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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적 일상
하자 있는 소파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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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엔 TV가 없다. 앞으로도 들일 계획이 없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빔프로젝터로 이미 충분하다.
TV가 없으면 거실 인테리어 자유도가 극적으로 높아진다. 동선에 대한 제한이 대부분 사라지고 전기 콘센트도 여러 개를 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에이, 그래도…’하는 의무감에 TV를 놨다면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TV-탁자-소파’로 귀결되는 K-거실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TV 없는 거실이 가능하게 한 선택 중 하나가 바로 1인용 소파다. 우리집은 2인 가구이므로 1인용 소파 2개를 놓기로 했다. 물론 2~3인용 소파 1개와 1인용 소파 1개를 배치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집 거실은 그렇게 넓지 않다. 긴 소파를 놓는 순간 기껏 올려놓은 인테리어 자유도가 상당히 낮아진다.
TV 없는 거실에서는 굳이 같은 방향을 바라봐야 할 이유가 없으니 각 소파를 어울리는 자리에 적당하게 비틀어서 놓아도 된다. 때로는 같은 쪽을 바라보지 않아도, 서로 얼굴을 맞대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감을 주는 관계. 요즘 나는 그런 관계에 더 마음이 가는 것 같다.
그렇게 구매한 소파가 드비저리(de Bejarry)의 마드리드 라운지 체어 X 오토만 세트히어퍼니처의 HFS-72다. 먼저 사기로 결정한 건 드비저리 마드리드 라운지 체어 X 오토만 세트다. 29CM에서 처음 봤고 서울시 성수동 소재 편집샵 TTRS에서 실물을 확인했다. 예뻤다. 그리고 편했다. 안 살 이유가 없었다. 다만 거의 눕다시피 할 수 있는 선베드가 떠오르는 외형을 가진데다 오토만과 사이드 테이블까지 샀기 때문에 전체 부피가 꽤 된다. 자칫 잘못하면 긴 소파를 놓는 것만큼 자유도가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빅&스몰 조합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불균일성에서 비롯되는 리듬감이 거실에 깃들길 바라면서.
스몰에 해당하는 제품이 히어퍼니처의 HFS-72다. (여기서 잠깐. 종속변수에 해당하는 HFS-72의 사진을 쓴 이유가 궁금하신 분도 계실 테다. 간단하다. 드비저리 세트는 품절로 인해 2개월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방금 전 문장이 과거형이 아닌 것은 아직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매 당시 가격은 29CM VIP 쿠폰을 먹여 약 100만원 정도. 월요일에 결제했는데 다음 날 전화가 왔다. 전화기 너머의 직원은 익숙한 경상도 사투리로 해당 제품은 금요일에 출고돼 토요일 쯤 도착할 거라고 알려줬다. 가구 배송이야 원래 며칠 걸리는 법이니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연락까지 주시다니 참 친절한 업체라고 생각했다(알고 보니 상품 페이지에는 3일 이내 출고라고 적혀 있었다).
