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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적 일상
서울과 엄마와 나
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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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중반 어느 겨울, 서울에서 김천으로 가는 고속버스 한 대는 총 세 번 휴게소에 들렀다.
"원래는 한 번만 쉬는 노선인데 네가 하도 찡얼대니까 기사님이 애기 바람 좀 쐬게 하라고 글쎄 세 번이나 쉬었지 뭐니."
엄마는 '정병연은 키우기 어려운 아이였다'라는 주제가 대화에 오를 때면 언제나 이 얘기부터 꺼냈다. 그 다음에는 아마 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를 대신 봐줬던 외할머니가 응급실에 입원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이어질 터였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엄마는 그 애기에 한 마디를 더 보태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엄마가 널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
"뭘요?"
"넌 멀미도 심하고 더위를 많이 타잖아."
"그쵸."
"근데 엄마는 멀미는 안 하고 더위보다 추위를 많이 타거든."
"그것도 맞죠."
"그래서 난 얘가 많이 추운가보다 싶어서 옷도 더 입히고 목도리도 둘러주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계속 울길래 아직도 추운가 싶어서 모자도 씌우고 그랬지. 털모자로."
"와. 진짜 끔찍하다."
"그러니까. 말도 못 하는 애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난 겨울에 사람이 더울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못 했지."
하지만 엄마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다. 단순히 '엄마'여서 그런 게 아니다. 난 체질은 몰라도 외모를 비롯한 나머지 대부분의 특성을 엄마로부터 물려 받았다. 길든 짧든 계획을 세운 뒤에야 비로소 행동으로 옮기는 것, 인간관계에 있어 맺고 끊음이 확실한 것(엄마는 이걸 '너무 정확하다'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용케 왕따는 당하지 않는 것, 화낼 때의 온도가 뜨거움보다 차가움에 가깝다는 것, 미니멀리스트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도시 생활을 그리워한다는 것.
엄마는 고향을 그리워했다. 엄마는 청량리역에서 친구를 만났고, 성신여대 근처에서 재밌는 일을 벌이곤 했으며, 버스를 타고 성수대교를 자주 지나다녔다. 공부는 생각도 말고 돈이나 벌라는 외할아버지의 말에 열이 있는대로 받은 엄마는 선생님께 냈던 여상 지원서를 돌려 받은 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아는 오빠가 학생운동으로 재판 받는 모습을 보며 공무원 합격증도 찢어버렸다(물론 확인할 길은 없다). 특별하진 않지만 그렇기에 더 그리운 평범한 어린 시절. 그 기억이 묻어있는 서울이라는 도시는 엄마에게 항상 '돌아가고 싶은 곳'이었다.
그 탓인지 몰라도 작은 지방도시에서 나고 자란 내 마음 한구석에도 도시를 향한 열망 같은 게 늘 살아 있었다. 서울 가봐야 똑같다며 복잡하지 않은 김천이 최고라는 아빠에게, 고속터미널이나 서울역에 내리면 사람이 하도 많아서 숨이 턱 막힌다는 아빠에게 엄마는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나는 그런 데 가야지 숨이 탁 트인다"라고 말하는 엄마의 영향이었다. 그 때문일까. 비교적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게 됐을 때('덥다'고 얘기할 수 있게 된 때)부터 난 엄마와 여러모로 잘 맞았다.
그런데 최근 엄마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느낀 순간이 있었다. 그때 난 엄마와 내 앞에 놓였던 각자의 공간과 시간을 떠올렸다. 김천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서울로 거처를 옮기며 20대를 보내온 나. 20대 중반부터 오랫동안 김천에서 지내온 엄마. 나의 서울살이는 이제 겨우 2년을 넘겼지만 지하철 노선이나 주요 번화가 지리 같은 건 당연히 엄마보다 내가 더 잘 안다. 서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대화의 주도권은 점점 내게 넘어오고 있었다. 그 속도는 더 빨라질 게 분명해 보였고. 게다가 30년에 가까운 시간은 서울의 모습만큼 엄마도 많이 바꿔놨다.
엄마가 25년만에 다시 미용 가위를 들고, 개명을 하고, 바꾼 이름을 내건 미용실을 열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러한 변화를 느끼던 시기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건 엄마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겠다는 계획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긴 순간이었다. 요즘 엄마는 전보다 자주 서울을 방문한다. 내가 아는 엄마 친구라곤 혜정이 이모뿐이었는데, 엄마는 서울에 한번 왔다 갈 때마다 새로운 친구,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 얘기를 해준다. 옛 동네는 물론 요즘 뜨는 동네도 부지런히 다닌다. 동창회도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서울에 다녀온 엄마는 어느 때보다 밝은 목소리를 낸다.
