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y-PT] [20241127수_삼상16:1-23]_세규야, 넌 왜 목사가 되려고 해? 글쎄요...
○ 부담스럽게 ‘중심’은 왜 보시는 건대요? 오늘 본문에 그 유명한 구절이 등장한다. 하나님이 사울의 뒤를 이어 ‘나(하나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3절)’ 자를 찾는 과정에서 등장한 구절이다. 하나님이 사람-왕을 보는 기준이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절)
이 말씀은 참으로 힘든 말씀이다. 나는 용모와 키도 볼 게 없고, 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는데! 나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으니 셋 다 그저 그래도 괜찮다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에 안도하는(?) 친구들도 있던데, 나는 이게 더 절망스럽게(!) 느껴진다.
중심이 뭐길래?
거기에 뭐가 있길래?
중심(中心)은 센터(center)다. 중심하면 떠오르는 것들. 심장이 있다. 그러니 생명. 그리고 마음. 그 마음에 감정-기분이 있고, 의지도 산다. 의도로도 불리는 동기도 동거하고, 머리에서 나오는 지식이 아닌 지혜도 여기에 사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거기에는 어떤 방식들이 산다.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왜? 모두 보이지 않는 것들이니까. 느끼는 게 전부가 아니고 말하여 질 수 있는 게 또한 전부가 아니다. 중심은 그렇게 복잡하다.
○ 내 중심에 있는 짜증 누구도 부담을 준 적이 없는데, 졸업을 앞둔 상황은 그 자체로 부담의 악한(?) 영을 삶의 전 영역에 드리운다. 물론 졸업은 내년 2월이지만, 3주 후면 마지막 학기가 끝나니, 사실 졸업이다. 주변에서 묻는다. 뭐 할 거야? 목사 안수는 언제 받아? 이런 질문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힘들다. 왜 목사 안수를 받으려고 해? 즉, 왜 목사가 되려고 해?라는 질문. 내 중심에서 나오는 답은, ‘글쎄?’인데 차마 입 밖으로 소리 내지는 못한다. 너의 사명을 듣고 싶다는 그 눈빛에, 사명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말 못 하는 나의 딱한 상황이 결합하여 내 입을 닫게 만든다.
이런 딱한 상황은 내 몸과 영에 내 힘이 들어가게 한다.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 모든 것들에. 내 힘으로 시작하지 않은 것들에 내 힘이 들어가게 한다. 그 경계는 한 끗 차이다. 조심스럽지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예배와 이벤트의 경계.
○ 꼴같잖구나 어제 수업 후 친한 친구에게 꽤 긴 시간 이런 갑갑한 속내를 털어놨다. 예상치 못한 선물 같은 만남이었고 나 역시 생각지 못한 이런 나의 중심이 술술 풀려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내 중심의 꼬락서니를 있는 그대로 풀어내는데 묘한 용기와 뻔뻔함이 올라오며, 주먹 쥔 내 손의 힘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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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안수를 왜 받으려고? (=목사가 왜 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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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어. 그런데 꼭 지금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해? 그 이유를 말할 수 있음이 목사가 될 수 있는 조건이야? 이유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목사가 되기를 소망하면 안 돼?
물론 그 친구가 이렇게 물은 것도 아니고 내가 이렇게 대답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내 중심에서 이런 질문과 답이 엉켜 나왔다.
○ 넌 항상 그랬어 20살 때 영화감독이 반드시 되겠다고 영화학과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거기에 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영화를 하다가 유학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31살 때 사진학과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패션 사진가나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되겠다고 들어간 게 아니었다. 또 거기에 뭔가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돌아왔는데 사진으로 먹고살 수 없어 절망했다. 이번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수능 영어 강사로 평촌 학원가로 들어갔다. 거기에 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48살에도 역시 반드시 목사가 되겠다고 거기, 신대원에 들어간 게 아니었다. 뭔지는 몰라도 거기에 또 뭔가 있을 것 같았고, 그래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게 전부다. 그놈의 ‘뭔가’가 세규 잡는다!
‘거기에’ 갈 때마다 가야 할 이유를 어쩔 수 없이 말이나 글로 ‘지원 동기’라는 형식 안에 풀어 설명해야 했지만, 그 ‘지원 동기’에 나의 진짜 동기는 들어 있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그 진짜 동기를 말하거나 쓸 수 없었으니까. 다만 그 정도의 말과 글로 나를 안심시켰고 스스로에게 명분을 주었다.
이유를 알고, 거창하게 사명을 알고 뭔가를 시작한 적 없고, 본질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 사명은 어쩌면 일이 아닐지도 몰라 ‘사명선언문’이나 ‘비전-스테이트먼트’라는 보암직한 글 안에 자기의 사명을 선명하게 드러낸 사람들은 항상 부럽다. 사명과 비전을 ‘일’로 구체화시켜 낸다. 나에게는 이런 선언문이나 스테이트먼트는 없다. 나는 왜 이런 걸 못 쓰나 생각해 봤는데, 나는 사명을 어떤 ‘일’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이 본질이 아니라, 나에게 사명의 본질은 ‘자리’ 같다.
나는 사명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장소/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생각. 하나님은 나를 어떤 곳으로, 어떤 자리로 인도하실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 ‘그곳’으로 가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이 강한 확신이다. 이유는 알 수 없어도 ‘목사-됨’이 ‘그곳’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정체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곳’이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몰라도, 남편-아빠인 김세규, 사진가인 김세규, 목사인 김세규가 모두 필요한 ‘그곳’일거라 믿는다.
○ 하나님에게 보여 드린 중심 이런 마음을 쓰려 한 건 아닌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내 중심을 보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런 나의 중심을 어떻게 보실까? 이상하게 글로 다 표현 못 한 내 중심까지 싹 다 봐 주시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시며 웃어 주실 것 같다. 어떻게 아냐고? 지금 내 마음이 평안하니까!
○ 내 마음의 주단(綢緞)을 깔고 ‘왜 목사가 되려 하지?’라는 질문에 너무 깔릴 필요 없다. 근본적으로 내가 되고 싶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또 모르겠는 걸 억지로 만들어 대답할 필요도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보암직한 대답이, 나의 대답이 될 수 없고, 나의 사명이 될 수 없으니까.
때에 맞춰, 때에 맞게 주신 ‘마음’을 잘 먹고, ‘중심’을 잘 잡고, 그것을 ‘하면’ 된다. 적어도 그 지점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면 된다. 방향만 정확하면 된다. 다행히 하나님은 나에게 ‘성경-말씀-나침반’을 주셨고, 그 나침반은 항상 정북, ‘십자가’를 향하고 있으니까. 그 나침반을 손에 쥐고 기도할 때, 내 중심은 십자가 보혈을 향할 테니까. ‘그곳’을 향해 내 중심을 보혈의 주단으로 깔아 주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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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규야, 중심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왜 목사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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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목사 되는 은혜를 소망하고요, 되어 봐야 알 것 같아요. 그런데요, 약속할게요. 제가 알게 되면요, 제가 가야 할 ‘그곳’ 있어야 할 ‘그곳’에 가게 되면요, 꼭 말씀드릴게요. 일단은요, <아가토스센터>에서 <홀리PT>랑, <봉독>이랑, <우리들의 가스펠>이랑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계속해 나가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