소파는 그 다음 주 화요일에 왔다. 다소 아쉬웠지만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무리 없이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벨소리를 듣고 문을 여니 그 앞에 거대한 박스가 놓여 있었고 낑낑대며 들고 들어왔다. 그런데 보통 가구는 집 안까지 넣어주시지 않나? ‘보통’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조심스럽지만 지금껏 가구를 구매하면 기사님이 집 안에 넣어주시고 박스 등 포장재는 회수해 가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반 택배 배송처럼 온 것이다. 거실에 날리는 먼지와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 때문인지 조금 짜증이 났지만 그런 걸로 컴플레인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내가 소비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업체 직원에게 짜증을 전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품에 약간 하자가 있었다. 소파를 지탱하는 부품이 파손된 것이다. 그로 인해 평형이 맞지 않아 앉은 채로 몸을 기울이면 소파도 함께 기울며 흔들렸다. 명백한 컴플레인 사유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거대한 박스를 해체하고 스티로폼을 비롯한 다량의 포장재를 분리수거 하고 온 참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힘이 빠진 상태였다. 누군가에게 불만을 전하는 것도 상당한 힘이 드는 일이다. 내겐 그 힘이 부족했다. 교환 또는 반품 절차를 떠올리는 것조차 번거로웠다. 게다가 이 부분만 제외하면 디자인 등 기대 이상으로 마음에 든 상태였다. 혹시 러그 위에 두면 괜찮지 않을까? 괜찮았다. 살짝 거슬리긴 했으나 애써 눈을 흐리게 뜨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실 우리 일상의 대부분이 그처럼 약간의 하자를 안고 있지 않은가? 그런 것들은 고이 품고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추억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애인에게 혼났다. 바보도 아니고 이걸 왜 그냥 쓰냐고.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애인은 나와 비슷한 부분이 많은 사람이다. 어쩜 이렇게 나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할까. 하지만 애인은 나와 다른 부분도 많은 사람이다. 막 퇴근한 참이라 지친 상태일 텐데도 아닌 건 아니라고 바로 말하는 것이다. “당장 고객센터에 문의 남겨” 나는 그렇게 했다. 밤 10시가 넘었기에 지금 올려봤자 29CM와 히어퍼니처 직원 누구도 당장 확인하진 않겠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애인이 시키는 대로 당장 문의를 남겼다. 사진도 2장 첨부해서.
다음 날 오후에 전화가 왔다. 앞서 출고 일정을 알려준 직원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자신을 대표라고 소개했다. 어이쿠. 대표님이 직접 전화를 주시다니. 그럴 것까진 없는데.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고 보니 그럴 법도 했다. 해당 제품은 해외에서 수입해 오는데 내가 받은 제품이 마지막 재고였으며 일부 부품만 교체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교환을 받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듯하니 반품으로 처리를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교환을 택하기는 어려웠다. 그걸 되돌려 보내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었고 이미 드비저리 세트를 좀 기다려서 받기로 했기 때문에 추가로 뭘 더 기다리는 건 아무래도 꺼려졌다. 그럼 반품…? 하이고. 또 한참을 소파 찾느라 고생하겠구만.
그때 대표님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만약 고객님만 괜찮으시다면 하자가 있는 만큼 OO만원을 빼드리겠습니다.” 제안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정도 금액이면 서로 곤란해지거나 귀찮아지는 일을 보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대표님의 태도가 매우 친절하고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에 조금 더 호의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도 있다. 평범하게 사무적으로 응대하셨다면 아마도 반품을 택했을 것 같다). 통화를 마친 뒤 계좌번호를 보내드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속한 금액이 입금됐고 문자가 왔다. “불편드려 죄송합니다. 보내주신 계좌로 송금 드렸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제품 소개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실은 구매할 때까지만 해도 히어퍼니처가 해당 소파를 비롯한 가구를 직접 제작하는 브랜드인 줄 알았다. 그런데 해외에서 가구를 수입해 오는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이 가구는 어느 나라의 어떤 브랜드가 만든 것일지 궁금해 찾아봤다. 상품 정보를 보니 제조국은 중국이다. 음. 제조와 유통의 글로벌 체인이 일반적인 시대이니 그럴 수 있지. 제조자는 (주)히어라고 돼 있다. 히어? 히어퍼니처의 그 히어인가? 기업 정보를 찾아보니 대표자 이름이 같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자기들이 만들고 자기들이 수입하는 건가? 같은 회사지만 제조와 유통이 어떤 식으로든 분리돼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소비자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겠지. 사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도 맞고.
