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여행
요즘 정병연은 속초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서울에 사는 저와 동생은 9시에 출발했고 부모님은 경북 김천에서 5시에 출발했습니다. 사실 속초를 도착지로 찍는다면 소요 시간이 크게 차이나진 않습니다(여행이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서울 4시간, 김천 4시간 30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왜 그렇게 일찍 집을 나섰을까. 절에 다녀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와 동생이 합류하기 전에 원주 구룡사, 영월 법흥사에 들렀다 올 계획이라고 하시네요. 그 다음 일정도 절인데. 만나자마자 점심을 먹었습니다(식당은 정가네메밀막국수입니다. 절 방문 일정은 고정값이기 때문에 그 동선에 맞춰 급하게 찾은 곳인데 꽤 만족스러웠습니다. 심지어 짧지만 웨이팅도 했어요. 추천합니다). 평창 월정사를 둘러본 뒤 속초로 이동해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수산시장에서 회를 먹었습니다. 물론 술도 한 잔 했죠. 다음 날 아침에 순두부를 먹고 또 다른 절로 향했습니다. 속초 신흥사와 양양 낙산사입니다. 이틀만에 절 다섯 곳이라니. 이쯤 되면 이번 여행은 ‘속초 여행’보다는 ‘강원도 절 투어’라고 부르는 게 맞겠습니다. 자연스레 불심이 차오릅니다. 33관음성지라는 게 있습니다. 한국의 절 중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입니다. 그리고 이 절들을 순례할 수 있게 만든 책자가 있습니다. 책자를 들고 종무소에 가면 인증 도장을 찍어줍니다. 여기에 포함된 강원도 소재 절은 총 다섯 곳입니다. 네. 저희 부모님이 이틀 사이에 다녀가신 곳들이죠. 멀리 강원도까지 오시는 김에 한번에 해치우려고 하셨던 겁니다! 참고로 이 33이라는 숫자는 우연히 정해진 게 아닙니다. 33은 불교에서도 의미 있는 숫자인데요. 관세음보살이 33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중생을 구제한다는 신앙에서 비롯됐습니다. 일본 불교의 관음 성지 순례 역시 서부 지역의 33개의 절을 방문하는 것으로 구성돼 있죠. 물론 저희 부모님은 순례자라기보다는 국내 여행 다닐 겸 참여하는 라이트 유저지만요. 결과적으로 부모님의 33관음성지 순례에 이용(?) 당한 셈이지만, 딱히 불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성인이 된 자식들이 부모님과 가는 가족여행은 자칫 효도 여행에 그칠 수도 있는데, 부모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자연스럽게 여행의 책임(?)을 분담하게 되니까요(아빠는 3년 뒤에는 꼭 튀르키예에 가자고 노래를 부릅니다). 언젠가는 전적으로 저와 동생이 책임지는 효도 여행을 다니겠죠.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로 느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꺼이 할 수 있죠. 예전에 갔던 여행에서 엄마는 운전석에 앉은 나와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뒤에서 바라보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20년 전에는 그 자리에 자신들이 앉아 있었는데 어느새 바뀐 위치가 새삼스러웠다는 것이죠. 우리가 살았던 그 시기를 이제 아이들이 사는구나. 이런 거구나. 이런 게 윤회구나. 이렇게 우리는 돌아가는 것이구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구나. 하늘로 돌아간다면 오늘을 떠올리며 확신에 차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참, 아름다웠더라 지난 레터 이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