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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적 일상
획기적인 브루잉커피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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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에 대한 인식폭이 외부 자극에 의해 별안간 확장될 때가 있다. 사소한 순간이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했던 세계다. ‘획기적’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쓴다.
고수를 즐기기 시작한 건 제주시청 인근 레스토랑 도브 다이브에서 광어 셰비체를 맛봤을 때부터다. 당시만 해도 내게 고수는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굳이 추가하지 않는 식재료였다. 광어 셰비체에는 기본적으로 고수가 들어가므로 혼자였으면 별 생각없이 먹었을 테지만 고수를 먹지 않는 해린이와 함께였기 때문에 빼달라고 요청했다. 사장님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럼 고수를 따로 덜어드릴 테니 맛이라도 보시겠어요? 그게 이 메뉴의 킥이라서 절대 못드시는 게 아니라면 한 번 쯤 드셔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요.”라고 했다. 굳이 됐다고 할 이유도 없었고 사장님의 표정과 말투에 진정성이 느껴져 알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로 내 세계는 달라졌다. 획기적이었다.
제주공항 근처에 위치한 카페 그린루스카에서 마신 브루잉커피(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도 그런 경험이었다. 사실 나는 커피 문외한이라 보통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기본이 보장하는 만족도의 최저선에 안주하는 편이다. 어쩌다 한 번 브루잉커피를 마실 때면 커핑 노트를 유심히 읽는다. 음. 이 맛이 이런 맛이라고? 봐도 모른다. 봐도 모르겠으니 굳이 몇 천 원 더 주고 마실 이유가 없다. 그러니 또메리카노, 또메리카노. 그런데 그린루스카에서 왜 브루잉커피를 시켰더라? 아메리카노가 메뉴에 없었던 것 같다(정확하진 않음). 커피는 잘 모르고 굳이 고르자면 산미가 있는 걸 고르는 편이라고 하니 원두를 세 개 추천해 주셨다. 맛 설명 부분을 천천히 살펴봤다.
눈에 들어온 게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라는 설명이 흥미로웠다. 그 조합은 물론 수박이 세 번 연속 나오는 게 웃겼다(정해진 작성법에 따른 것이겠지만…). 자리에서 카페 인스타그램을 훑다보니 사장님이 커피를 가져다 주셨다. 뭐라 설명해 주셨으나 기억은 안 난다. 고개는 열심히 끄덕였다. 수박, 수박, 수박, 메로나. 이렇게 정확한 설명이라니. 감탄이 절로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리스타가 의도한 커피 맛을 그대로 느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 날의 원두 상태와 브루잉 방식과 나의 피로도 또는 포만감 같은 것들이 잘 조합된 결과일 테지만, 결과적으로 그 경우의 수를 뚫어냈다. 딴 게 중요한가. 그거면 된 거지.
감동적이었다. 나도 커피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획기적이었다. 앞으로 나는 브루잉커피에 좀 더 도전해보는 사람이 되겠구나. 그러고 보면 몇 번 경험한 뒤 ‘이건 내 스타일 아니야’라고 결론 내리고 마음 속 창고 안에 처박아둔 것들이 얼마나 많았나. 그 중에 우연한 계기로 나를 사로잡을 것들은 또 얼마나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다시 한번 들춰볼 수 있도록 창고 문을 단단히 잠가두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브 다이브의 광어 셰비체와 그린루스카의 콜롬비아 산 라파엘 워터멜론이 준 교훈이다. 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라 보답으로 드릴 게 “정말 잘 먹었(마셨)습니다”라는 인사뿐이었다. 이 글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이고.