HFS-72를 한 달 정도 썼다. 만족도는 ‘상’이다. 러그 위에 두면 흔들거림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하자가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해진다. 다만 소파 끝에 걸터앉은 채 일어나면 제품 뒷쪽이 들리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면 층간소음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히 써야 하는데 그게 좀 아쉽다. 하자는 아니고 제품디자인이 그렇게 돼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다음 버전이 나온다면 이 부분을 개선해야 할 것 같다. 뭐, 이정도 작은 불편함은 어떤 제품을 쓰든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제품만 그런가? 사람도 그렇다. 아니, 오히려 불편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한쪽으로 쏠려 있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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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신은 재능을 앗아가지 않는다
스스로의 재능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이때 판단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내려야 한다. 이것이 내 재능인가? 맞다면 그 크기는 나의 다른 능력 혹은 남의 같은 능력과 비교해서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이 재능은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가? 가령 돈이 되는가? 그것은 내게 얼마나 가치를 갖는가? 한 시절을 걸어볼 정도인가?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지. 그랬다면 세상에는 자기 재능을 활용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좀 더 많았을 것이다. 보통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낀다. 망할까봐? 아니. 이도 저도 아닐까봐. 예를 들어 재능에 관해 우리는 혹시라도 애매한 재능의 저주에 빠져 평생을 낭비하면 어쩌나 걱정한다.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한 시절을 걸지 않았다고 신이 재능을 앗아가진 않는다. 보통 개인기 정도로 남으니까. 그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은 없다. 추측은 가능할지 모른다. 어떻게? 개인기로 남은 재능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으로 미뤄보면 어떨까. 미련이 남아 현재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면…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재능은 가지각색이고 그걸 알아차리는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엔 취업 준비를 하며 알았다. 남의 자소서를 잘 고쳐준다는 사실을. 단순히 잘한 게 아니다. 재능이란 별도의 예열 없이 곧바로 집중할 수 있는 것, 엄청난 노력 없이도 남보다 그럭저럭 나은 성과를 내는 것이다. 효율이 좋은 것이다. 남의 자소서 고쳐주기. 내겐 그게 그랬다. 함께 취업 준비를 하던 멤버들끼리 자소서를 봐준 게 계기였다. 당시 나는 기자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논술 및 작문 시험이 중요한 관문으로 여겨지는 직무라 그런지 자소서 자체가 일종의 글쓰기 시험 같았다. 그래서 공채 시즌이 되면 자소서 스터디를 별도로 꾸렸다. 똑같은 글쓰기 스터디지만 나는 그때가 분명 더 즐거웠다. 왜 즐거웠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특정한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로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자소서는 목적이 명확한 글이다. 지원하는 회사가 밝히고 있는 인재상을 기준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능력이나 경험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매우 단순하다. 장황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각 문항에서 요구하는 내용에 맞게 정렬시키는 일이 재밌었다. 게다가 자소서에 쓰는 이야기는 평소에 많은 대화를 하는 사이라도 몰랐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내가 손대기 전과 달리 문답의 합이 부드럽게 맞아들어가 보이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음…일종의 성취감. 다른 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물론 결과도 따라줬다. 지인들에게 아이디어를 주거나 첨삭을 해줬는데 효과가 좋았다. 합격률이 올라간 것은 물론 다른 회사 지원서를 쓸 때 활용할 원소스처럼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게 후기(?)의 공통적인 내용이었다. 기업과 직무를 가리지 않았다. 가릴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저 조금 내밀할 수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기자보다 도서편집자가 적성에 더 맞았던 게 아닐까. 물론 기자 또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직업이지만 결국 자신이 나서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 자소서에 ‘서포터 역할을 좋아하고 잘 맞는다’고 자주 썼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썼던 거 아닌가 싶다. 거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웃긴 건 정작 나는 기자도 못 됐다. 겨우 일은 시작했지만 여러번 이직했다. 세 번째 퇴사를 할 쯤 얼기설기 엮인 내 커리어를 보면서 이거 참 걸레짝이 따로 없구나, 나는 망했구나 싶었다. 진지하게 숨고나 크몽에서 자소서 첨삭 일을 시작해 차차 사업화해 나가볼까 생각했다. 이 글의 첫 문단에 나열했던 질문들을 치열하게 던졌다. 그때 시작했다면 이 글은 내 서비스를 홍보하면 마무리지었겠지. 나는 내 재능이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질문들에는 “그럭저럭…”이라며 넘어갈 수 있었는데 ‘한 시절을 걸어볼 정도인가?’라는 질문에는 그게 안 됐다. 그렇다면 결국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 또한 확실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걸 개인기 정도로 남기기로 했다.
