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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작가적 사고

병연

요즘 정병연은(24.05.31)

1.
속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제 신상에 이런 저런 변화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일어나는 중’이라는 진술에서 짐작하셨겠지만 레터를 보내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아직 클리어 된 게 없네요. 그러니 자세하게 밝히기는 어렵겠습니다. 아이고, 머리야! 언젠가는 이 또한 글감 삼을 날이 오겠죠?
2.
아무리 부정적인 상황에 처해도 마지막엔 ‘글감 하나 건졌네’라는 생각을 슬쩍 끼워 넣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작가’의 자질을 갖췄다고 우겨볼 만합니다. 예전에 참여했던 글쓰기 모임 리더는 이를 ‘작가적 사고’라고 부르더군요. 출근길 아침 갑자기 ‘오늘 하루만큼은 작가적 사고를 해보자’며 그 날 겪은 일을 글로 써보라는 돌발 미션을 내주던 게 떠오릅니다.
3.
작가적 사고란 무엇일까요? ‘글감 하나 건졌네’ 마인드셋이라는 자질을 꽃피우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마가 필요합니다.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하고, 일관되고, 설득력 있게 담아내면서 좀 더 신선한 사례, 살짝 다른 관점, 개성 있는 통찰을 섞어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이죠. 결국 작가란 어떤 메시지를 글로써 표현하는 사람이니까요.
4.
많은 사람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탐냅니다. 그 심리를 절묘하게 파고든 서비스가 브런치죠. ‘지원’을 해서 ‘합격’한 사람에게 ‘글을 발행할 권한’을 부여하고 ‘작가님’이라 불러주니까요. 게다가 기성 작가가 아님에도 실제 출판을 해내는 것을 보여줬죠. ‘글쓰는 OOO’이라는 정체성이 유행처럼 번지는 데 브런치가 기여한 바는 적게 잡아도 절반 이상일 겁니다.
5.
작가적 사고를 하는 사람과 작가는 다릅니다. 둘 사이에 위계가 존재한단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작가적 사고를 충분히 연마하지 않은 사람이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면 그냥 좀 마음이 그렇습니다. 글이라고 다 같은 글이 아닌데...고작 그런 글을 쓰면서…작가…? 글을 신성시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예요. 글을 신성시 하며 그 후광을 누리려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6.
언론사 입사 준비 일환으로 다녔던 학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첫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자로 과제를 받았습니다. 다음날 오후 1시까지 1,500자 분량의 논술 한 편 쓰기. 논제는 “역사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하는가?”였습니다. 참고로 수업은 평일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진행됐습니다. 저는 그대로 24시간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갔죠.
7.
어떻게 저떻게 작성해서 제출한 당일 저녁에 문자가 한 통 더 왔습니다. 메일로 첨부해 보낸 다른 수강생들의 글을 모두 읽고 각각에 상/중/하 등급을 붙인 뒤 그 이유를 간단히 적어 다음날 자정까지 제출하라는 과제였죠. 함께 수업을 듣는 인원은 30여명. 총 3개 클래스가 동시에 진행되므로 읽어야 할 글은 약 90편. ‘미친 과제 아냐?’ 싶었습니다. 눈앞이 깜깜했습니다.
8.
그런데 한 10편 쯤 읽고 나니 속도가 붙었습니다. 확실한 기준 하나가 생긴 덕분입니다. 바로 ‘드라마 <기황후> 언급 여부’입니다. 과장 없이 90편 중 50편 정도가 <기황후>를 언급했습니다(2013년 방영된 드라마로 역사 왜곡으로 크게 논란이 됐습니다). 나중에는 '기황후'의 '기'만 보여도 다음 문단을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자동으로 '하'로 분류했죠.
9.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아, 이 미친 과제는 나를 골탕 먹이려고 낸 게 아니구나. 그냥 글 한 편을 써보는 게 아니라 수백 명의 글을 읽고 그 중에 합격자를 가려야 하는 ‘필기시험 채점자’ 입장을 직접 겪어보라는 의도가 담긴 과제로구나. 선생님, 욕해서 죄송합니다. 글쓰기 책에 단골로 나오는 비법,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은 무조건 버려라'의 속뜻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10.
물론 언론사 공채 필기시험에 합격하는 글이라고 다 좋은 글은 아닙니다. 오히려 실용적인 측면 등에서 한계가 명확합니다. 그렇지만 작가적 사고를 다진 사람이 아니라면 시험장에서 기껏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포장한 글밖에 못 쓸 겁니다. 언론사에 입사하진 못 했지만 당시 경험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 읽기와 쓰기에 영향을 줬습니다.
11.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 이전에 좋은 글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좋은’이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하지만 그만큼 포괄적이어서 좋습니다. 저라는 개인 단위에서도 마음에 드는 글은 제각각 다른 특징을 갖기 때문입니다. 정보의 밀도가 높거나, 특정 이슈를 관통하거나, 일반적인 관점을 뒤집어 버리거나, 그냥 문장 자체로 아름답거나.
12.
이만큼 쓰고 보니 작가적 사고는 작가의 자질인 동시에 독자의 자질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좋은 글을 잘 읽는 것과 좋은 글을 잘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고요? 글쎄요.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 둘을 별개로 보는 사람들이 절대 소수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오호 통재라. 주제 넘나요? 그래요. 저나 잘해야겠죠...