덧) 그린루스카라는 상호는 그린과 루스카를 붙여 만들었다. 그린은 사장님이 좋아하는 초록색. 루스카는 빈티지 잔으로 유명한 아라비아핀란드의 초기모델 중 하나로 핀란드어로 가을(낙엽, 단풍, 갈색 등등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인테리어 톤을 그린&브라운으로 잡으셨다고. 그런데 우리가 앉았던 러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바닥에는 보라돌이가 빼꼼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쪽에는 나나와 뚜비가 보였다. 감각적인 인테리어 사이에 튀어나온 예전 공간의 흔적에 웃음이 나왔다. 한정적인 예산은 오래된 건물이 품고 있는 과거의 흔적과 그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지고자 노력한 현재 사이를 이어준다. 그건 또 그거대로 썩 나쁘지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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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내 방 안의 세계
부모님의 일터인 꽃집이 가족의 생활공간을 감싸 안은 구조의 비닐하우스가 우리집이었다. 계절과 상관없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실내온도와 더위를 많이 타는 내겐 살짝 답답한 공기, 뒤섞인 꽃향기와 초록으로 빽빽한 풍경 사이에서 자랐다. 비닐하우스 내부에서는 빗소리가 실제보다 증폭되어 들린다. 빗방울이 천장을 두드리면 그 진동이 비닐을 타고 집 전체로 흐른다. 그럴 때면 나는 마치 거대한 타악기 안에 들어앉은 기분이 되곤 했다. 그 집에서는 눈 쌓이는 소리마저 선명하게 들렸다. 도시가 잠든 밤에 함박눈이 쏟아지면 창을 열고 가만히 귀기울여 보시길. 과일 껍질을 벗길 때의 사각사각하는 소리를 최소 볼륨으로 낮추면 비슷할까? 홀로 깨어 있어도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소리란 곧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싸락싸락. 비닐하우스에서는 바로 그 소리를 꽤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어린 나는 소파에 홀로 누워 친구와 수다를 떠는 듯 시간을 보냈다. 문보영 시인은 종종 자기 방의 평면도를 그려놓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다. 각 공간에 번호를 매긴 다음 “⓵에서 ⓶로 이동하며 ~라고 생각했다"라고 적는 식이다. 그의 글을 읽다보면 침대에서 책상으로 가는 것이 꼭 달 표면에 내딛은 인류의 첫발만큼 위대한 도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작은 공간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는지. 시인의 독특한 시선은 한정된 크기의 방을 애정으로 꼼꼼하게 살펴온 결과 같다. 그래서 어느 날 내 방도 그려봤다. 마침 주말 오후를 몽땅 쏟아 부어 바꾼 방 구조가 퍽 마음에 들던 참이었다. 나는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는 데 관심이 많은데, 아마 동생과 함께 방을 쓰며 자란 환경 탓인 듯하다. 대학생 때도 늘 룸메가 있었기 때문에 '혼자만의 공간'은 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치다. 그마저도 대개 좁은 원룸이었다. 취향은커녕 반드시 있어야 할 것도 겨우 채워 넣는 곳. 보통은 주어진 조건에 나를 맞추곤 했다. 여전히 나는 삶의 여러 조건보다 작고 나약하다. 눈오는 소리에 귀기울이던 때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나는 내 영역을 확보하는 데에 좀 더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서재와 침실과 옷방을 따로 가지진 못했지만 어떻게든 나눠 놓은 방 한 칸에 충분히 만족한다. 그 사이를 오갈 때면 우주왕복은 아니지만 출퇴근 정도 느낌은 든다. 방 안에 여러 세계를 들여놓았다는 점에서 시인과 비슷하다고 우기면 억지스러운 일일까?