아마 엄마가 다시 서울 시민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엄마가 기억하는 서울은 이미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가 엄마의 서울을 되찾으려는 마음으로 자주 서울을 찾으면 좋겠다.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나고, 성신여대와 청량리 부근을 돌아다니며 '와 여기가 이렇게 됐구나' 하며 세월의 흐름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래서 엄마의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엄마가 살던 동네에 대한 얘기를, 그로부터 뻗어나온 엄마의 현재 삶에 대한 얘기를 계속 계속 들려줬으면 좋겠다. 엄마가 엄마 자신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꾸준히 볼 수 있다면 앞으로도 너무나 기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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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연
내 속도를 지키는 일
인천에서 서울로 출근하고 서울에서 인천으로 퇴근했으므로 하루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해를 바라보며 달렸다. 아침에는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저녁에는 저무는 해를 뒤쫓았다. 그날의 일정을 체크하느라 정신없는 아침과 달리 저녁에는 좀 더 편안한 마음이 된다. 모든 것을 '콘텐츠'라 부르며 '인풋'을 늘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직장인이지만, 퇴근길 지하철에서만큼은 비생산적이고 의미 없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되는 듯하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림역을 지난 열차는 지상으로 나온다. 오른쪽 창밖에는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자동차들이 보인다. 저마다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곤 했다. 어둑해진 하늘과 먼 거리로 인해 차종을 확인하긴 어렵다. 다만 그것들은 둘로 나뉜다. 지하철보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느린 차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달리는 빠른 차는 마치 영화 주인공 같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지 않았다. 내 속도를 지키는 일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동반한다고 생각했다. 외로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자기만의 속도를 찾아갈 준비가 된 것이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지만 어쨌든 하나의 트랙 위에서 함께하고 있는 이들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는 듯한 마음. 적정 속도는커녕 현재 속도조차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래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가보려고 한다. 지치면 좀 쉬기도 하면서. 마지막에 멈추는 바로 거기까지가 나의 세계겠지.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혼자 외로움에 몸부림치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다. 닿은 듯 닿지 않은 듯, 가까운 듯 먼 듯, 같이 가는 듯 따로 가는 듯 움직이는 반경 몇 미터 안의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멈추지 않게 해준다. 그러고 보니 한때는 나와 같은 속도로 움직이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같은 경험을 사이좋게 나눠가졌던 사람들. 그때의 기억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다 나만큼 멀리 왔을까.
병연
닭다리가 먼저냐, 가슴살이 먼저냐
치킨을 먹을 때면 두뇌가 풀가동된다. 어느 부위를 먹고, 어느 부위를 남길지 고민하느라 바쁘다. 1인 1닭이 안 되는 1인 가구라면 피할 수 없는 선택. 고려해야 할 변수는 두 가지다. 부위별 고유의 맛과 상태에 따른 맛. 예를 들면 나는 목과 다리를 좋아한다. 방금 튀겨 따뜻하고 부드러운 상태는 물론 완전히 식은 뒤 대충 데워 놓은 상태라도 꽤 맛있게 먹는다. 하지만 퍽퍽살은 남길 경우 대부분 버린다.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치킨 한 마리를 두 끼에 걸쳐 온전히 즐기기 위해 좋아하는 부위를 남겨야 할까? 퍽퍽살을 버리고 한 끼만 먹더라도 최상의 부위를 최상의 상태로 먹어야 할까? ​ 순살을 시키면 고민할 필요가 없지 않냐고? 맞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순살을 잘 먹지 않는다. 일정한 수준의 맛을 식사 내내 일관적으로 경험할 수 있지만 어쩐지 그건 안정적이라는 느낌보다 밋밋함으로 다가온다. 부위마다 제각각인 뼈 치킨이 굽이치고 휘감기는 강이라면 순살 치킨은 직강 공사로 쭉 뻗은 형태를 갖춘 강이라고 할까. 거기엔 어떤 기승전결이나 희로애락도 없다. 그저 먹는 경험을 매끈하게 통과해낼 뿐이다. 좀 더 의미부여 해볼까. 순탄하게 흐르는 삶보다는 기쁨과 슬픔, 사랑과 이별이 반복되는 삶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순살 치킨이 아닌 뼈 치킨을 고르게 한다. ​ 그러고 보면 우린 항상 현재와 미래를 저울질한다. 크고 작은 선택들이 가져올 결과를 가늠하며 삶을 ‘계획’한다. 하지만 이제껏 경험한 바에 의하면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워 모든 계획이 물거품 되는 상황만큼은 막아보자는 자조적 농담도 수시로 던졌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대부분 이뤄질 수 없기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는데, 내 생각엔 이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 존 레논이 그랬다지. 삶이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에 일어난다고. 이런 이야기를 사랑한다.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야기. 누구보다 계획적으로 살았던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통찰. 존 레논조차 자기 뜻대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나의 여러 계획이 무너지는 상황에 한줄기 위로가 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계획은 삶의 일부여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계획에 빨려 들어가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치킨 먹을 때 고민 좀 줄여야지. 맛있는 부위는 오늘 먹어야지. 맛없는 부위는 볶음밥으로 먹든 어떻게 맛있게 먹는 방법을 찾아봐야지. 조금만 덜 게을러지는 것으로 계획 저편의 삶을 채워가야겠다.
