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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프로페셔널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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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병연은(24.06.16)
1.
이사 중입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여러 이사를 동시에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집을 옮겼습니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서울시 노원구입니다.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다보면 노원구에 살았던 분이 꼭 나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 공통점이 있습니다. 대부분 거기서 나고 자라 2~30년을 살았습니다. 23년 거주자는 나서기 민망하겠습니다. 오래된 대단지 아파트가 밀집된 지역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2.
새벽에 잠깐 깼는데 잠이 오지 않아 거실로 나갔습니다. 창밖에는 주차장이 보입니다. 구축 아파트 특유의 이중, 삼중 주차가 눈에 띕니다. 양쪽으로 아파트 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아직 불을 끄지 않은 세대가 많네요. 군데군데 설치된 가로등이 단지 내부를 적당하게 밝힙니다. “밤 산책하기 좋게 조성돼 있다”는 지인의 말이 떠오릅니다. 왠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더 행복하게 살아보자.
3.
회사도 이사 중입니다. 이직은 아닙니다. 이게 말하자면 복잡한데…아무래도 회사 일인 만큼 제가 이러쿵저러쿵 할 내용이 못됩니다. 일단 ’피벗’이라고 요약하겠습니다. 정확하진 않지만 그나마 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울 만한 설명이네요. 그 과정에서 전반적인 환경에 작지 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담컨대 이와 비슷한 경험은 하고 싶어도 못 해볼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흥미롭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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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도 이사 중입니다. 스티비 브랜드 페이지와 인스타그램으로 구독자 분들을 만나왔는데요. 더 나은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에게 더 재밌는 방식으로 전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일단 우리만의 ‘본진’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곧 소식 들려드릴게요. 이제 보니 다음 달이면 풀칠도 4주년을 맞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데 마침 또 적당한 명분이 되겠네요.
5.
제 아카이브도 이사 중입니다. 첫 번째 뉴스레터를 보낼 때는 노션 웹사이트를 썼고, 두 번째 뉴스레터를 보낼 때는 거기에 우피를 입혔습니다. 세 번째 뉴스레터를 보낼 때는 그 껍데기를 다시 벗겨냈죠. 이번에는 슬래시페이지라는 서비스를 이용했습니다. 아파트 실거래가 앱 ‘호갱노노’를 직방에 엑싯했던 창업 팀이 작년에 론칭했더라고요. 아쉬운 점도 다소 있지만 사용성도 좋고 개선 속도도 빠릅니다.
6.
이제 제목 관련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 상황 따위를 주절대다 여기까지 왔네요. 재미없는 이야기를 읽게 해 죄송합니다. 에헴. 자, 그럼… ‘professional movers’는 포장이사를 뜻합니다. 알고 계셨나요? 그렇다면 일상에서 영어를 써보신 분이겠군요. 사실 전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좀 어색했습니다. 밥벌이를 하는 모두가 ‘프로페셔널’인 건 맞지만, 그렇기 때문에 굳이 그것을 명시하지 않으니까요.
7.
그런데 재밌습니다. 포장이사라는 단어도 만들어진 맥락이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사할 때 크게 세 가지 선택지를 갖죠. 직접 이사, 반포장이사, 포장이사. 직접 이사가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챙기는 것이라면 포장이사는 가져가야 할 이삿짐 목록과 새 집에서 그것들을 풀어놓을 위치만 지정하면 됩니다. 짐을 싸고 싣고 나르고 정리하는 일은 업체에서 진행하죠. 반포장이사는 그걸 같이 하는 것이고요.
8.
나의 노동력을 얼마나 보존했는지, 즉 돈을 얼마나 냈는지에 따라 반포장 혹은 포장이라고 구별해 부릅니다. 그러니 포장 = professional이라고 봐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네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 효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짐이랄 게 딱히 없는 상황이 아닌 이상). 뭐, 이사뿐인가요? 우리는 생활의 점점 더 많은 한 부분을 프로페셔널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그걸 ‘사치’로 여기지도 않고요.
9.
프로페셔널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본질적으로 누군가를 대신해 무언가를 해주고 대가를 받는 것. 예술가, 요즘엔 크리에이터가 더 적합하겠네요. 여튼 그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대신해 경험해주고 누군가를 대신해 상상해줍니다. 누군가를 대신해 표현해주죠. 중요한 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해 주는 것’이죠. 나를 대신해준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면 아무도 비용을 지불하지 않습니다.
10.
여기서 이런 결론이 나와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내가 프로페셔널인지 아닌지 결정할 권한은 어차피 타인에게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위험합니다.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거기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결국 멀어지는 건 나 자신이니까요. 몰입해서 일하고 그를 통해 끊임없이 성취해온 이들이 한 번 쯤 번아웃에 시달리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난 레터 이후에
열심히 읽었습니다(안 썼다는 얘기). 지난 레터에 롱블랙과 Ep9 구독을 취소했다고 썼는데요.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구독 취소를 취소했습니다. 심지어 유료 구독을 하나 더 했습니다. 오터레터를 1개월 구독해봤습니다.
