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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3수_렘24:1-10

[Holy-PT] [20241023수_렘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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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고관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성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를 내게 보이셨는데
2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나빠서 먹을 수 없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더라
3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나쁜 것은 아주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니이다 하니
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6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8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1)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 극히 좋거나 혹은 극히 나쁘거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이신다. 한 광주리에는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다른 한 광주리에는 극히 나쁜 무화과가 있다.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나쁜 무화과는 극히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나쁘다. 하나님의 광주리에는 ‘중간’ 무화과는 없다. 중간은 하나님의 균형이 아니다. 그건 ‘머뭇머뭇’의 상태이다.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통쳤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열하18:21)
○ 극히 좋은 무화과가 나는 곳
상황은 이렇다. 이 일은 주전 597년 여고냐가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시드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극히 좋은 무화과는 놀랍게도(!) 하나님이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5절)를 상징한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을 상징한다. 반면 극히 나쁜 무화과는 더 놀랍게도(!) 유다에 남아 있거나 애굽으로 달아난 사람들을 말한다. 남는 게 살길이고, 애굽이 살길이라 여겼던 사람들이다. 하나님 무화과의 품질은 세상 환경과 조건과 상관없다. 죽음의 땅이라 여겼던 곳에서 극히 좋은 게 나오고, 살 수 있다 여겼던 곳에서는 극히 나쁜 게 나와 결국 멸절된다.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다(5절)
하나님이 잘 돌봐 주실 때, 하나님이 잘 돌봐 주시는 곳이 극히 좋은 무화과가 나는 곳이다. 그게 설령 포로 된 땅이라 하더라도.
○ 하나님이 우신다
유다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이유가 있다. 포로로 끌려감 역시 하나님이 하신 사랑의 심판이다. 죄는 심판을 통과해야 회복으로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데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당신이 허락하신 일이다. 당신이 행하신 심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을 이루며 한없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있다. 그 당신의 자녀들을 보며, 하늘에서 하나님이 우신다. 가슴 아파 우신다. 너무 아파 우신다. 그들 귀에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 유다 포로들에게 말씀하신다.
잊지 마. 내가 돌아볼게. 좋게 할게.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울게. 헐지 않을거야. 심을거야. 뽑지 않을거야.
○ 이젠 내가 다 할게
그리고 결정적인 약속을 하나 하신다. 이 약속은 암송해서 꼭 간직해야 할 약속이다. 모든 걸 다 내가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 모든 일이 왜 일어났나. 근본 원인은 이랬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7절)’이 그들에게 없었다. 사람의 힘으로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사람의 힘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사람의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그 마음이 없어 이 반역이 계속 반복되었다.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마음이었고, 근원적인 해결이었다. 이는 우리가 은혜로만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7절)
결국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이 ‘극히 좋은 무화과’의 씨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받은 자가 그래서 ‘극히 좋은 무화과’이다. 그래서 포로 됨은 포로된 자의 마음이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환경이요, ‘극히 좋은 무화과’의 밭이 된다. 포로된 자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반환점, 유-턴 포인트를 만날 때까지 사로 잡혀 있게 된다.
○ 백석 포로 생활기
신대원.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소망했던 가나안 땅이었지만, 나에게는 그발 강이 있는 바벨론이었다. 나는 주님께 끌려갔다. 포로 된 자의 모습으로. 그곳으로 출발할 때, 교회 담임 목사님은 ‘거기서 목사로 꼭 성공(?) 해’, 라는 기원되신, ‘네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라’라는 묘하게(?) 속 터지는 말씀을 주셨다. 나는 그렇게 백석 방배골의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포로였지, 감사하게도(!) 노예는 아니었다. 나는 점차 적응하며 생활을 시작했고, 공부도 시작했다. 친구들을 사귀었고, 교수님들과 교제했다. 포로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어딘가로부터 탈출한 것만 같은 시원함과 자유함을 느끼며, 나는 어리둥절했다. 이상하다, 나는 포로로 왔는데?! 포로 생활을 통해 나는, 나의 땅에서 만날 수 없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머리’로 아는 자였다. 입학 당시, 나의 사업장은 코로나의 여파로 거의 응급실에 가야 할 상태였다. 살려면, 돈을 더 벌어야 했고, 돈을 더 벌려면 당연히 거기에 나를 더 갈아 넣어야 했다. 응급실을 먼저 나가 세상-애굽으로 나간 친구들이 나도 어서 이리 오라고 했다. 이리 오면 살 수 있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살길’의 ‘ㅅ’로 보이지 않던 곳으로 포로로 끌려왔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지난 시간을 돌아 보니, 새삼 이 사실이 확실하게 깨달아진다.
아, 내가 포로되어,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받아 살았구나!
아, 그게 예배 회복의 시작이구나!
○ 슬기로운 포로 생활
하나님의 때는 알 수 없지만, 졸업을 해도 당분간 나의 포로 생활은 계속될 듯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이제 두렵지 않다. 왜냐하면,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나에게 더 깊이 심어 주시기 위함 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를 ‘극히 좋은 무화과’를 키워 주시고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침 묵상을 통해 주 안에서 ‘슬기로운 포로 생활’을 소망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 복음으로 빈틈 없이 꽉 찬 극히 좋은 무호과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요.
주님, 그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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