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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란 무엇인가 <독후감>
우리의 정신활동은 사고로 이루어 지는가 이미지에서 시작하는가, 이미지는 어떻게 바라보는가, 경험과 습관으로 투영하지 않나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보고도 우리는 이미 경험한 정보를 덧 대어 같은 것을 다시 감상 할 뿐 인 건 아닐까.
온라인 세상은 더 없이 확장되어 가고 방대한 양의 이미지와 정보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우리의 매너리즘을 깨워줄 수 있는 건 뭘까.
어딘가 모르게 노출되어 있는 정보화 시대의 삶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보다 익숙함에서 안도하고 싶어하는 건 아닐지,
책을 읽으며 이러한 생각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이제 이미지를 읽기를 그만두고 바라보라고 한다. 상식적이고 관습화된 의미 작용의 논리에 따른 읽어내기를 멈추고 이미지를 이미지로 바라볼 때 경험 된 적 없는 낯선 것이 출현한다는 작가의 말 처럼 일반적인 지각을 깨뜨리는 실재의 새로운 국면과 마주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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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초콜릿 바다
친애하는 슐츠씨 서평(박정우 2024.10.26. 회기 대체)
지난한 건 삶만이 아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 당연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일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 이 모든 것들에는 역경과 난관이라는 오솔길이 펼쳐져 있다. 자연스러운 중력을 거슬러 무언가를 고민하고 따져보는 데에는 부자연스러운 역학적 노력이 필요하다. <친애하는 슐츠씨>라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제목의 책을 펼친 데에도 그런 과정이 수반되었다.
미국 사회는 소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관성이 계속되면 인간의 존엄성, 생명, 도덕적 가치같은 것들은 형해화되고 만다.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인종 문제가 그것이고, 이를 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밀어붙여 증오 스피치를 하는 대통령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친애하는 슐츠씨와 데이비드 케이, 주디 휴먼 같은 인물들은 이런 미국 사회의 뉴노멀, 또는 아키타입에 경종을 올려준다. 오래된 미래를 바로 우리들에게서 찾으라는 메세지를 전달해주듯이.
미국 사회의 프리즘을 한국 사회로 전이할 수 있을까? 한국은 유행이 빠르고 소비가 빠르다. 명품 소비를 1인당 소득 기준으로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찌보면 기존의 가치관, 도덕 관념, 품위를 상실하고 '돈' 하나로 모든 가치를 일원화하는 기분마저 든다. 한국 사회에도 슐츠 씨들이 있을까? 친애할 만한 사람들이 널리 펼쳐져 있을까? 우리는 기존의 차별과 불공정함에 의문의 꼬투리를 댈 수 있는 용기를 가졌나? 돌아보고 침잠하고 묵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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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불안> 독후감

원래 불안을 잘 안 느끼는 성격이지만 최근들어 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번에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읽게 되어서 책에서는 어떤 걸 말할까 궁금한 상태로 읽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여러 불안에 대해 설명했는데 그 중에서 능력주의와 불확실성으로 인한 불안이 제일 와닿았다.
모두가 평등해지고 있는 사회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 표현해서 높은 지위나 하고자하는 것을 이뤄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불안감도 느낀다고 생각한다. 성공을 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는 사람들은 재능이 있거나 노력을 열심히 한 사람이고 실패한 사람은 재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은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해도 실패한다면 내가 재능이 없는걸까 생각되고 이거를 계속 해도 되는걸까 생각되면서 불안함을 느끼게 되는거 같다.