이참에 제가 구독하고 있는 각종 서비스들 소개해볼게요. 설명은 생략.
🛰️
유료 / 텍스트 콘텐츠 서비스
프로젝트 썸원 / 롱블랙 / Ep9 / 커피팟 / 오터레터 / 밀리의서재
무료 / 텍스트 콘텐츠 서비스
차우진의 TMI.FM / 캐릿 / 어거스트 / 주간ㅅㅁㅅ / SSWR / 선데이낫뱃다이너클럽 / 여기힙해 / 인스피아 / 슬로우뉴스 / 곽아람의 북클럽 / 점선면(경향신문) / 스브스프리미엄 / 반올림(#)책 / H:730 / 까탈로그
유료 / 기타 서비스
유튜브 프리미엄 / 스포티비나우(EPL 개막 시 구독) / 넷플릭스 / 왓챠(일론 머스크 다큐멘터리) / 티빙(유로2024) / 쿠팡 와우멤버십 / 노션 / 네이버멤버십 / 톡서랍 / 스픽
문장 수집은 순항 중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기획은 ‘1인분’을 하려면 ‘여러 사람’이 필요함을 깨닫는 과정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고충, 국장과 후배의 경험담, 이동형 장터 운영자들이 전해준 생생한 현장, 그렇게 서툴게 그러모은 기사는 선배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졌다. 나 혼자 ‘열심히, 잘’ 하면 제 몫을 하리라 여겼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다."
지난 2주 사이에 완독한 책은 이훤의 <아무튼, 당근마켓>입니다.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는 역시나 찔끔찔끔 독파 중. 변명하자면 독서모임 일정이 조금 조정됐습니다. 다다음 레터 보낼 때는 확실히 완독했을 겁니다. 믿어주세요.
답답장 드립니다
9호선출발벗: 재밌는걸? 대신 답장은 다섯줄로 부탁해요.
병연: 재밌다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섯 줄로 답장을 드리려면 그만큼 글감을 던져주셔야 합니다. 글재주가 부족해서요. 크크. 그러니까 이렇게 막 요구하시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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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가족 여행
요즘 정병연은 속초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저와 동생은 9시에 출발했고 부모님은 경북 김천에서 5시에 출발했습니다. 사실 속초를 도착지로 찍는다면 소요 시간이 크게 차이나진 않습니다(여행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서울 4시간, 김천 4시간 30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왜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섰을까. 절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이 합류하기 전에 원주 구룡사, 영월 법흥사에 들렀다 올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그 다음 일정도 절인데. 만나자마자 점심을 먹었습니다(식당은 정가네메밀막국수입니다. 절 방문 일정은 고정값이기 때문에 그 동선에 맞춰 급하게 찾은 곳인데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짧지만 웨이팅도 했어요. 추천합니다). 평창 월정사를 둘러본 뒤 속초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었습니다. 물론 술도 한 잔 했죠. 다음 날 아침에 순두부를 먹고 또 다른 절로 향했습니다. 속초 신흥사와 양양 낙산사입니다. 이틀만에 절 다섯 곳이라니. 이쯤 되면 이번 여행은 ‘속초 여행’보다는 ‘강원도 절 투어’라고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자연스레 불심이 차오릅니다. 33관음성지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의 절 중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그리고 이 절들을 순례할 수 있게 만든 책자가 있습니다. 책자를 들고 종무소에 가면 인증 도장을 찍어줍니다. 여기에 포함된 강원도 소재 절은 총 다섯 곳입니다. 네. 저희 부모님이 이틀 사이에 다녀가신 곳들이죠. 멀리 강원도까지 오시는 김에 한번에 해치우려고 하셨던 겁니다! 참고로 이 33이라는 숫자는 우연히 정해진 게 아닙니다. 33은 불교에서도 의미 있는 숫자인데요. 관세음보살이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 불교의 관음 성지 순례 역시 서부 지역의 33개의 절을 방문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죠. 물론 저희 부모님은 순례자라기보다는 국내 여행 다닐 겸 참여하는 라이트 유저지만요.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33관음성지 순례에 이용(?) 당한 셈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님과 가는 가족여행은 자칫 효도 여행에 그칠 수도 있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자연스럽게 여행의 책임(?)을 분담하게 되니까요(아빠는 3년 뒤에는 꼭 튀르키예에 가자고 노래를 부릅니다). 언젠가는 전적으로 저와 동생이 책임지는 효도 여행을 다니겠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꺼이 할 수 있죠. 예전에 갔던 여행에서 엄마는 운전석에 앉은 나와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뒤에서 바라보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20년 전에는 그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바뀐 위치가 새삼스러웠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았던 그 시기를 이제 아이들이 사는구나.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윤회구나. 이렇게 우리는 돌아가는 것이구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구나. 하늘로 돌아간다면 오늘을 떠올리며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참, 아름다웠더라 지난 레터 이후에
