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 안의 세계
부모님의 일터인 꽃집이 가족의 생활공간을 감싸 안은 구조의 비닐하우스가 우리집이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실내온도와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겐 살짝 답답한 공기, 뒤섞인 꽃향기와 초록으로 빽빽한 풍경 사이에서 자랐다. 비닐하우스 내부에서는 빗소리가 실제보다 증폭되어 들린다. 빗방울이 천장을 두드리면 그 진동이 비닐을 타고 집 전체로 흐른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거대한 타악기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 집에서는 눈 쌓이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렸다. 도시가 잠든 밤에 함박눈이 쏟아지면 창을 열고 가만히 귀기울여 보시길. 과일 껍질을 벗길 때의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최소 볼륨으로 낮추면 비슷할까? 홀로 깨어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리란 곧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싸락싸락. 비닐하우스에서는 바로 그 소리를 꽤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어린 나는 소파에 홀로 누워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듯 시간을 보냈다. 문보영 시인은 종종 자기 방의 평면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각 공간에 번호를 매긴 다음 “⓵에서 ⓶로 이동하며 ~라고 생각했다"라고 적는 식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침대에서 책상으로 가는 것이 꼭 달 표면에 내딛은 인류의 첫발만큼 위대한 도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는지. 시인의 독특한 시선은 한정된 크기의 방을 애정으로 꼼꼼하게 살펴온 결과 같다. 그래서 어느 날 내 방도 그려봤다. 마침 주말 오후를 몽땅 쏟아 부어 바꾼 방 구조가 퍽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나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는 데 관심이 많은데, 아마 동생과 함께 방을 쓰며 자란 환경 탓인 듯하다. 대학생 때도 늘 룸메가 있었기 때문에 '혼자만의 공간'은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치다. 그마저도 대개 좁은 원룸이었다. 취향은커녕 반드시 있어야 할 것도 겨우 채워 넣는 곳. 보통은 주어진 조건에 나를 맞추곤 했다. 여전히 나는 삶의 여러 조건보다 작고 나약하다. 눈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던 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내 영역을 확보하는 데에 좀 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서재와 침실과 옷방을 따로 가지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나눠 놓은 방 한 칸에 충분히 만족한다. 그 사이를 오갈 때면 우주왕복은 아니지만 출퇴근 정도 느낌은 든다. 방 안에 여러 세계를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시인과 비슷하다고 우기면 억지스러운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