그리고 세계 시장의 흐름에서 직업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함을 느낀다. AI가 발전을 거듭하고 업무에서 AI를 점점 더 사용하게 되면서 나보다 더 잘하고 효율적인 AI가 미래에서는 나를 대체하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생긴다. 그래서 AI가 더 많이 발전하더라도 AI가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일은 무엇일까를 요즘 많이 생각하게 되는거 같다
책을 읽기 전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부정적인 감정이고 빨리 잊어버리거나 없애야되는 감정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책을 읽고 난 뒤에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마냥 부정적인 감정이지는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불안하기 때문에 더 노력하게 되고 더 꼼꼼하게 살피게 되기 때문에 불안한 감정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잘 컨트롤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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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독후감

이어령이라는 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대단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라스트 인터뷰라는 설명이 있어 죽음을 앞둔 대단한 분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주고 받을까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다. 인터뷰의 내용은 일상적인 대화같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질문하게 하는 내용들이었다. 편하게 대화하는 느낌의 책이라 좋았고, 여러 비유와 예시를 들어 말해주는 대화 방식이 좋았다. 알쓸신잡 같은 느낌의 프로그램을 좋아하는데 비슷한 느낌이 드는 책이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고 스스로 질문 던져보게 하는 말들이 많아 기억에 남는 말들도 많았다. 책을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고 재미없는 부분은 던져버리고 재미있는 부분만 두세번 읽는다는 말, 어른들은 다 안다고 착각하니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보고 어린아이처럼 사고해야 한다는 말, 손잡이 달린 인간으로 살으라는 말,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는 말,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말고 방황하라는 말. 이러한 말들에서 감명을 받고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럭셔리한 삶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삶이라는 말에 특히 꽂혀 부자가 되려고 돈을 쫒지말고 문화를 즐기고 친구들과 추억 쌓는 것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춰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념대로 살지 말고 방황하라는 말은 어떤 말인지는 알겠지만 신념없이 방황하며 사는건 어떻게 해야되는 건지 지금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할머니가 해주시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도 들고 인생의 스승님이라는 분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작가님처럼 나에게도 그렇게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심도 있게 나눌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작가님이 부러웠다. 앞으로 그런 분을 만날 수 있게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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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진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독후감

난민을 수용하고 난민과 같이 생활하게 되는 이야기가 유럽의 이야기이고 다른나라의 이야기 인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번 책을 통해 한국에서도 같은 사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민으로 한국에 정착하여 살게되는 사람들의 어려움과 갈등에 대해 여러 사람들의 입장과 시각에서 말해주는 책이라 더욱 좋았다.
책을 읽기 전에 난민으로 한국에서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한국으로 유학 오거나 생활을 하는 외국인들도 어려움과 불편함이 많을텐데 난민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게되면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같은 일이 생긴다면 어땠을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읽게 되었다.
나였어도 난민들이 한국에 와서 산다고 하면 응원하지만 그 난민들이 내가 사는 동네에 와서 같이 살게 된다면 특별기여자를 반대하시는 분들처럼 꺼려질 거 같다. 자의로 외국인들이 많은 곳으로 이사가는 것도 힘든데 강제로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같이 살아라고 한다면 당연히 거부감이 생긴다고 생각들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잘 융화될 수 있게 노력하는 사람들과 정부의 지원이 있다면 잘 융화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의 내용중에 인상 깊었던 부분은 특별기여자분들에게 너무 많은 예산으로 지원을 해준다는 불만이 있어 그에 대해 답을 해주는 말로 "세금을 낭비하는 것 같지만 달리 보면 미래에 대한 투자거든요. 그 아이들이 자라나서 세금을 낼 거고, 어쩌면 연금도 내주지 않을까요?"라고 하는 말이었다. 아이들이 올바르게 자라서 세금과 연금에 보탬이 되는 것도 좋지만 그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해 생길 사회적 갈등에 비하면 낭비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 공감 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정부의 지원도 정책도 중요하지만 곁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울산 특별기여자분들처럼 지식인분들이 아니라 교육받지 못한 분들이었다면 더 갈등이 많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누구든 포용하는 그런 마음을 더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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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영
독후감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는 말에 쉽게 읽어 내려가기 어려울 것 같았다. 흥미진진한 소설책을 단숨에 읽어내는 것과는 달리 천천히 곱씹으며, 음미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선생님은 삶과 죽음에 관해 논리적으로 예시를 들어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스스로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내어주셨다. 내가 80세까지 살아낸다고 했을 때, 아직은 죽음보다 삶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죽음에 대해 고찰해본 경험은 처음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나 가장 멀리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장례식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는 가끔 상상해본 적이 있다. 그 상상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필연적인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미리 연습하는 것이었던 것 같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하루를 더 값지게, 물 흐르듯 반짝반짝 흘려보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에게 지혜를 남겨주기 위해 전한 한 마디는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텍스트는 인간의 세 가지 부류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간은 개미, 거미, 꿀벌로 나뉘는데 간단히 말하자면 개미에서 꿀벌로 갈수록 주체적인 삶을 사는 인간을 뜻한다. 게더링 또는 트렌스퍼..
