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on이 말하는 경험이란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가벼움을 느끼는 시대 요즘 인공지능이 대신 써주는 글이 대 유행이다. 글의 완성도가 뛰어나고 내용도 풍부하고 무엇보다 글을 써주는 시간이 무척 빠르다.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처럼 "딸깍" 한번에 수십 페이지의 글도 금방 쓰여지고 책 한권도 뚝딱 하고 나온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편리하고 빠르고 유용하기 만한 글쓰기를 통해 Bion이 이야기 했던 "경험"과 "배우기"를 할 수 있을까? 경험하는 주체와 배우는 주체가 인간인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지시한 AI가 학습을 한 주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나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비효율적으로 보이더라도 가능한 AI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경험과 배우기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디지털 시대에 문명의 혜택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를 위해, 신체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다. Bion에게 경험이란 정서적 경험을 의미한다. Bion은 그의 저서 배움에서 경험하기에서 그가 말하는 경험이란 인간이 체험하는 정서적 경험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경험에서 정서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나는 30대 중반이 되기까지 정서를 그렇게 중요한 요소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 감정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고, 코칭이나 심리상담 이론을 통해 정서가 인간에게 가지는 지대한 영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Wilfred Bion이 1900년대 초중반을 거치며 정서적 경험의 중요성을 이렇게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통찰력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서양의 철학자들이나 종교 전통에서는 감정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어 왔고 나 역시 이러한 가르침을 조금씩은 접해 왔지만 최근 마음 관리 영역에 설명하는 것들과 같은 얘기들일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이러한 괴리를 경험한 나는 괴리의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몸에서 일어나는 신체 반응을 정서라고 부른다. 최근 몇 년간 나는 한 가지 가설에 대해 마음이 쏠리고 있는데 그것은 소매틱 측면에서의 감정이다. Bion 역시 그의 책에서 심리치료 증상으로서 신체화 반응 또는 몸의 신호로서 신체적 반응에서 출발한 정서적 경험에 대해서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Bion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Somatic = Emotion 이며, 이것이 생생한 Experience 였다고 설명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Bion의 설명을 조금 적극적으로 해석해보면 몸에서는 어떠한 신체 반응으로서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에게 정서로서 경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정서적 경험은 사고하기를 통해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기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은 정신분석의 도움을 받아 사고하기 기능을 형성하는 것을 도움 받는다. 정서적 경험이 사고하기를 통해 배우기에 이르게 된다. 가끔 유명한 강사분들 중에 정서적 체험이 학습을 돕는다고 설명하는 분들의 얘기를 듣게 된다. 예전에 그러한 얘길 들으면 깊이 고민해 보지 않고 지나쳤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쩌면 그분들의 설명이 맞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매 순간 우리는 어떠한 행위를 하게 된다. 행위하지 않는 것조차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집중하지 않더라도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어떠한 쾌, 불쾌 경험을 수반하게 된다. 쾌의 경험만 추구하자는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우리 몸이 끊임 없이 어떠한 신체적 메시지를 보내고 우리의 뇌는 이러한 신호를 계속 어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을 하다가 잠시 눈을 3분의 1정도 감고 게슴츠레 한 눈으로 나의 몸에 이렇게 대화를 던져보자. "지금 느낌이 어때?" 그러면 어김없이 내 몸은 나에게 답변을 해 온다. "응 그러저럭. 조금만 평온하게 일하자. 우리를 위해서" 이와 같이 정서적 경험이 오롯이 나에게 체험되는 경험되도록 허용하자. 그 과정 중에 불현듯 어떠한 통찰이 나에게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 Wilfred Bion
- Junho 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