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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적 일상
인생 영화 있으세요?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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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따로 정리해두면 편하다. 자주 출제되는 문제의 정답은 달달 외워둬야 효율적이다. 비슷하게, 자주 쓰이는 스몰토크 소재에 대해서는 레퍼토리를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바로 ’인생 영화‘ 이야기다.
인생 영화로 늘 세 편을 꼽는다. ‘라라랜드’와 ‘인사이드 르윈’ 두 편은 고정이다. 나머지 한 편은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을 고른다(2024년 4월 현재 그 자리는 ’바빌론‘이 차지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으나 내 나름대로는 전략적인 구성이다.
라라랜드는 공감을 얻기 쉬운 선택이다. 재밌게 본 사람이 많고 이야깃거리도 풍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크게 유명한 영화가 아니다. 덕분에 내 취향을 상대에게 각인시키기에 좋다. 최근 재밌게 본 영화는 그 자체가 훌륭한 스몰토크 소재다.
세 편 모두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다. 우연의 일치다. ’다함께 글쓰계‘ 멤버들과 이 얘기를 나누던 중 “음악 영화를 좋아하시나봐요”라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세 편 모두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영화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인지했다.
음악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곱씹는 일이 즐겁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도 흥미롭다. 누구든 자신을 즐겁게 해주고 흥미롭게 해주는 영화를 좋아할 텐데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라라랜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복잡한 감정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그러한 선택이 후회로 이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다.
인사이드 르윈은 아무리 격렬한 모험으로 가득 채우더라도 우리의 삶이란 결국 잠에 들었다가 깬 뒤 어딘가로 떠나는 행위의 반복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지루한 반복 비슷한 일상으로 수렴한다는 진리를 얘기하는 영화다.
바빌론은 모든 개인의 성취란 시대 배경을 기반으로 하며 시대 변화를 이겨내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시대에 기여하고 있는 작디작은 재능들을 존경하게 만드는 영화다.
스몰토크 소재로서 영화는 무난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곱씹어 내놓은 영화는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별’이라는 단어에 쫄 거 없다. 바로 그때, 바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생각을 알아갈 수 있었다면 충분히 특별한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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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한 번 사는 인생이니까 더 걱정하고 고민할래
“운전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어느 날, 조수석에 앉은 친구가 운전하는 날 보고 이렇게 말했다. “별게 다 대단하대?”라며 웃어넘겼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역시 면허를 따기 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처음 도로주행에 나섰을 때 손과 발을 극도의 긴장감이 휘감았었다. 운전을 해보지 않은 나에게, 운전석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면허를 따자마자 ‘뭐, 별거 아니네.’라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원래 인생의 관문이란, 넘고 나서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막상 그 앞에 섰을 땐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높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친구 A가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취업 준비에 지친 A는 취준을 그만두고 카페에서 일하며 틈틈이 하고 싶었던 걸 하고, 배우고 싶었던 걸 배웠다. 그녀는 현재 자신의 이런 삶이 좋고 행복하지만, 한편으론 무섭다고 말했다. 사는 것도 재밌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남자 친구와의 관계도 너무 좋은데, 그래서 불안하다고. 이것저것 하느라 한 주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지만, 영양가 없이 바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바쁨이 아닌 오직 현재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한 바쁨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특히 알아서 잘 하고 있을 거라고 자신을 믿고 있을 부모님이 실망하시게 될까 봐 무섭다고 했다. 자기는 지금 정말 괜찮은데, 이게 정말 괜찮은 걸까? 그야말로 답도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왔단다. A의 고민을 듣고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욜로(YOLO)!, 카르페디엠, 지금 네가 즐거운 거면 된 거야… 이런 말들을 위로로 건네면 될까. 평론가 황현산 역시 “젊은 날의 삶은 다른 삶을 준비하기 위한 삶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한 삶이기도 하며,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삶이 거기 있기도 하다”라고 했으니까. 오늘도 내 삶을 구성하는 하루인데, 내일을 빛내기 위해 불안한 오늘을 보내야 할 이유는 없지, 아무렴.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거란 보장도 없고. 그러니 현재를 즐기라고 말해주면 되려나. 하지만 나는 그런 말을 그렇게 쉽게 건넬 수 없었다. A에겐 눈앞에 놓인 관문이 간단히 넘을 수 있는 장애물이 아니라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벽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마치 운전대 앞에서 한껏 긴장했던, 면허를 따기 전의 나처럼. 그러니 A가 맞닥뜨린 벽의 존재를 무시하고 “이것은 사실 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무책임하게 “현재를 즐겨!”라고 말할 수 없었던 거다. 나 역시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벽 앞에 서서 A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자신의 삶에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고민하고 걱정하는 건데, 이런 고민과 걱정을 단순히 욜로 같은 말로 쓸 데 없는 취급해버릴 순 없었다. 삶을 온전히 감당하려는 인간이라면 불안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그게 현재의 행복을 갉아먹을지라도 말이다. 이런 고민과 걱정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삶의 과정일 테다. 우리는 완벽하게 오늘만 살 수 없다. 그럴 필요도 없고. 할 수 있는 건 그저 한 관문 한 관문 통과할 때마다 내가 걱정하고 고민했던 것만큼 이 관문이 높은 벽은 아니었구나, 깨닫는 것뿐. 남들은 욜로라지만, 한 번 밖에 살지 않으니까 나는 좀 더 미래를 걱정하고 고민하며 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짜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감을 안고서.