병연
굳이
요즘 정병연은(24.07.16)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2박 3일, 마지막 날 오전에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므로 짧은 편이죠. 그래도 꽤 알차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웠던 식사 덕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볍게 소개. 첫째 날 점심은 서귀포시에 위치한 식당 센트로에서 먹었습니다. 4인이었고 수비드 제주 돼지, 감자 뇨끼, 비스크 크림 파스타, 조개 파스타, 로메인 샐러드를 골랐습니다. 점심 식사에는 1인당 음료 한 잔이 포함돼 있습니다. 저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셨어요. 손님은 전부 도민이었습니다. 하긴 제주도까지 와서 굳이 양식을 먹을 이유가 없긴 하죠. 그래도 맛집이긴 한 것 같습니다. 2시에 방문했는데 세 팀 정도 있었고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도 새로운 손님이 들어오시더라고요. 실제로 맛도 좋습니다. 저녁은 제주시청 인근 중식 이자카야 산아에서 먹었습니다. 나름 관계자(?)라서 권해드리기 조심스럽긴 합니다. 그래도 맛은 확실합니다. 송이관자, 칠리새우, 짜장면을 먹었습니다. 아, 여기도 손님 대부분이 도민입니다. 만약 가보시게 되면 아시게 되겠지만, 관광객이 머물 만한 동네가 아니거든요. 아, 한 블럭 뒤에는 갱이네보말칼국수라는 데가 있습니다. 여긴 관광객들에게도 유명한 맛집인 것 같아요. 라마다호텔에서 잠을 자고 산아에서 저녁을 먹고 다음 날 갱이네에서 아점을 드시면 딱이겠네요. 둘째 날 점심은 제주시청 바로 옆에 있는 라스또르따스에서 먹었습니다. 멕시코 음식점입니다. ‘제주도에서 굳이…?’ 싶긴 하죠? 어쨌든 관광객과 제주도민 모두가 인정한 맛집입니다. 저는 까르니따스, 뜨리빠, 부리또를 먹었습니다. 까르니따스와 부리또는 기본 타코입니다. 구성이 기본이라는 거지 맛은 꽤 좋습니다. 제주 한우 곱창을 활용한 뜨리빠는 정말 맛있더군요. 달고기(생선)를 쓴 뻬스까도가 이 날 안 된다길래 2안으로 주문한 건데 아주 훌륭했습니다. 아, 고수가 들어가는데 뺄 수도 있습니다. 저녁은 한림에 있는 육고깃집에서 먹었습니다. 뼈갈비세트가 주력인데 등심덧살에 대한 평가도 좋습니다. 저는 2인팟이라 뼈갈비세트만. 고기를 구워먹고 있으면 뼈에 붙은 고기를 따로 구워서 내옵니다. 진짜 맛있습니다. 역시 고기는 뼈에 붙은 고기인가…아참, 한림점이 본점인데요. 제주시에 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맛에 크게 차이는 없지만 왠지 본점이 더 나은 것 같다는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일까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접근성은 제주시가 더 나을 테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싶은 메뉴와 ‘굳이…?’ 싶은 동네의 조합은 색다른 제주도의 맛을 알려줬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일로 제주도를 자주 방문하다 보니 ‘굳이…?’ 싶은 것에 도전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몇 년에 한 번 여행으로 찾는 경우였다면 저 역시 안전한 선택을 했겠죠. ‘굳이…?’ 싶은 선택지는 가장 먼저 배제했을 게 분명합니다. 당연히 그게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정석만으로도 일정을 채우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을 테니까요. 원래 변주나 응용은 따분한 기초 위에서 빛을 발하는 법입니다. 제 딴에는 평소의 나답지 않은 과감한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비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암요. 물론입니다. 삶의 모양이 다양한 이유는 각자 쌓아온 선택의 모양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일 테니까요. 다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에서 ‘굳이…?’ 싶은 것들을 허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굳이…?’ 싶은 선택지가 소거된 삶은 아무래도 ‘다양한 삶의 모양’에 기여하기 어려우니까요. 돌연변이가 진화를 만드는 원동력인 것처럼 내 경험에서도 가끔씩 돌연변이가 하나 쯤 나와줘야 합니다. 앞으로도 제주도를 자주 갈 겁니다(당장 9월 초에도 방문 계획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주 가는가? 그에 대해서는 따로 전해드릴 기회가 있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제주도에 관해서는 꽤 재밌는 포지션을 갖고 있다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1년에 3~4회는 꼭 제주도를 가는데 제주도민도 아니고, 이주민도 아니고, 순수하게 제주도를 좋아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행을 좋아해서 여러 곳을 다니는 사람도 아닙니다. 여러모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경계 위에 서 있는 느낌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고백하자면 제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제주도에서 굳이…?’라는 이름으로 디에디트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겁니다. 작년 이맘때 생각했던 것 같군요…엇, 잠시만요. 지금 ‘굳이 버킷리스트라고 할 것까지 있나…?’, ‘굳이 그런 걸 글로 써야 해…?’, ‘굳이 디에디트인 이유는 뭐지…?’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넣어두십시오. 왜냐면 저도 아직 그 답을 모르니까요. 원래 ‘굳이…?’ 싶은 건 떠올리는 게 먼저고 언젠가 직접 해본 다음 이유를 깨닫는 것에 가까운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병연
