우주와 종이 한 장 차이로 붙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 하늘과 땅 사이, 손열음의 「Chopin : Nocturnes for Piano and Strings」흐르면, 11월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달이 되고, 가장 사랑하는 일을 절로 하고 싶게 합니다.
이렇게 <봉독>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 또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 특별 기고를 싣습니다
오늘 봉독 뉴스는, <봉독예배>와 처음부터 가장 오래 함께 해 주신 정수영 님의 특별 기고를 싣습니다. <봉독예배>를 통해 깨닫게 된, “왜 함께 모여서 봉독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수영 님의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공유해 주신 글인데, <봉독예배>의 본질과 정체성을 너무 잘 담고 있어 허락을 구하고, 이번 뉴스에 전문을 싣습니다.
🖋️
왜 함께 모여서 봉독해야 하는가?
 왜 함께 모여서 봉독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신은 봉독의 어떠한 매력 때문에 참석합니까? 봉독이 당신에게 어떤 메리트가 있습니까?”
사실 나도 궁금했다. 나는 소리 내서 성경 읽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도 통독을 할 때 봉독을 한다. 그렇다 보니 이런 고민을 하게 됐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왜 굳이 모여서 하는 걸까?’ ‘집에서 하는 봉독과 모여서 하는 봉독은 뭐가 다른 건가?’

나는 ‘내 친구가 봉독지기니까, 친구가 있는 곳이 교회이니까, 성실하게 출석하는 것’이라고 일단 답을 했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가토스의 봉독은 ‘봉독’ 그 자체보다는 ‘함께하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아가토스의 봉독은 보통 서너 사람이 참석을 한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봉독대 앞에 나가서 봉독을 하고, 다른 사람이 봉독할 때에는 봉독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눈 앞에 있는 성경책에 집중한다. 90분의 봉독은 생각보다 많은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주어진 분량의 말씀을 먹고야 말겠다는 마음으로, 때로는 소리 내서 봉독자와 함께 작은 소리로 말씀을 읽기도 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두 손을 높이 들거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기도 한다. 어떻게든 오늘의 말씀을 먹어보겠다는 의지로 이 모든 행동들을 하면서, 두 눈은 항상 활자에 고정해 놓는다.
 눈을 감다
이번 주 봉독은 수면 부족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참석했다. 특히 다른 사람이 봉독할 때 집중하기 힘들었다. 어떻게든 글자를 보려고 힘을 써봤지만 봉독자의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이 침침해 글자도 잘 보이지 않았다. 소리와 글자와 본문의 내용이 공중에서 따로따로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봉독은 망했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그 순간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다. 그렇게 뚫어져라 볼 때는 들어오지 않던 활자가, 눈을 감으니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귀로 듣는 봉독자의 소리는 눈으로 보는 활자보다 더 또렷한 글자였다. 그리고 그 글자는 생각을 거치지 않고 곧장 마음으로 들어와 말씀이 되었다. 봉독을 통해 마음에 들어온 말씀. 그것은 이스라엘의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이 곧 우리를 향한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알게’했다. 그 ‘앎’은 회개와 감사로 이어졌다.
 ‘내’가 아니라 ‘우리’
봉독을 마칠 때 마지막 봉독자가 기도를 한다. 보통 일상적인 끝나는 기도를 하기 마련인데, 오늘 마치는 기도는 좀 달랐다.
“주님,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오늘 나의 봉독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저 한 문장일 것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 기도가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기도자는 곧 그 이유를 말했다.
“주님께서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 우리의 눈과 입이 되어줘
나에게 오늘 봉독은 재즈 밴드 앙상블의 솔로 릴레이 같았다. 피아노, 베이스, 색소폰 등의 악기가 서로 어우러지며 함께 연주하다가 돌아가면서 솔로 연주로 기교를 뽐낼 때와 같이, 봉독자가 봉독대에 올라갔을 때, 그 시간이 ‘봉독’이라는 연주를 위해 주어진 그(그녀)의 온전한 시간인 것 같다고 말이다.
‘함께하는 것’은 ‘너’와 ‘내’가 ‘각자’의 것을 함께 모여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우리’의 것을 함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너의 봉독과 나의 봉독을 함께 모여서 하는 “봉독” 이었다면, 오늘부터 “봉독”은 너의 봉독이자 나의 봉독인 ‘우리의 봉독’이다.
봉독자가 눈으로 활자를 보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때, 봉독자의 음성을 통해 성령님께서 말씀하시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귀를 열어 주시는 성령님과 함께 듣는다. 내 눈으로 보는 것보다 마음에 또렷한 글자와 내 입으로 소리 내는 것보다 마음에 또렷한 말씀을 느껴보자! 왜 함께 모여서 봉독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봉독으로 머리를 감아요
정수영 님의 글은 저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왜 <봉독>의 ‘말씀-공동체-읽기’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 주셨고, 봉독이 다른 읽기와 궁극적으로 무엇이 다른지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눈을 감아요’는, ‘머리를 감아요’입니다. 눈을 감으면, 내 머리 활동 스위치가 꺼지는 것 같아 편안하고 평안합니다. 두 눈을 뜬 말씀 읽기가 ‘말씀-연구’에 집중되어 있다면, 두 눈을 감은 말씀 읽기는, 마치 ‘말씀-만남’에 더 소망을 둔 읽기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귀를 열고, 원래 성경이 읽혀지고 들려졌던 방식으로 봉독할 때, 마치 성령님께서 예수 생수로 제 혼탁한 머리를 감겨 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내 머릿속에 가득한 온갖 더러운 것들을, 말씀으로 감겨 씻겨 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 봉독하며 눈을 감을 때, 성령님은 머리를 말씀으로 감겨 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깨끗한 머리로 말씀 연구도 잘하라고 말입니다.
○ 같이 감지 않으실래요?
가을이 겨울로 포개어지는 이 좋은 11월, <봉독당>은 더 불을 환하게 켜겠습니다. <이사야서>를 53장부터 끝까지 봉독하고, 다시 신약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신약의 남은 책은 <히브리서>를 필두로 한 공동서신입니다.
말씀-봉독으로 눈과 귀로 말씀을 만나기 원하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말씀-성령의 은혜로, 눈을 감고, 머리 감기 원하시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머리와 가슴에 자리한 세상 탁한 것들을 쫓아내고 오직 말씀-예수로 채우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저랑 같이, <봉독예배>로 눈 감고 머리도 감아요.
2024년 11월 3일 수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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