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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든 되겠지

안목

병연

요즘 정병연은(24.06.30)

1.
돈을 많이 썼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경제력과 경제관념은 제각각입니다. 당연히 ‘많이’의 기준도 다 다를 테죠. 그러니 얼마를 썼냐고 묻지 마시길. 대신 본인이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금액을 떠올려 보세요. 조금 이해가 갈지도 모르겠네요. 여튼 이번 달 지출액은 평소보다 숫자가 압도적으로 큽니다. 아, 집이나 차를 사진 않았습니다. 또 그 정도는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고 보니 얼마 안 쓴 거 같긴 하네요.
2.
적어도 수십만원, 많게는 백만원이 넘어가는 물건들(!)을 며칠 동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이젠 살 거 다 사고 참을 건 다 참았습니다). 그러다보니 10만원 쯤 되는 가격 차이는 비교 요소조차 안 되더군요. 남들은 결혼 준비할 때나 할 법한 경험을 체험판으로 겪어봤습니다. 재밌다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아마 더 많은 돈을 쓰게 되는 날이 오면 마냥 재밌다고 할 수 없겠죠? 지금 즐겨야겠습니다.
3.
마케터는 온갖 소비를 해봐야 한다죠? 출처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유명한 마케터 분들이 쓴 책이나 출연한 유튜브 영상에서 접했을 말입니다. 소비자가 돈을 쓰게 만드는 일을 하는 만큼 그 스스로 소비자가 돼 돈을 열심히 써봐야 ‘영감’과 ‘통찰’을 얻을 수 있고 그로써 업무에 나만의 ‘취향’을 녹여 ‘트렌드’를 따르는 게 아닌 이끌 수 있다는 류의 얘기죠. 솔직히 당시에는 ‘맞는 말이긴 한데 좀 공허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4.
물론 저는 마케터가 아닙니다만…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많은 지출을 하고 나니 그런 조언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일부나마 이해하게 됐습니다. 특히 얼마 전 방문했던 서울시 성수동에 위치한 빈티지 가구점 오드플랫(@oddflat)이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사실 이곳에서는 무언가를 구입할 의사 자체가 없었습니다. 실제로도 구경만 하다 나왔고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평소의 저라면 꿈에서도 안 했을 고민을 합니다.
5.
벽걸이 시계 때문입니다. 마침 이 레터를 보내는 지금 이 시간을 기준으로 오드플랫 인스타그램에 가장 최근 게시물로 올라와 있네요. “아서 우마노프(Arthur Umanoff)가 디자인한” 수동 시계라고 합니다. 수동 시계란? “태엽을 키로 몇 바퀴 돌려주어야 시계추가 멈추지 않고 진동하게 되고, 이 진동의 힘으로 바늘이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단순하지만 선명하고 단단한 외형과 무게감 있는 색의 조합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6.
그 앞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길었는지 사장님이 슬그머니 다가와 “시계 보고 계시나요?”라고 물으시더라고요. “아, 네, 네. 너무 예뻐서요…”라고 흘렸습니다. 사실 51:49로 ‘사지 않는다(사면 안 된다)’라는 결정을 내린 터라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차였습니다. 어딘가 신난 얼굴로 이런 저런 설명을 하시는데…사장님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한 녀석을 들일 형편이 못 됩니다…어색하게 웃고 가게를 나섰습니다.
7.
인스타 글을 보니 “이런 수고를 감수하더라도 이 시계는 너무 멋지게 생겼습니다”라고 쓰셨네요.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런 수고가 이 시계를 더 멋지게 만드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빈티지-아날로그 썸띵은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기술이 소거해 버린 불편함에 그 ‘멋짐’의 일부를 기대고 있기도 하니까요. 어쨌건 이 시계는 사장님도 관심 갖고 살피는 제품이었던 것입니다. 인정 받은 느낌이 들어 으쓱했네요(아님).
8.
참고로 시계의 가격은 110만원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겠죠. 헉, 제가 지금 뭐라고 했죠?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상상을 할 수 있게 되다니. 이게 가장 놀랍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빈티지 시계에 그만한 돈을 쓰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됐어요. 별 거 아닌 듯하지만 사실 대단히 큰 변화입니다.
9.
훗날 제가 빈티지 가구와 인테리어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면 아마도 그 시작점으로는 지금 이 시기를 지목할 겁니다. 누군가 태생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여겼던 ‘안목’도 사실 이처럼 사소해 보일 수 있는 계기에서 불꽃 튀듯 피어났던 것이겠구나 싶습니다. 뭐랄까, 그것은 자의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불가항력을 가진 일종의 덕통사고라고 할까…? 흠. 그나저나 거실 한쪽 벽이 유독 허해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요?