병연
획기적인 브루잉커피
무언가에 대한 인식폭이 외부 자극에 의해 별안간 확장될 때가 있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다. ‘획기적’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쓴다. 고수를 즐기기 시작한 건 제주시청 인근 레스토랑 도브 다이브에서 광어 셰비체를 맛봤을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내게 고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추가하지 않는 식재료였다. 광어 셰비체에는 기본적으로 고수가 들어가므로 혼자였으면 별 생각없이 먹었을 테지만 고수를 먹지 않는 해린이와 함께였기 때문에 빼달라고 요청했다. 사장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럼 고수를 따로 덜어드릴 테니 맛이라도 보시겠어요? 그게 이 메뉴의 킥이라서 절대 못드시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쯤 드셔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했다. 굳이 됐다고 할 이유도 없었고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에 진정성이 느껴져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로 내 세계는 달라졌다. 획기적이었다. 제주공항 근처에 위치한 카페 그린루스카에서 마신 브루잉커피(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도 그런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커피 문외한이라 보통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기본이 보장하는 만족도의 최저선에 안주하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 브루잉커피를 마실 때면 커핑 노트를 유심히 읽는다. 음. 이 맛이 이런 맛이라고? 봐도 모른다. 봐도 모르겠으니 굳이 몇 천 원 더 주고 마실 이유가 없다. 그러니 또메리카노, 또메리카노. 그런데 그린루스카에서 왜 브루잉커피를 시켰더라? 아메리카노가 메뉴에 없었던 것 같다(정확하진 않음). 커피는 잘 모르고 굳이 고르자면 산미가 있는 걸 고르는 편이라고 하니 원두를 세 개 추천해 주셨다. 맛 설명 부분을 천천히 살펴봤다. 눈에 들어온 게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라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그 조합은 물론 수박이 세 번 연속 나오는 게 웃겼다(정해진 작성법에 따른 것이겠지만…). 자리에서 카페 인스타그램을 훑다보니 사장님이 커피를 가져다 주셨다. 뭐라 설명해 주셨으나 기억은 안 난다. 고개는 열심히 끄덕였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 이렇게 정확한 설명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리스타가 의도한 커피 맛을 그대로 느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날의 원두 상태와 브루잉 방식과 나의 피로도 또는 포만감 같은 것들이 잘 조합된 결과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우의 수를 뚫어냈다. 딴 게 중요한가. 그거면 된 거지. 감동적이었다. 나도 커피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획기적이었다. 앞으로 나는 브루잉커피에 좀 더 도전해보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러고 보면 몇 번 경험한 뒤 ‘이건 내 스타일 아니야’라고 결론 내리고 마음 속 창고 안에 처박아둔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중에 우연한 계기로 나를 사로잡을 것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한번 들춰볼 수 있도록 창고 문을 단단히 잠가두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브 다이브의 광어 셰비체와 그린루스카의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 준 교훈이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 보답으로 드릴 게 “정말 잘 먹었(마셨)습니다”라는 인사뿐이었다. 이 글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고. 덧) 그린루스카라는 상호는 그린과 루스카를 붙여 만들었다. 그린은 사장님이 좋아하는 초록색. 루스카는 빈티지 잔으로 유명한 아라비아핀란드의 초기모델 중 하나로 핀란드어로 가을(낙엽, 단풍, 갈색 등등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테리어 톤을 그린&브라운으로 잡으셨다고. 그런데 우리가 앉았던 러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바닥에는 보라돌이가 빼꼼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쪽에는 나나와 뚜비가 보였다. 감각적인 인테리어 사이에 튀어나온 예전 공간의 흔적에 웃음이 나왔다. 한정적인 예산은 오래된 건물이 품고 있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노력한 현재 사이를 이어준다. 그건 또 그거대로 썩 나쁘지 않은 듯하다.