병연
신은 재능을 앗아가지 않는다
스스로의 재능을 알아차리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이때 판단은 아주 짧은 시간 내에 내려야 한다. 이것이 내 재능인가? 맞다면 그 크기는 나의 다른 능력 혹은 남의 같은 능력과 비교해서 얼마나 되는가? 그렇다면 이 재능은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가? 가령 돈이 되는가? 그것은 내게 얼마나 가치를 갖는가? 한 시절을 걸어볼 정도인가?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지. 그랬다면 세상에는 자기 재능을 활용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좀 더 많았을 것이다. 보통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을 부담스럽게 느낀다. 망할까봐? 아니. 이도 저도 아닐까봐. 예를 들어 재능에 관해 우리는 혹시라도 애매한 재능의 저주에 빠져 평생을 낭비하면 어쩌나 걱정한다. 그것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한 시절을 걸지 않았다고 신이 재능을 앗아가진 않는다. 보통 개인기 정도로 남으니까. 그 판단이 옳았는지 틀렸는지 알 방법은 없다. 추측은 가능할지 모른다. 어떻게? 개인기로 남은 재능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으로 미뤄보면 어떨까. 미련이 남아 현재의 발목을 자꾸 잡는다면…판단이 틀렸을 수도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재능은 가지각색이고 그걸 알아차리는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내 경우엔 취업 준비를 하며 알았다. 남의 자소서를 잘 고쳐준다는 사실을. 단순히 잘한 게 아니다. 재능이란 별도의 예열 없이 곧바로 집중할 수 있는 것, 엄청난 노력 없이도 남보다 그럭저럭 나은 성과를 내는 것이다. 효율이 좋은 것이다. 남의 자소서 고쳐주기. 내겐 그게 그랬다. 함께 취업 준비를 하던 멤버들끼리 자소서를 봐준 게 계기였다. 당시 나는 기자를 지망하고 있었는데, 논술 및 작문 시험이 중요한 관문으로 여겨지는 직무라 그런지 자소서 자체가 일종의 글쓰기 시험 같았다. 그래서 공채 시즌이 되면 자소서 스터디를 별도로 꾸렸다. 똑같은 글쓰기 스터디지만 나는 그때가 분명 더 즐거웠다. 왜 즐거웠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아는 사람’의 이야기를 특정한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로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자소서는 목적이 명확한 글이다. 지원하는 회사가 밝히고 있는 인재상을 기준으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 능력이나 경험으로 어필하는 것이다. 매우 단순하다. 장황하게 풀어놓은 이야기를 각 문항에서 요구하는 내용에 맞게 정렬시키는 일이 재밌었다. 게다가 자소서에 쓰는 이야기는 평소에 많은 대화를 하는 사이라도 몰랐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내가 손대기 전과 달리 문답의 합이 부드럽게 맞아들어가 보이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음…일종의 성취감. 다른 일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물론 결과도 따라줬다. 지인들에게 아이디어를 주거나 첨삭을 해줬는데 효과가 좋았다. 합격률이 올라간 것은 물론 다른 회사 지원서를 쓸 때 활용할 원소스처럼 활용할 수 있게 됐다는 게 후기(?)의 공통적인 내용이었다. 기업과 직무를 가리지 않았다. 가릴 이유도 없었다. 나는 그저 조금 내밀할 수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거웠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나는 기자보다 도서편집자가 적성에 더 맞았던 게 아닐까. 물론 기자 또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직업이지만 결국 자신이 나서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 자소서에 ‘서포터 역할을 좋아하고 잘 맞는다’고 자주 썼는데,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썼던 거 아닌가 싶다. 거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웃긴 건 정작 나는 기자도 못 됐다. 겨우 일은 시작했지만 여러번 이직했다. 세 번째 퇴사를 할 쯤 얼기설기 엮인 내 커리어를 보면서 이거 참 걸레짝이 따로 없구나, 나는 망했구나 싶었다. 진지하게 숨고나 크몽에서 자소서 첨삭 일을 시작해 차차 사업화해 나가볼까 생각했다. 이 글의 첫 문단에 나열했던 질문들을 치열하게 던졌다. 그때 시작했다면 이 글은 내 서비스를 홍보하면 마무리지었겠지. 나는 내 재능이 애매하다고 판단했다. 다른 질문들에는 “그럭저럭…”이라며 넘어갈 수 있었는데 ‘한 시절을 걸어볼 정도인가?’라는 질문에는 그게 안 됐다. 그렇다면 결국 앞의 질문들에 대한 답 또한 확실하지 않다는 얘기였다. 그래서 나는 그걸 개인기 정도로 남기기로 했다.