지난 레터 이후에

지난 2주 간 쓴 글은 한 편입니다(저번 레터 복붙 아님). ‘질러야 한다’라는 신호는 박찬용 에디터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을 읽고 쓴 글입니다. 서평이라기엔 제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으니 독서 에세이라고 하겠습니다. 최근에 무려 35만원(할인가)짜리 반바지를 한 벌 샀는데 말이죠…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참고로 박찬용 에디터는 제가 즐겨찾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가 푸는 썰이나 다루는 주제보다는 그의 문장 자체에 끌립니다. 읽는 맛이 있다고 해야 할까요?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정갈한 한식 요리를 먹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작가들이 몇 명 있는데요. 이건 따로 정리해서 한 편 써보겠습니다. 그의 다른 책 <잡지의 사생활>을 읽고 안물안궁? 이 책에는 그런 게 없다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문장 수집도 열심히 했습니다. 어제 롱블랙과 Ep9 구독을 취소했는데요. 그렇다고 읽기 총량이 줄진 않을 테니 출처가 더 다양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제가 전할 수 있는 메시지는 딱 하나인 것 같아요. ‘순탄하진 않겠지만 언제든 다시 기회가 있다.’ 본의 아니게 몇 번 보여드렸잖아요. ‘그렇게 20년을 할 수 있다.’”
- 타블로, 롱블랙, “최고의 복수는 행복”, 음악의 원동력을 말하다
지난 2주 사이에 완독한 책은 박찬용의 <좋은 물건 고르는 법>과 이슬아의 <끝내주는 인생>입니다. 책 읽는 속도가 빠른 편은 아닌데, 최근에 너무 딱딱한 책들만 읽었더니 가벼운 에세이를 집어들면 한 호흡에 달려버리네요. 자제를 좀 해야 하는데…그러지 못하고 이훤의 <아무튼, 당근마켓>을 꺼내들었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는 조금씩 읽어나가고 있습니다(멈추지 않았어요). 6월 말에 독서모임을 해야 하니 다음 레터를 보낼 쯤엔 완독하지 않았을까요?

답답장 드립니다

곽멍: 메일함을 뒤적이다가 첫 레터와 두 번째 레터를 발견하고, 읽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구독을 시작했던 걸까요? 아마도 풀칠이겠지요. 퇴사를 앞두고 괜히 답장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끄적입니다. 병연님의 '아카이브'를 만들고 있다는 글을 보고 지금까지 작업한 걸 잘 갈무리해 두어야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나 봅니다. '어떻게든 되겠지'는 저 또한 정말 좋아하는 말이라는 사족을 더하며 이만 줄입니다.
병연: 반갑습니다. 풀칠러시군요. 제가 그곳에서 하는 이야기와 이곳에서 하는 이야기가 다르긴 하지만 둘 모두를 받고 무려 읽어주셨다니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듭니다.
퇴사하는 동료들에게 메일을 쓰곤 하는데요.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담지만 고정적으로 전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곽멍 님께도 보내드려요. 권여선 작가가 쓴 단편집 <안녕, 주정뱅이>의 '작가의 말'에 들어 있는 문장입니다.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인생의 어떤 스테이지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우리는 결핍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무엇으로 채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한 인간이 성장 또는 발전하는 것 아닐까요? 곽멍 님의 '다음'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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