병연
일할 때 '~하지 말 것' 리스트
일할 때 지키려는 최소한의 기준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하지 말 것’이라는 부정어 형태를 취한다. 왜냐면 그 기준을 넘겼다고 성과로 여기진 않기 때문이다. 취미로 마라톤을 하는 사람에게 풀코스 완주는 그 자체로 유의미하지만 프로 마라토너에겐 그렇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해냈다’며 소소한 성취감을 누리는 태도를 경계한다. 그런 기준은 대개 지적 당한 상황을 숙고한 끝에 만들어진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지적이 그처럼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지진 않는다. 지적 당하는 사람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지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주로 자신보다 타인을 위해 여러 고민과 생각을 하고 많은 경험을 쌓은 리더십을 갖춘 사람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운좋게 주어지는 환경에 가깝다. 한때는 내가 잘하는 걸 대신 발견해 이끌어주는 리더를 좋은 리더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르다. 좋은 리더란 내가 못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세심히 살피고 피드백 주는 리더다. 의외로 본인은 그걸 알기 어렵다. 플러스를 만들어 주기보단 마이너스를 없애주는 사람. 그렇게 다진 기반 위에 경험과 실력을 쌓는 게 내 일이고 그게 소위 말하는 성장이었다. 피드백 수용성이 성장의 척도라고 한다면 나의 성장 곡선은 완만할 것이다. 스스로 보기에도 피드백 수용성이 높은 편은 아닌 듯하다. 좋게 말하면 내가 한 일에 대한 평가와 나라는 인간에 대한 평가를 잘 나누어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남의 말에 크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한 번 찔리면 깊숙이 찔린다. 그렇게 생성된 기준들이다. 퀄리티 챙기느라 데드라인 놓치지 말 것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글쓰기 수업을 들었다. 첫 시간에 교수는 조를 이뤄서 간단한 글을 한 편 작성해 내라고 했다. 본 평가 때 빠진 점수를 보충할 수 있는 특별 점수를 걸었다. 우리 조가 어떤 글을 써냈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기억나는 사실은 완성되지 않은 글을 제출했다는 것과 시간 내에 제출한 팀이 우리뿐이었다는 것. "그거 몇 초, 몇 분 더한다고 눈에 띄게 퀄리티가 높아지지도 않는다. 여러분은 지금 납기 맞추는 것부터 익혀야 할 레벨이다." 그 말이 잊히지 않는다. 퀄리티보다 데드라인. 당연히 둘 다 챙겨야겠지만 내겐 데드라인을 가장 중요했다. 물론 이런 저런 경험을 쌓으며 어느 정도 요령을 터득하고 나자 퀄리티를 챙기기 위해 의사결정권자와 데드라인을 ‘협의’하는 선택지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데드라인 내에 처리한다는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앞으로도 그렇게 일할 작정이다. 최소한 내가 의사결정권자가 돼 데드라인을 지정하는 역할을 맡을 때까지는 말이다. 메일을 메시지처럼 쓰지 말 것 섭외나 제안이 많은 업무 특성상 먼저 메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답장을 못 받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부터 온갖 불안과 자조에 휩싸인다. ‘내가 제안한 내용이 흥미를 돋구지 못 했나?’, ‘내용을 쉽게 풀지 않아서 읽다가 꺼버렸나?’,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별로였나?’ 등등등. “나라면 이렇게 안 보냈을 것 같다”는 피드백을 듣거나 ‘메일 쓰는 법’을 다룬 책을 받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첫 직장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축적된 모든 불안과 자조가 업데이트의 동력이 됐다. 지금도 많은 메일을 뜯어본다. 형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제목은 어떻게 쓰는지, 인사는 어떻게 하며 수신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스몰토크는 어느 관계에서 하는지, 문단은 어디서 나눌지, 어떤 순서로 내용을 짤지, 마무리 인사는 뭐라고 할지, 심지어 ‘감사합니다.’와 ‘정병연 드림.’ 사이 한 줄을 띄울지. 메일은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한 글. 유일한 타깃의 액션을 못 끌어내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받는 이에겐 그 메일이 단순 메시지가 아닌 나의 포트폴리오라는 생각을 늘 한다.
