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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설교😌
[힘만 센 삼손] *잠깐묵상 | 사사기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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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삿 14:7)
사사기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사의 상태가 점점 안좋아집니다. 삼손은 사사기에 나오는 가장 마지막 사사입니다. 상태로 치면 최악의 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신 사사가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삶은 결함 투성이입니다. 특히나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성격은 삼손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여자만 보면 돌아가던 그 눈이 돌아가다 못해 빠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의 은사는 힘이었습니다. 힘이 은사라는 것, 특이한 은사이긴 합니다.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은사가 나타나는 현상이 은사의 동기나 목적을 과연 정당화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게 전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은사가 사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성경은 삼손의 삶을 통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종종 경험하게 되는 은사적 현상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정치 권력에만 해당되는 얘기일까요? 사람이 힘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가까운 주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힘이 셌습니다. 그러나 힘만 셌습니다. 삼손 이야기는 욕심 덩어리인 인간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이 인간을 어떻게 불행하게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에게 삼손같은 능력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삼손보다 나을까요?
어쩌면 현대인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삼손보다 더 큰 능력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이상 기후와 같은 현상들을 볼 때, 삼손의 이야기가 삼손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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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을 고용하는 믿음] *잠깐묵상 | 사사기 17장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삿 17:2) 미가의 어머니는 복과 저주의 기준이 명확했던 사람입니다. 돈을 잃어버리고는 상스러운 저주를 거침없이 퍼붓더니, 돈이 다시 들어오자 이내 평온함을 되찾고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따뜻한 축복의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삿 17:2) 이 어머니는 무당에게 내는 복채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다고 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기준은 입금처가 아니라 돈의 출처에 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 나온 돈인가? 이것에 대한 점검이 없다면 하나님께 드린 돈으로 우상을 만드는 모순이 생기고 맙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 17:13) 집에 신당도 있었겠다, 주문 제작한 신상도 도착했겠다, 이제는 제사장만 있으면 금상첨화였던 차에 우연찮게 레위인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위인을 자기 집안의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내 뜻대로 움직여줄 제사장, 내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줄 설교자, 내가 원하는 복을 빌어줄 영적 리더를 돈 주고 산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을 고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우상숭배적입니다. 하나님을 내 손으로 쥐고 흔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사기 17장은 미가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다큐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가 그저 그 시대 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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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픈 가시나무] *잠깐묵상 | 사사기 9장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14-15) 나무들이 모여서 나무의 왕을 선출하는데, 왕 후보에 오른 나무는 세 나무였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입니다. 나무들이 이 세 나무를 각각 찾아가서 나무의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하지만 세 나무 모두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고사합니다. 왕위를 거절한 이유는 세 나무가 다 같았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현재 충실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 삶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 군림하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소명과 사명을 이미 발견했기에 굳이 다른 나무들 위에 우쭐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가시나무가 나무들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시나무는 자기 그늘, 즉 자기의 수하에 들어오는 대상과 자기 수하에 들어오지 않는 대상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자기 편에 서지 않는 나무들을 척결과 청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요담의 이 비유는 타락한 권력 구조의 실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울만한 사람은 손사래를 치고, 세워지면 안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욕심을 내곤 합니다.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은 욕심이 없고, 가시가 잔득 돋혀 자질이 안되는 사람이 유독 열심과 욕심을 내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개는 꼭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야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높이 올라가고야 맙니다. 욕심이 없고 어질고,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주변을 살피는 시야가 넓은 사람들은 주로 낮은 곳을 자처합니다.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며 인격이 미숙하고 타인의 희생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윗 자리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강력한 하이라키 시스템은 다수의 성숙한 아랫사람이 소수의 미숙한 윗사람을 견디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조직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적 방법으로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악순환을 부추길 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을 피하셨겠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사랑만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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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인가? 복음인가?] *잠깐묵상 | 사사기 8장
'클리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학이나 음악, 영화 등의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뻔한 설정, 예측 가능한 전개, 틀에 박힌 대사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출생의 비밀이나 연인의 가족 간에 얽힌 원한, 위기의 순간 주인공이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 등이 있습니다. 음악에서는 2-5-1과 같은 전형적인 코드 진행이 클리셰에 해당합니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잘 통하니까 클리셰가 되었습니다. 진부하고 뻔하긴 하지만 클리셰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인기와 흥행을 보증하는 값을 톡톡히 하기 때문에 작가나 연출가들은 클리셰를 적절히 이용하여 작품을 만듭니다. 특히 대중 문화 속에서 클리셰는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대중 문화는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를 클리셰처럼 이용한다면 어떨까요? 메시지 본연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저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복음적 표현이나 성경적 표현을 이용하는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삿 8:23) 이 말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기드온에게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기드온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기드온 자신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심지어 금 에봇을 제작함으로서 그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 뿐만 아니라 종교적 권력까지 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닌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성도들의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나 장치들이 있습니다. 대형 집회의 찬양인도자들이 내뱉는 멘트, 박수를 유도하기 위한 제스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음악적 빌드업도 일종의 클리셰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 고통, 희생과 같은 개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분위기 띄우기 용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회 분위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성도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한 바울의 이야기는 헌신 설교의 예화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클리셰는 교회 문화에 익숙한 종교인을 만들고, 복음은 하나님과 친숙한 신앙인을 만듭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