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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30수_디2:11-3:7_선한 일이 진짜 뭐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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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선한 일을 가르치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제 3 장
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2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 디도, 오늘은 이걸 가르쳐 줄게
오늘도 바울은 디도에게 말할 것과 권면할 것과 모든 권위로 책망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 바울이 디도에게 가르치는 것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은혜-구원-선한 일’ 사이의 끊어질 수 없는 ‘연합된 관계’이다. 이게 바울의 복음이었다. 율법이 지배하던 세상에 이 복음이 등장하자, 율법은 긴장했고, 이 관계를 노려보았고 뜯어보았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로 통째로 연합되어, 유기적으로 서로를 낳고, 낳고, 낳고, 하는 이 관계를 율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고, 차마 눈 뜨고 볼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의 특기인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먼저냐?’와 같은 논리로, 셋을 하나로 보지 않고, 둘씩 묶어 따로 떼어내 이 온전한 복음을 어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은혜-구원-선한 일’ 사이에 긴장이 전혀 없었다.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분리될 수 없는 하나였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은혜의 순환이었다. 종교적으로 이용하려는 율법이 발 붙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울은 복음을 순풍순풍 설명한다. 그 바울 복음의 요점이 3:4~7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복음의 출발은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4절)’이다. 긍휼히 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복음의 출발점이고, 주어이다. 항상 바울이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른다(5절). 화살표의 방향은 항상 ‘구원→선한 일’이지 ‘선한 일→구원’은 아니라는 말이다. 구원이 선한 일을 ‘낳지’ 선한 일이 구원을 낳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선한 일은 십자가가 낳는다. 십자가로 거듭나 보혈로 씻겨지고,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을 입을 때, 선한 일은, 그 온 과정의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또 피할 수 없이 태어난다. 그래서 선한 일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복음의 근원과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시작한다.
○ 선한 일이 진짜 뭐냐면
바울은 선한 일을 그저 착한 일로 방치하지 않는다. 3:1~2절에 그가 바라고 소망하는 선한 일을 설명한다. 놀랍게도 선한 일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두 단어가 등장한다. ‘복종’과 ‘순종’이다. 돕는 일이 아니고, 주는 일이 아니다. 선한 일은 ‘질서’에서 발사된다. 하나님이 땅에 세우신 질서(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 복종하며 순종하는 것을 모든 선한 일 행할 준비가 된 것으로 본다.
저 무능력한, 부패한, 부정한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 선한 일의 출발이라고? 어찌 이럴 수 있을까? 그것은 세상 권력이 아닌, 그 세상 권력을 이 땅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별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한 곳’이다. 결국 그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이 이곳이 하나님 나라 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내 생각과 내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심으신 땅의 질서과 관계에 복종-순종하여, 내 뜻-생각-판단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살려는 것이 선한 일이다. 거룩이다.
○ 따질 일이 아니라 본대로 행할 일이야
이건 아닌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하고, 이상하게 억울한 마음이 든다. 복종과 순종이 선한 일의 동력이라니! 그렇게 씩씩거리는 내 가슴에 하나님의 선한 자가 다가온다. 예수님이다. 선한 일의 기준을 따지려는 나에게, 손해 보지 않으려는 선한 일의 범위를 정하려는 나에게, 예수님이 다가온다. 선한 자이다. 선한 일이다. 예수님이다. 십자가이다. 하나님이시면도 당신의 피조 세계의 질서에 죽기까지 복종하고 순종하신 분이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이루신 분이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절)
○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오늘 내가 해야 할 선한 일을 생각해 본다. 그저 착한 일이 아니다. 그저 돕고 주는 일이 아니다. 착하고 싶어 억지로 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선한 마음에서 태어난 일이 선한 일일 테니, 내 안에 심어야 할 선한 마음을 다시 먼저 생각해 본다. 결론은 쉽게 나온다. 예수님의 마음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은 ‘내 원대로의 사랑’으로 직행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신 주어진 환경, 상황, 역할에 먼저 복종하고 순종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을 생각하니 편안하게 숨이 쉬어진다.
묵상하는데 딸 지오에게 문자가 왔다. 지오 학교는 스튜디오에서 가깝다. 그 시각 촬영이 없으면 집까지 좀 태워다 줄 수 있냐는 문자였다. 사랑하지만 번거로운 일이고, 사랑하지만 내가 쉬고 싶은 시간이다. 오늘도 ‘OK’하기는 했어도, 아마 한참 머리 굴리다가(?) 건조하게 ‘OK’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씀의 힘 덕분에, 바로 답장을 보냈다. 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오를 사랑으로 섬기고 싶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해, 하고 싶어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여, 그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을, ‘상속자’라 하신다.
오늘 아침,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 이렇게 상속자로 하루를 시작한다.
‘은혜-구원-선한 일’, 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통치 안에서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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