병연
중독적인 사랑 그리고 우정
“7년 이상 꾸준히 소식을 주고 받았다면 그 사이는 평생 갈 사이”라는 글을 읽은 건 스무 살 때였다. 아직 많은 사람이 싸이월드를 이용하던 시기이니 당시 감성에 충실한 글 중 하나였을 테다. 그때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었다. 우선 7년이라는 쓸 데 없이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하면서도 그걸 뒷받침하는 어떤 근거도 내놓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내용을 해외 무슨 대학 저명한 연구진의 실험 결과랍시고 들이대는 뻔뻔함조차 없었다. 게다가 이십 년 남짓 산 내게 7년은 너무 길어 실감나지도 않는 시간이었다. 가장 오래된 친구라고 해봐야 고작 5, 6년인데. 의외로 그 문장은 오랫동안 내 주위를 맴돌았다. 심지어 지금은 살짝 믿기도 한다. 이제 내겐 7년 이상 꾸준히 소식을 주고 받은 사람들이 꽤 생긴 덕분일까. 심지어 스무 살 이후에 만난 사람들 중에서도 무려 10년이 훌쩍 넘은 인연들이 있다. 신기한 일이다. 이토록 오랜 기간 마음을 쏟는 상대가 이렇게 많아질 줄이야. 상당수가 호의적으로 반응해줬기에 이처럼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다는 건 더욱더 감사한 일이다. 물론 소식이 끊긴 이들을 미워하거나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에 실망하지도 않는다. 한때의 삶을 나누어 가진 ‘우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한때의 삶을 나눠 가진 우리. 우정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고 누군가 시킨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조금 느끼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우정에 대해 논하는 행위 자체가 좀 느끼한 일인데, 뭐. 함께 쌓은 시간과 그 안에서 겪은 사건은 완전히 낯선 개인들 사이에 우정의 틀을 만들고 밀도를 높여준다. 이로 말미암아 우정은 언제나 사후에 관찰되는 것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우리 사이에 우정이 있다‘라고 공언하게 되기 전까지 모든 느낌은 그저 별개의 현상일 뿐이다. 그것이 전조 현상으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상호 확인 및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친한 거 맞지?‘ 반면 사랑은 확인 과정이 없더라도 혼자서 그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 말하자면 관계의 맺어짐이 전제되지 않아도 존재는 얼마든지 확인되는 것이다. 사랑은 우정과 달리 상대방의 수락 없이도 세상에 태어나는 게 가능하다. 그렇기에 나눠가진 삶이 없을 수도 있다. 사랑이 먼저 있으라. 시간과 사건은 그 다음에 있어도 될지니. 따라서 연인은 친구보다 가성비가 높다. 오래된 우정보다 지금 막 생겨난 사랑이 더 깊을 수 있다. 반대로 아무리 오래 만나도 단 몇 초면 깨질 수 있다. 인간관계에서 느낄 수 있는 희로애락을 그 어떤 관계에서보다도 짧고 굵게 겪을 수 있다. 이처럼 강렬한 건 매우 중독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연애가 끝날 때면 다시는 그런 사람을 못 만날까 두려워하고 연애가 시작되면 그게 다음 생까지도 이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둘 다 진실이 아니란 걸 머리로는 알지만 한동안은 그렇게 믿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친구는 좀처럼 그러지 않는다. 약간 그렇기도 한가? 그래도 같은 크기의 감정이라면 아무래도 사랑에 비해 우정은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은가? 우정도 그만큼 격렬하다고? 미안하다. 사실 나도 친구들을 ‘사랑’한다. 아군이니 참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