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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적 일상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더 걱정하고 고민할래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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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어느 날,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운전하는 날 보고 이렇게 말했다. “별게 다 대단하대?”라며 웃어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역시 면허를 따기 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처음 도로주행에 나섰을 때 손과 발을 극도의 긴장감이 휘감았었다. 운전을 해보지 않은 나에게, 운전석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면허를 따자마자 ‘뭐, 별거 아니네.’라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 인생의 관문이란, 넘고 나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 앞에 섰을 땐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높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친구 A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취업 준비에 지친 A는 취준을 그만두고 카페에서 일하며 틈틈이 하고 싶었던 걸 하고, 배우고 싶었던 걸 배웠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이런 삶이 좋고 행복하지만, 한편으론 무섭다고 말했다. 사는 것도 재밌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너무 좋은데, 그래서 불안하다고. 이것저것 하느라 한 주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지만, 영양가 없이 바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바쁨이 아닌 오직 현재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바쁨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알아서 잘 하고 있을 거라고 자신을 믿고 있을 부모님이 실망하시게 될까 봐 무섭다고 했다. 자기는 지금 정말 괜찮은데, 이게 정말 괜찮은 걸까? 그야말로 답도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왔단다.
A의 고민을 듣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욜로(YOLO)!, 카르페디엠, 지금 네가 즐거운 거면 된 거야… 이런 말들을 위로로 건네면 될까. 평론가 황현산 역시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라고 했으니까. 오늘도 내 삶을 구성하는 하루인데, 내일을 빛내기 위해 불안한 오늘을 보내야 할 이유는 없지, 아무렴.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란 보장도 없고. 그러니 현재를 즐기라고 말해주면 되려나.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건넬 수 없었다. A에겐 눈앞에 놓인 관문이 간단히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벽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마치 운전대 앞에서 한껏 긴장했던, 면허를 따기 전의 나처럼. 그러니 A가 맞닥뜨린 벽의 존재를 무시하고 “이것은 사실 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무책임하게 “현재를 즐겨!”라고 말할 수 없었던 거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벽 앞에 서서 A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자신의 삶에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고민하고 걱정하는 건데, 이런 고민과 걱정을 단순히 욜로 같은 말로 쓸 데 없는 취급해버릴 순 없었다. 삶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인간이라면 불안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게 현재의 행복을 갉아먹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고민과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삶의 과정일 테다. 우리는 완벽하게 오늘만 살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 관문 한 관문 통과할 때마다 내가 걱정하고 고민했던 것만큼 이 관문이 높은 벽은 아니었구나, 깨닫는 것뿐. 남들은 욜로라지만, 한 번 밖에 살지 않으니까 나는 좀 더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짜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감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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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닭다리가 먼저냐, 가슴살이 먼저냐
치킨을 먹을 때면 두뇌가 풀가동된다. 어느 부위를 먹고, 어느 부위를 남길지 고민하느라 바쁘다. 1인 1닭이 안 되는 1인 가구라면 피할 수 없는 선택. 고려해야 할 변수는 두 가지다. 부위별 고유의 맛과 상태에 따른 맛. 예를 들면 나는 목과 다리를 좋아한다. 방금 튀겨 따뜻하고 부드러운 상태는 물론 완전히 식은 뒤 대충 데워 놓은 상태라도 꽤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퍽퍽살은 남길 경우 대부분 버린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치킨 한 마리를 두 끼에 걸쳐 온전히 즐기기 위해 좋아하는 부위를 남겨야 할까? 퍽퍽살을 버리고 한 끼만 먹더라도 최상의 부위를 최상의 상태로 먹어야 할까? ​ 순살을 시키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맞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순살을 잘 먹지 않는다. 일정한 수준의 맛을 식사 내내 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어쩐지 그건 안정적이라는 느낌보다 밋밋함으로 다가온다. 부위마다 제각각인 뼈 치킨이 굽이치고 휘감기는 강이라면 순살 치킨은 직강 공사로 쭉 뻗은 형태를 갖춘 강이라고 할까. 거기엔 어떤 기승전결이나 희로애락도 없다. 그저 먹는 경험을 매끈하게 통과해낼 뿐이다. 좀 더 의미부여 해볼까. 순탄하게 흐르는 삶보다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삶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순살 치킨이 아닌 뼈 치킨을 고르게 한다. ​ 그러고 보면 우린 항상 현재와 미래를 저울질한다. 크고 작은 선택들이 가져올 결과를 가늠하며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이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 모든 계획이 물거품 되는 상황만큼은 막아보자는 자조적 농담도 수시로 던졌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대부분 이뤄질 수 없기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내 생각엔 이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 존 레논이 그랬다지. 삶이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일어난다고.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살았던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통찰. 존 레논조차 자기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의 여러 계획이 무너지는 상황에 한줄기 위로가 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계획은 삶의 일부여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계획에 빨려 들어가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치킨 먹을 때 고민 좀 줄여야지. 맛있는 부위는 오늘 먹어야지. 맛없는 부위는 볶음밥으로 먹든 어떻게 맛있게 먹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조금만 덜 게을러지는 것으로 계획 저편의 삶을 채워가야겠다.