지난 레터 이후에

영화 <소울메이트>를 봤습니다. 김다미, 전소니 배우가 주연을 맡았습니다. 중국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원작으로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을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 한때 저의 인생영화 3위에 랭크돼 있었죠(인생영화 랭크 매기는 방식에 대한 글은 여기).
원작 이야기 흐름에서 주요한 포인트는 그대로 남겨뒀지만 꽤 많은 부분이 한국화(?) 됐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좀 아쉬웠습니다. 다만 배우의 외모를 비롯해 시각적으로는 확실히 더 편안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저도 한국인이니까요. 여튼 딱 그 정도.
영화는 시종일관 여성 캐릭터 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으로 남성 캐릭터(요즘 핫한 변우석 배우)가 나옵니다만, 그 역할은 매우 제한적입니다. 연출된 삼각관계는 오히려 둘의 관계를 더 강하게 비추죠. 다른 캐릭터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동성 친구와의 1:1 관계를 대하는 것에 있어 여성과 남성이 갖는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것은 충분히 일반적인가요? 유의미한 근거가 있나요?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각 성별 캐릭터를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 존재하는 것 같긴 합니다.
다만 남성의 경우 이미 많이 다뤄져 왔으며 그래서 생긴 스테레오 타입이 있는 반면, 여성의 경우 너무 다뤄지지 않아 생긴 스테레오 타입이 있는 것이고요. 제게 있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그러한 맥락에서 새로운 관점을 더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코멘트가 쓸 데 없이 길어졌네요. 원작과 리메이크 중 한 편만 골라달라고 하신다면 원작을 추천하겠습니다.
다큐멘터리 <일론 머스크 쇼>를 봤습니다. 3부작입니다. 다큐는 추후 <일론 머스크> 책 리뷰와 같이 다뤄보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코멘트하면, 일론 머스크에 대한 흥미로운 면모를 알기에 적당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비판 또는 고민해야 할 부분들은 많이 빠져 있죠. 이것은 책 <일론 머스크>도 마찬가지인데요. 그래도 책은 분량이 분량인 만큼 다큐에 비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긴 합니다. 다큐와 책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보는 것을 권합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봤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한참 핫할 때는 이 영화와 오펜하이머라는 인물을 다루는 콘텐츠(ex. 침투부-이 영상 보고 가면 얼마나 좋았을까?)들만 섭렵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시대적 배경, 주요 과학자, 원자폭탄의 원리 같은 것을 알게 됐는데요. 오히려 영화에서 그런 것들은 부차적이고 오펜하이머의 인물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더군요(물론 부차적인 것들을 알고 있으면 더 깊이 있는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각기 다른 시점과 상황을 번갈아가면서 보여주는 편집 방식은, 그것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실제로 더 효과적이라고 하더라도 제겐 좀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는 책으로 읽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어 장바구니에 담아뒀습니다.
문장 수집 여전히 순항 중입니다.
Q. ‘마동석의 길’이요?
A. 그 형은 그냥 배우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걸 같이 하시잖아요. <범죄도시> 시리즈도 동석이 형의 욕망이 묻어난 작품이거든요. 형도 무명 시절이 있었고, ‘나는 나중에 이런 영화를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고 그 아이덴티티가 <범죄도시>라는 시리즈로 나온 거예요. 형이 오랜 생활 투자한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에 나온 거고요. 그 길을 저는 열렬히 응원해요. ‘나도 동석이 형 같은 액션 스타가 돼야지’가 아니라 ‘나도 동석이 형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해서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영화인이 돼야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난 2주 사이에 완독한 책은 없고요. 월터 아이작슨의 <일론 머스크>를 읽고 있습니다. 드디어 끝이 보입니다. 다음 레터 보낼 때는 완독 소식을 전해드릴게요. 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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