안목
요즘 정병연은(24.06.30) 돈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경제력과 경제관념은 제각각입니다. 당연히 ‘많이’의 기준도 다 다를 테죠. 그러니 얼마를 썼냐고 묻지 마시길. 대신 본인이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금액을 떠올려 보세요. 조금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이번 달 지출액은 평소보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큽니다. 아, 집이나 차를 사진 않았습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마 안 쓴 거 같긴 하네요. 적어도 수십만원, 많게는 백만원이 넘어가는 물건들(!)을 며칠 동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이젠 살 거 다 사고 참을 건 다 참았습니다). 그러다보니 10만원 쯤 되는 가격 차이는 비교 요소조차 안 되더군요. 남들은 결혼 준비할 때나 할 법한 경험을 체험판으로 겪어봤습니다. 재밌다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마냥 재밌다고 할 수 없겠죠? 지금 즐겨야겠습니다. 마케터는 온갖 소비를 해봐야 한다죠? 출처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유명한 마케터 분들이 쓴 책이나 출연한 유튜브 영상에서 접했을 말입니다. 소비자가 돈을 쓰게 만드는 일을 하는 만큼 그 스스로 소비자가 돼 돈을 열심히 써봐야 ‘영감’과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그로써 업무에 나만의 ‘취향’을 녹여 ‘트렌드’를 따르는 게 아닌 이끌 수 있다는 류의 얘기죠. 솔직히 당시에는 ‘맞는 말이긴 한데 좀 공허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저는 마케터가 아닙니다만…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지출을 하고 나니 그런 조언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일부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얼마 전 방문했던 서울시 성수동에 위치한 빈티지 가구점 오드플랫(@oddflat)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사실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구입할 의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구경만 하다 나왔고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평소의 저라면 꿈에서도 안 했을 고민을 합니다. 벽걸이 시계 때문입니다. 마침 이 레터를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을 기준으로 오드플랫 인스타그램에 가장 최근 게시물로 올라와 있네요. “아서 우마노프(Arthur Umanoff)가 디자인한” 수동 시계라고 합니다. 수동 시계란? “태엽을 키로 몇 바퀴 돌려주어야 시계추가 멈추지 않고 진동하게 되고, 이 진동의 힘으로 바늘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선명하고 단단한 외형과 무게감 있는 색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앞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는지 사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시계 보고 계시나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아, 네, 네. 너무 예뻐서요…”라고 흘렸습니다. 사실 51:49로 ‘사지 않는다(사면 안 된다)’라는 결정을 내린 터라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차였습니다. 어딘가 신난 얼굴로 이런 저런 설명을 하시는데…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한 녀석을 들일 형편이 못 됩니다…어색하게 웃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인스타 글을 보니 “이런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이 시계는 너무 멋지게 생겼습니다”라고 쓰셨네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수고가 이 시계를 더 멋지게 만드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빈티지-아날로그 썸띵은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기술이 소거해 버린 불편함에 그 ‘멋짐’의 일부를 기대고 있기도 하니까요. 어쨌건 이 시계는 사장님도 관심 갖고 살피는 제품이었던 것입니다. 인정 받은 느낌이 들어 으쓱했네요(아님). 참고로 시계의 가격은 110만원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겠죠. 헉,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게 가장 놀랍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빈티지 시계에 그만한 돈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별 거 아닌 듯하지만 사실 대단히 큰 변화입니다. 훗날 제가 빈티지 가구와 인테리어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면 아마도 그 시작점으로는 지금 이 시기를 지목할 겁니다. 누군가 태생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안목’도 사실 이처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계기에서 불꽃 튀듯 피어났던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뭐랄까, 그것은 자의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을 가진 일종의 덕통사고라고 할까…? 흠. 그나저나 거실 한쪽 벽이 유독 허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