병연
삼총사는 없다
유딩 때는 어쩐지 친구들이 좀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마 빠른 년생을 향한 갖은 구박과 핍박에 시달리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여서 일곱 살에 불과한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형, 누나라고 부르라며 약을 올리니 열이 받아, 안 받아? 아, 진짜 유치하게 왜 저래. 물론 유딩이 유치한 걸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거의 확실할 것이다) 유치원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파랑반 선생님이 제일 친한 친구였다. ​ 그나마 어울렸던 친구가 둘 있다. 걔들과는 주로 ‘지구용사 벡터맨’ 놀이를 했다. 유치원 뒷마당에서 우리는 영웅처럼 활약했다. 난 ‘벡터맨 베어’를 맡았다. 사실 난 베어를 별로 안 좋아했다. 변신 전 베어의 꼬불머리가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세 번째로 소개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대장이나 다름없는 ‘벡터맨 타이거’나 2인자 특유의 멋짐이 폭발하는 ‘벡터맨 이글’을 좋아했지만, 그건 다른 둘의 역할이었다. 은근히 짜증났다. 어린이에게 삼총사 중 3번이란 화룡점정보단 쫄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십 년쯤 지나 중딩이 됐지만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뚱뚱해서 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딱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 ‘캬캬캬’ 하고 웃어 넘길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펀지밥 ‘뚱이’인 이유도 그 별명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 교실, 저 교실 쏘다니며 다른 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생활기록부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교우관계가 원만함.” 내 사춘기는 어쩌면 유딩 때 왔다 간 게 아닐까 싶다. ​ 그러던 어느 날 시험 공부를 하러 갔던 시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타이거와 이글을 만났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하며 각기 다른 초등학교로 진학했고 당연히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타이거와 이글은 같은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시험 공부를 (핑계로 밤 늦게까지 놀러) 다닐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걔들은 반가워하며 내 핸드폰 번호를 받아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가끔 상상한다. 나도 타이거와 이글이 다녔던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면 유년기의 우정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얻어갈 수 있었을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즐거움, 위로, 공감, 의지 같은 것들. 그런데 꼭 마지막에는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나도 타이거나 이글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삼총사가 되려면 베어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아쉬웠다. 나와 나머지 둘 사이의 은근한 거리감도. 그 관계는 오히려 아득한 유년기에만 머물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 그러니까 아무래도 셋은 좀 불안하다. 혼자는 확실히 외롭고 둘은 그보다 좀 덜 외롭지만 셋은 경우의 수를 갖기 때문이다. 온전히 셋으로 존재하거나, 셋 중 둘에 속하거나, 셋 중 하나에 속하거나. 온전한 셋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니까 패스. 먼저 셋 중 하나일 때를 보자. 이때는 확실히 외롭다. 혼자서 하나일 때보다 더 외롭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때문에 괴로워지니까.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그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쓰이는 이유가 있지. 셋 중 하나의 입장에서 나머지 둘을 볼 때 느껴지는 무력함을 아는지? ​ 셋 중 둘이 마냥 편하단 건 아니다. 그냥 둘이면 몰라도 셋 중 둘이 되면 나머지 하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신경 쓰지 않는 순간 그냥 둘이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해리포터와 헤르미온느와 론의 관계를 온전한 셋으로 보는 시각에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한다. 셋 중 둘이 부부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관계의 기울기에 따라 해리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누구 편을 들지?), 외로워질 수도 있다(그래도 지니가 있으니까). 자, 이제 당신도 ‘이러나 저러나 인간관계에 있어 셋이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숫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병연
서울과 엄마와 나
90년대 중반 어느 겨울, 서울에서 김천으로 가는 고속버스 한 대는 총 세 번 휴게소에 들렀다. "원래는 한 번만 쉬는 노선인데 네가 하도 찡얼대니까 기사님이 애기 바람 좀 쐬게 하라고 글쎄 세 번이나 쉬었지 뭐니." 엄마는 '정병연은 키우기 어려운 아이였다'라는 주제가 대화에 오를 때면 언제나 이 얘기부터 꺼냈다. 그 다음에는 아마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를 대신 봐줬던 외할머니가 응급실에 입원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이어질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엄마는 그 애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태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널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 "뭘요?" "넌 멀미도 심하고 더위를 많이 타잖아." "그쵸." "근데 엄마는 멀미는 안 하고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거든." "그것도 맞죠." "그래서 난 얘가 많이 추운가보다 싶어서 옷도 더 입히고 목도리도 둘러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계속 울길래 아직도 추운가 싶어서 모자도 씌우고 그랬지. 털모자로." "와. 진짜 끔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