병연
순식간에 지나가는 7-8월의 독서
매해 7-8월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마음의 준비를 빡세게 하기 때문이다. 더위에 취약한 내게 이 기간은 약간 과장해서 ‘버리는 시간’이다. 늘 그랬다. 이 시기의 나는 모든 면에서 무력하다. 원래 놓는 게 어려운 법. 버리기로 결정만 하면 사라지는 건 금방이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자산인 시간을 버리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뭘 좀 많이 했다. 평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갔길래 이번에도 헤롱거리며 보냈겠지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때보다 이벤트가 많았던 것이다. 제주도도 다녀왔고 가족 여행도 다녀왔고 평소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여럿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이사한 집 곳곳을 채우기 위해 쇼핑도 자주 하고 동네 맛집도 여럿 뚫었다. 책도 많이 읽었다. 무려 6권! 물론 SNS 돌아다니면 발에 차이는 게 1년에 100권은 너끈히 읽어내는 사람들인 시대에 이게 많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책 읽는 속도가 거북이 뺨칠 만큼 느린 탓에 100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다. 보통 한 달에 2~3권 정도 읽긴 한다. 그래도 이번엔 두꺼운 책도 있으니 많다고 해도 문제 없겠지. 그래서 무슨 책을 읽었냐면…사실 지금 주절주절 쓰기 시작한 이유도 이 책들 소개하고 싶어서다. 7-8월에 읽은 책이 모두 다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추천한다. 📚월터 아이작슨 <일론 머스크> 누구의 인생이든 편집을 거치면 나름대로 힘있는 이야기가 되지만, 일론 머스크는 대체 몇 명 분의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얼마 전 나영석 PD가 일론 머스크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최고 부자가 최고 셀럽’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어떻게 부자(셀럽)가 됐는지 알아보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충분히 유의미하다.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명확한 문제의식과 고유의 관점, 탄탄한 취재, 잘 훈련된 저널리스트의 문장이라는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영국 상류층이 성장하는 정치적 환경을 풍부한 사례로 풀어냈다. 그들에겐 브렉시트가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이었고, 그건 영국 사회나 시민들과 전혀 관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탄탄한 논증. 📚사이먼 쿠퍼 <바르사> FC바르셀로나(바르사)에 대한 이야기. 스포츠 팀은 연고지와 강한 관계성을 갖기 마련인데 바르사는 그 극단의 사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축구보다 넓은 범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펩 과르디올라가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부스케츠를 만난 덕분에 감독 커리어를 화려하게 시작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글쎄, 이 책이 주장하는 건 정확히 그 반대다. 📚김초엽 <아무튼, SF게임> 어디선가 게임을 ‘매체’로 보는 관점에 대해 접했었다. 그때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나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조금 이해가 됐다. 매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 혹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게임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전공 과목으로 게임 커뮤니케이션이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대학교에서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배웠다. 나는 그걸 이렇게 이해했다. 같은 학교(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동류라고 여겼던 사람이라도 하교(퇴근) 혹은 졸업(퇴사) 후에 ‘돌아가는 곳’에서는 제각기 다른 일상을 보낸다. 바로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아비투스. 이 책은 그 다음 단계 논의다. 요즘 갓생러들의 SNS를 맥락적으로 읽어내는 근육을 얻을 수 있다. 📚더그 복 클락 <마지막 고래잡이> 고래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라말레라 부족 이야기. 새 시대가 오면 구 시대는 그저 물러나야만 할까? 한 시대의 중심 집단은 그 시대의 모든 것을 지배해도 될까? 인류가 존속되는 한 지루하게 반복될 이야기일 테다. 책을 읽으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의 그물이 어디까지 뻗쳐 나갈지 기대된다. 최대한 뻗쳐 내겠다는 책임감도 느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