병연
삼총사는 없다
유딩 때는 어쩐지 친구들이 좀 시시하게 느껴졌다. 아마 빠른 년생을 향한 갖은 구박과 핍박에 시달리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똑같이 여서 일곱 살에 불과한 애들이 시도 때도 없이 형, 누나라고 부르라며 약을 올리니 열이 받아, 안 받아? 아, 진짜 유치하게 왜 저래. 물론 유딩이 유치한 걸 이상하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래도 그때의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거의 확실할 것이다) 유치원에 친구가 별로 없었다. 파랑반 선생님이 제일 친한 친구였다. ​ 그나마 어울렸던 친구가 둘 있다. 걔들과는 주로 ‘지구용사 벡터맨’ 놀이를 했다. 유치원 뒷마당에서 우리는 영웅처럼 활약했다. 난 ‘벡터맨 베어’를 맡았다. 사실 난 베어를 별로 안 좋아했다. 변신 전 베어의 꼬불머리가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세 번째로 소개된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다. 대장이나 다름없는 ‘벡터맨 타이거’나 2인자 특유의 멋짐이 폭발하는 ‘벡터맨 이글’을 좋아했지만, 그건 다른 둘의 역할이었다. 은근히 짜증났다. 어린이에게 삼총사 중 3번이란 화룡점정보단 쫄병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 십 년쯤 지나 중딩이 됐지만 나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았다. 뚱뚱해서 뚱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딱히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것쯤 ‘캬캬캬’ 하고 웃어 넘길 줄 아는 아이로 자랐다.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펀지밥 ‘뚱이’인 이유도 그 별명 때문이다. 어쨌든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 교실, 저 교실 쏘다니며 다른 반 친구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보지 않아도 안다. 생활기록부엔 이렇게 쓰여 있을 것이다. “교우관계가 원만함.” 내 사춘기는 어쩌면 유딩 때 왔다 간 게 아닐까 싶다. ​ 그러던 어느 날 시험 공부를 하러 갔던 시립 도서관에서 우연히 타이거와 이글을 만났다. 우리는 유치원을 졸업하며 각기 다른 초등학교로 진학했고 당연히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타이거와 이글은 같은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이들은 함께 시험 공부를 (핑계로 밤 늦게까지 놀러) 다닐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걔들은 반가워하며 내 핸드폰 번호를 받아갔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서로 연락을 주고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가끔 상상한다. 나도 타이거와 이글이 다녔던 중학교에 배정 받았다면 유년기의 우정을 다시 이어갈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관계에서 내가 얻어갈 수 있었을 만한 것들을 하나씩 떠올려봤다. 즐거움, 위로, 공감, 의지 같은 것들. 그런데 꼭 마지막에는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나도 타이거나 이글 역할을 맡고 싶었지만 삼총사가 되려면 베어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그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아쉬웠다. 나와 나머지 둘 사이의 은근한 거리감도. 그 관계는 오히려 아득한 유년기에만 머물러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 그러니까 아무래도 셋은 좀 불안하다. 혼자는 확실히 외롭고 둘은 그보다 좀 덜 외롭지만 셋은 경우의 수를 갖기 때문이다. 온전히 셋으로 존재하거나, 셋 중 둘에 속하거나, 셋 중 하나에 속하거나. 온전한 셋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니까 패스. 먼저 셋 중 하나일 때를 보자. 이때는 확실히 외롭다. 혼자서 하나일 때보다 더 외롭다. 왜냐면 인간은 보통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 때문에 괴로워지니까. '희망고문'이라는 단어가 그 모순성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널리 쓰이는 이유가 있지. 셋 중 하나의 입장에서 나머지 둘을 볼 때 느껴지는 무력함을 아는지? ​ 셋 중 둘이 마냥 편하단 건 아니다. 그냥 둘이면 몰라도 셋 중 둘이 되면 나머지 하나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신경 쓰지 않는 순간 그냥 둘이 된다). 비슷한 맥락으로 나는 해리포터와 헤르미온느와 론의 관계를 온전한 셋으로 보는 시각에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한다. 셋 중 둘이 부부인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관계의 기울기에 따라 해리가 난처해질 수도 있고(누구 편을 들지?), 외로워질 수도 있다(그래도 지니가 있으니까). 자, 이제 당신도 ‘이러나 저러나 인간관계에 있어 셋이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숫자’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