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찌개의 추억
할머니의 분식집은 시립도서관 후문을 나서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날 할머니는 오랜만에 집에 온 딸과 손자들을 맞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저녁 장사를 마감했다. 8시가 좀 안된 시간, 바닥 청소까지 마친 다음 설거지 거리를 정리하고 행주 따위를 널며 뒷정리를 끝내 갈 무렵이었다. 책가방을 멘 학생 하나가 2단 우산을 접으며 가게로 들어왔다. "저희 영업 끝났어요~" 수저통을 정리하던 엄마가 단호하게 말했다. 벙찐 표정의 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어린 눈에도 보이는 듯했다. 그 눈은 틀림없이 '어라? 이 시간에 닫은 적 없었는데...?'하며 상황을 파악하는 눈이었다. 여전히 의문이 해소되지는 않은 것 같았으나 이내 등을 돌려 나가려는 학생을 붙잡은 건 주방을 정리하고 나온 할머니였다. “아유, 아니에요. 주문해요. 뭐 줄까?” 엄마는 '엄마도 참 못 말린다'는 얼굴로 할머니를 바라봤지만, 할머니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학생을 바라보았다. 그 사이에 애매하게 선 채 벙찐 표정에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뀐 학생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순두부 찌개를 주문했다. 우리 할머니 분식집의 메뉴판 왼쪽 가장 위에 있는 메뉴였다. 식당의 주력 상품임을 뜻하는 지정학적 위치. 잠시 뒤 보글보글 끓는 소리와 함께 순두부 찌개와 몇 가지 반찬이 식탁 위에 올라갔다. 단어장인지 소설인지 모를 책을 조용히 읽던 학생은 그보다 더 조용하게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달그락달그락 후루룩 하는 소리가 바깥의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아주 어린 시절이지만 지금까지 선명한 장면. 내게 그 날은 가족들과 외식으로 먹은 메뉴가 아닌 그 학생이 먹던 순두부 찌개로 남아 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물을 때 순두부 찌개라고 대답하게 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굳이 그 날의 일까지 꺼낼 필요도 없다. 할머니의 주력 상품이었던 만큼 엄마는 순두부 찌개를 좋아했고, 엄마 역시 할머니처럼 순두부 찌개를 맛있게 끓였다. 당연히 나도 순두부 찌개를 잘 먹었다. 심지어 수능 때 보온병에 꽉 채워 담아간 점심 도시락 메뉴도 순두부 찌개였다. 독립해 나온 지금, 가끔 집에 갈 때면 엄마는 매 끼니 진수성찬을 차려낸다. 냉장고를 각종 요리 재료로 가득 채워 놓고도 뭐 먹고 싶은 거 없냐고 집을 떠나기 전 날 밤까지 묻는다. 준비한 재료를 기어이 소진하고 나서도 양 손에 들려 보낼 김치나 장조림 같은 반찬까지 착착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내가 집을 떠나는 날 아침 메뉴는 늘 고정돼 있다. 순두부 찌개다. 순두부와 계란을 같은 비율로 풀고 팽이버섯을 잔뜩 넣은, 얼큰함과 담백함의 대타협을 통해 맵지 않게 끓여낸 순두부 찌개. 자박자박한 국물을 조금씩 떠 먹다가 밥 위에 한 숟갈 크게 얹어 슥슥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인 순두부 찌개. 보들보들하면서도 함께 섞인 밥알 사이사이 공간을 채워서 씹는 듯 씹지 않는 듯 묘한 식감을 선사하는 순두부 찌개.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음식 하는 걸 좀 더 많이 배웠어야 했는데, 순두부 찌개도 그렇고.” 순두부 찌개를 먹는 나를 보며 엄마는 매번 같은 말을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엄마의 순두부 찌개도 분에 넘치게 맛있다. 하지만 정작 엄마 성에는 아직도 안 차나보다. 어릴 때부터 먹던 그 맛이 안 나서 그런 거겠지. 다만 어릴 때부터 먹어온 것이 엄마의 순두부 찌개인 나로서는 그 맛의 반의 반이라도 재현하는 밀키트가 세상에 나오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순두부 찌개를 먹을 때면 그 날이 떠오른다. 공부하느라 고생한 학생을 그냥 보낼 수 없었던 할머니의 마음과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면서도 답답해 하던 엄마의 마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꼭 지금의 엄마와 나를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순두부 찌개를 좋아하는 건 단순히 집안 내력이 아니다. 입맛의 대물림은 결국 나와 엄마, 할머니의 마음이 이어져 있다는 징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