여기서 나는 내 삶을 스스로 핸들링하는 꿀벌인가, 어떻게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하루가 어떻게 채워졌는지 모른 채 창조에 급급히 살아가는 꿀벌이 될 것인가 또는 창조를 친구 삼아 가볍게 날아가는 꿀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 나가야 할 것이며 따라오는 질문에 대한 답은 후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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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원
'미래를 먼저 경험했습니다' 독후감
배지원
난민이란 존재는 마치 잊고있던 거스러미처럼 따끔했다. 분명히 한국사회에도 있지만 거의 호명되지 않는 사람들. 애초에 난민인정비율이 매우 낮은 것과 절차소요기간이 매우 긴 것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왜 우리는 자라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 의아했다.
난민은 다문화 사회와도 약간은 다른 영역인 것 같다. 다문화는 자발적 거주 또는 출산의 영역이라면, 난민은 비자벌적 거주이자 당장 돌아갈 수 없음이라는 비-존재 상태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비-존재는 분명히 있으나 있다고 알려지지도 보여지지도 드러나지도 않은 존재들을 의미한다.)
관광객으로서의 외국인, 타인종 또는 노동자로서의 외국인, 타인종을 제외하면 한국 사회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을 받아들일 도량이 없는 걸까, 여유가 없는 걸까? 우리끼리 파이 나누기도 바빠서?
개인적으로 한국은 인간이 인간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돕는 돌봄제도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경제 성장을 추구하고, 그것을 외치는 대통령을 뽑기를 반복해서 그런가, 복지는 단편적인 포퓰리즘을 제외하면 주요 의제로 딱히 올라가는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최하위에, 한국인 밑에 외국인, 외국인 중에서도 난민이 위치할 수 밖에 없는 걸까? 부족한 복지를 나누기 벅차서.. 더불어 정치인들도 표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니, 시민들이 반대하는 정책을 굳이 펼칠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난민을 위한 기본적인 주거, 경제, 문화적 지원이 보장되었으면 좋겠다. 원래 가장 밑의 존재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그 위의 모든 존재들이 혜택을 볼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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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초콜릿 바다
박정우 독후감(2024.9.28. 모임 회기 대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딩 시절 허세에 취해 읽었던 '디지로그'. 워낙 이전의 기억을 회고하다 보니. 남는 건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신조어의 결합이라는 사실뿐. 어떤 노년의 인사가 이 정도로 현재의 테크놀로지를 통찰할 수 있다니. 그 문학적 수사와 세계의 변화에 대한 예리한 감수성에 감탄했던 일이 떠오른다.