병연
순식간에 지나가는 7-8월의 독서
매해 7-8월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마음의 준비를 빡세게 하기 때문이다. 더위에 취약한 내게 이 기간은 약간 과장해서 ‘버리는 시간’이다. 늘 그랬다. 이 시기의 나는 모든 면에서 무력하다. 원래 놓는 게 어려운 법. 버리기로 결정만 하면 사라지는 건 금방이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자산인 시간을 버리는 게 올바른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뭘 좀 많이 했다. 평소처럼 순식간에 지나갔길래 이번에도 헤롱거리며 보냈겠지 싶었다. 그런데 오히려 다른 때보다 이벤트가 많았던 것이다. 제주도도 다녀왔고 가족 여행도 다녀왔고 평소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여럿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이사한 집 곳곳을 채우기 위해 쇼핑도 자주 하고 동네 맛집도 여럿 뚫었다. 책도 많이 읽었다. 무려 6권! 물론 SNS 돌아다니면 발에 차이는 게 1년에 100권은 너끈히 읽어내는 사람들인 시대에 이게 많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책 읽는 속도가 거북이 뺨칠 만큼 느린 탓에 100권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숫자다. 보통 한 달에 2~3권 정도 읽긴 한다. 그래도 이번엔 두꺼운 책도 있으니 많다고 해도 문제 없겠지. 그래서 무슨 책을 읽었냐면…사실 지금 주절주절 쓰기 시작한 이유도 이 책들 소개하고 싶어서다. 7-8월에 읽은 책이 모두 다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추천한다. 📚월터 아이작슨 <일론 머스크> 누구의 인생이든 편집을 거치면 나름대로 힘있는 이야기가 되지만, 일론 머스크는 대체 몇 명 분의 삶을 살고 있는 건가. 얼마 전 나영석 PD가 일론 머스크를 두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이 최고 부자가 최고 셀럽’이라는 얘기를 했다. 그런 면에서 그가 어떻게 부자(셀럽)가 됐는지 알아보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충분히 유의미하다. 📚사이먼 쿠퍼 <옥스퍼드 초엘리트> 명확한 문제의식과 고유의 관점, 탄탄한 취재, 잘 훈련된 저널리스트의 문장이라는 조건들이 동시에 충족되면 이런 결과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다. 영국 상류층이 성장하는 정치적 환경을 풍부한 사례로 풀어냈다. 그들에겐 브렉시트가 매우 자연스러운 결론이었고, 그건 영국 사회나 시민들과 전혀 관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탄탄한 논증. 📚사이먼 쿠퍼 <바르사> FC바르셀로나(바르사)에 대한 이야기. 스포츠 팀은 연고지와 강한 관계성을 갖기 마련인데 바르사는 그 극단의 사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축구보다 넓은 범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펩 과르디올라가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부스케츠를 만난 덕분에 감독 커리어를 화려하게 시작했다고 생각하시는지? 글쎄, 이 책이 주장하는 건 정확히 그 반대다. 📚김초엽 <아무튼, SF게임> 어디선가 게임을 ‘매체’로 보는 관점에 대해 접했었다. 그때는 좀 이해하기 어려웠다(나는 게임을 즐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조금 이해가 됐다. 매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창 혹은 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라면 게임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매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디어 전공 과목으로 게임 커뮤니케이션이 있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엘리자베스 커리드핼킷 <야망계급론> 대학교에서 아비투스라는 개념을 배웠다. 나는 그걸 이렇게 이해했다. 같은 학교(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동류라고 여겼던 사람이라도 하교(퇴근) 혹은 졸업(퇴사) 후에 ‘돌아가는 곳’에서는 제각기 다른 일상을 보낸다. 바로 그 차이를 만드는 게 아비투스. 이 책은 그 다음 단계 논의다. 요즘 갓생러들의 SNS를 맥락적으로 읽어내는 근육을 얻을 수 있다. 📚더그 복 클락 <마지막 고래잡이> 고래잡이로 생계를 이어가는 라말레라 부족 이야기. 새 시대가 오면 구 시대는 그저 물러나야만 할까? 한 시대의 중심 집단은 그 시대의 모든 것을 지배해도 될까? 인류가 존속되는 한 지루하게 반복될 이야기일 테다. 책을 읽으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생각의 그물이 어디까지 뻗쳐 나갈지 기대된다. 최대한 뻗쳐 내겠다는 책임감도 느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