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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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상속자] *잠깐묵상 | 로마서 4장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롬 4:13)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세상의 상속자’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는 언약을 바울은 '세상의 상속'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세상을 상속한다’는 개념은 고대로부터 여러 왕들과 제국들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등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으로부터 세상을 상속받아 다스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신적 명령을 수행하는 일환으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그들이 세운 질서와 정의라는 ‘복’을 피지배인들에게 수여하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살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신의 아들로서 로마라는 복음(euangelion)을 온 세상에 전하는 임무를 맡은 자들입니다. 실제로 ‘유앙겔리온’(복음)이라는 헬라어는 로마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나 황제가 즉위했을 때, 그 소식을 알리는 단어였습니다. 로마, 그것은 황제가 신으로부터 상속받은 세상이었습니다. 로마가 곧 복음이며, 로마의 통치가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로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로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며, 온 세상이 로마로 인해 복을 얻으리라" 이것이 바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로마를 향해 진정한 복음을 선포합니다. “로마는 복음이 아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전혀 다른 주(Kyrios)에 의한 새로운 질서였습니다. 세상의 상속자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상속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의 통치와 정의야말로 진정한 복음이요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바울이 헬라 세계에 외친 메시지였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는 로마를 거쳐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세상은 상속권 투쟁 중입니다. 돈에 의한 평화(Pax Capitalis), 핵 억지력의 평화(Pax Nuclearis), 힘에 의한 정의(Justitia Potentia)가 세상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합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상속권 양도가 종결되었으며 진정한 세상의 상속자가 곧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PPWIqSetgls?si=NWoJscnzhee8Fcpv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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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되어 구원받다] *잠깐묵상 | 사도행전 27장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을 만나 배를 걸매 이물은 부딪쳐 움직일 수 없이 붙고 고물은 큰 물결에 깨어져 가니"(행 27:41) 두 물이 합하여 흐르는 곳이란 견내량처럼 급한 조류가 형성되는 바다의 독특한 지형을 말합니다. 급한 조류에 의해 바울 일행이 탄 배의 이물이 암초나 모래톱에 걸린 것입니다. 물살이 얼마나 거셌던지 배의 고물은 물살을 버티지 못하고 파손되기 시작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뛰어내립니다. 그리고는 파손된 배의 파편을 붙들고 헤엄쳐서 육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구원의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구원’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배에 탄 사람들의 목숨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심지어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하실 것이니 안심하라고 확언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하나님이 배를 인도하시다가 마지막에 집중력을 잃어버리신 것일까요? 급류 속에서 배가 암초와 모래톱을 요리조리 피해가게 하신 후에, 섬의 해안가에 부드럽게 도달시키는 일이 하나님께 어려웠던 것일까요? 아니면 홍해를 갈라보신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바다를 가르는 방법이 기억나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것도 구원의 그림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가로막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구원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부서진 뱃조각을 의지하여 저 육지까지 열심히 발버둥 치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인생에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의 간증이 넘쳐나지만, 또 어떤 인생에는 배가 부서진 파편이 구원의 증거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홍해를 건넌 누군가의 경험을 부러워할 것도 없고, 뱃조각을 부여잡고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 그건 구원이 아니라고 경멸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탄 배가 부서질 수도 있고, 순조롭게 항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광풍을 잠재우실 수도 있고, 도리어 그 광풍으로 내 인생을 의도적으로 박살내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고 저것은 구원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가 만들어 놓은 구원의 프레임으로부터도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바다를 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바다를 헤엄쳐 건널 힘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 남은 사람들은 널조각 혹은 배 물건에 의지하여 나가게 하니 마침내 사람들이 다 상륙하여 구조되니라"(행 27:44)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7uipd--WxqY?si=23npB3rMm0Nm16VG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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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언어] *잠깐묵상 | 사도행전 21장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매우 조용히 한 후에 히브리 말로 말하니라"(행 21:40) 바울이 히브리 말로 말하자 사람들이 듣기 시작했습니다. 손짓으로 조용해졌던 군중이 히브리어 한마디에 더욱 조용해졌습니다. “그들이 그가 히브리 말로 말함을 듣고 더욱 조용한지라”(행 22:2). 바울은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말하는 사람입니다. 상대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말할 줄 아는 능력은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은사입니다. 듣는 사람을 중심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화법이기도 합니다. 구약 성경이 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을까요? 신약 성경은 왜 헬라어로 기록되었을까요?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AD 1세기경, 복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헬라어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장터에서 쓰는 아람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신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셨다는 사실, 창조주의 언어가 피조물의 문자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전율이 돋습니다. 