선생이 '돌아가신 건' 2022년 2월. 어언 2년이 훌쩍 지났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누군가의 삶에 대한 추모를 덧붙이지도 못했다. 그저 3인칭의 죽음일 뿐이었다. 회고도 성찰도, 추모도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번에 만난 '마지막 수업'이라는 표제의 책은 그의 마지막을 다뤘다. (2년 전 이맘때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선물받은 일이 있다. 책장 한켠에 고이 모셔 두었지만 읽을 여력을 내지 않았다. 선물 준 이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고 존중했기 때문에.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은 텍스트가 아니라 메시지였다. 그 사람이 전해준. 그래서 소중히 간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기도. 배울 점 많은 스승 같기도. 외골수에 본인의 지식만을 떠벌리는 교수님 같기도. 종잡기 어렵지만 한 인간의 생태이자 생애. 다소 지나침이 있더라도 한 인간의 그림자는 처연하다기 보다 총천연색 같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유한한 땅에 발 디딘 유한한 인간에게 허락된 건 시간의 흐름뿐이다. 우리가 가진 재화나 마음도 결국 유한의 땅에서 스러져 간다.
내 독서의 결론은 현재를 붙잡아야 할까Seize the day 아님 현재를 관조해야 할까Let it be에서 멈춘다. 지성에서 영성으로의 삶을 추구한 이어령 선생이라는 이정표를 오마주해 '지성에서 감성으로'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문학을 밀어냈던 내가 요즘 별안간 문학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고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미묘하게 변한 바람과 풀냄새도 신경쓰기 시작했다. 크로노스로 봤던 세상이 카이로스로 바뀐 것 같다. 영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는 나만의 해답은 바로 카이로스를 더 단단히 짊어지는 데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내 행복에 대한 가치관을 '공감이 되세요?'라는 말로 타인에게 되묻는 자가 있었다. 나의 유별남을 인정해 준 때문인지, 나의 고유성을 부각시켜 준 덕분인지. 그가 본인의 행복관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대로 동의해 주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당신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즐겁다고. 행복의 주관성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미 그의 크로노스적 세계를 지나왔다. 지나왔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카이로스에는 하늘이 있다. 바람이 있다. 햇살이 있다. 몽글몽글한 음악이 있다. 산미 있는 커피향이 있다. 마음에 파동을 그리는 책의 한 문장이 있다. 그리고 이런 취향을 벼리는 데 함께한 시간과 사람과 장소가 있다. 그 모든 과정에 기뻐하고 충만하고 감사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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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초콜릿 바다
친애하는 슐츠씨 서평(박정우 2024.10.26. 회기 대체)
지난한 건 삶만이 아니다. 진실을 마주하는 것, 당연한 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일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 이 모든 것들에는 역경과 난관이라는 오솔길이 펼쳐져 있다. 자연스러운 중력을 거슬러 무언가를 고민하고 따져보는 데에는 부자연스러운 역학적 노력이 필요하다. <친애하는 슐츠씨>라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제목의 책을 펼친 데에도 그런 과정이 수반되었다.
미국 사회는 소비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후기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자유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관성이 계속되면 인간의 존엄성, 생명, 도덕적 가치같은 것들은 형해화되고 만다.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을 대상으로 한 인종 문제가 그것이고, 이를 정체성의 정치학으로 밀어붙여 증오 스피치를 하는 대통령의 등장이 대표적이다. 친애하는 슐츠씨와 데이비드 케이, 주디 휴먼 같은 인물들은 이런 미국 사회의 뉴노멀, 또는 아키타입에 경종을 올려준다. 오래된 미래를 바로 우리들에게서 찾으라는 메세지를 전달해주듯이.
미국 사회의 프리즘을 한국 사회로 전이할 수 있을까? 한국은 유행이 빠르고 소비가 빠르다. 명품 소비를 1인당 소득 기준으로 하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찌보면 기존의 가치관, 도덕 관념, 품위를 상실하고 '돈' 하나로 모든 가치를 일원화하는 기분마저 든다. 한국 사회에도 슐츠 씨들이 있을까? 친애할 만한 사람들이 널리 펼쳐져 있을까? 우리는 기존의 차별과 불공정함에 의문의 꼬투리를 댈 수 있는 용기를 가졌나? 돌아보고 침잠하고 묵상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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