성경의 가치는 고대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잘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 유물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경이 거룩한 책인 이유는 신비하고 영험한 느낌을 풍기기 때문도 아닙니다. 성경이야말로 온 우주에서 가장 겸손한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겸손한 언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의 뜻을 들려주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시고 제한하셨습니다.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시다 못해 말씀이 육신이 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만큼 상대의 언어로 말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의 화법, 겸손의 화법이야말로 성경의 거룩성입니다. 그렇게 기록된 성경을 진리라고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성경적일까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 14:19)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너무 교회 중심적이고, 신앙인 중심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읽고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고 합니다. 나는 얼마나 잘 번역된 그리스도인일까요?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ZZEX93rOk9g?si=5n8UDm3QcoGg_C2K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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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을 고용하는 믿음] *잠깐묵상 | 사사기 17장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삿 17:2) 미가의 어머니는 복과 저주의 기준이 명확했던 사람입니다. 돈을 잃어버리고는 상스러운 저주를 거침없이 퍼붓더니, 돈이 다시 들어오자 이내 평온함을 되찾고 부드러운 사람이 됩니다. 따뜻한 축복의 말을 아끼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삿 17:2) 이 어머니는 무당에게 내는 복채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다고 다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닙니다. 헌금의 기준은 입금처가 아니라 돈의 출처에 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 나온 돈인가? 이것에 대한 점검이 없다면 하나님께 드린 돈으로 우상을 만드는 모순이 생기고 맙니다.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삿 17:13) 집에 신당도 있었겠다, 주문 제작한 신상도 도착했겠다, 이제는 제사장만 있으면 금상첨화였던 차에 우연찮게 레위인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신 사람이라고 확신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레위인을 자기 집안의 제사장으로 고용합니다. 내 뜻대로 움직여줄 제사장, 내 입맛에 맞는 메시지를 전해줄 설교자, 내가 원하는 복을 빌어줄 영적 리더를 돈 주고 산 것입니다. 이렇게 제사장을 고용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우상숭배적입니다. 하나님을 내 손으로 쥐고 흔들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사기 17장은 미가의 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다룬 다큐드라마 한 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가 그저 그 시대 그들만의 이야기일까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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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만 센 삼손] *잠깐묵상 | 사사기 14장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삿 14:7) 사사기를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사의 상태가 점점 안좋아집니다. 삼손은 사사기에 나오는 가장 마지막 사사입니다. 상태로 치면 최악의 사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이 사람이 하나님이 부르신 사사가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삶은 결함 투성이입니다. 특히나 여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성격은 삼손의 아킬레스건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여자만 보면 돌아가던 그 눈이 돌아가다 못해 빠지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손의 은사는 힘이었습니다. 힘이 은사라는 것, 특이한 은사이긴 합니다. 우리가 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은사가 나타나는 현상이 은사의 동기나 목적을 과연 정당화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고 해서 그게 전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은사가 사용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성경은 삼손의 삶을 통해 지적하고 있습니다.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종종 경험하게 되는 은사적 현상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저 정치 권력에만 해당되는 얘기일까요? 사람이 힘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는 굳이 정치권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가까운 주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힘이 셌습니다. 그러나 힘만 셌습니다. 삼손 이야기는 욕심 덩어리인 인간에게 힘이 주어지면 그 힘이 인간을 어떻게 불행하게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만일 우리에게 삼손같은 능력이 주어진다면 우리는 과연 삼손보다 나을까요? 어쩌면 현대인은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삼손보다 더 큰 능력을 손에 넣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이상 기후와 같은 현상들을 볼 때, 삼손의 이야기가 삼손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 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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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되고픈 가시나무] *잠깐묵상 | 사사기 9장
"이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이르되 너는 와서 우리 위에 왕이 되라 하매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위에 왕으로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하였느니라"(삿 9:14-15) 나무들이 모여서 나무의 왕을 선출하는데, 왕 후보에 오른 나무는 세 나무였습니다.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입니다. 나무들이 이 세 나무를 각각 찾아가서 나무의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하지만 세 나무 모두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고사합니다. 왕위를 거절한 이유는 세 나무가 다 같았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목적에 현재 충실하게 잘 살고 있으며, 그 삶에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 군림하는 일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소명과 사명을 이미 발견했기에 굳이 다른 나무들 위에 우쭐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가시나무가 나무들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시나무는 자기 그늘, 즉 자기의 수하에 들어오는 대상과 자기 수하에 들어오지 않는 대상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자기 편에 서지 않는 나무들을 척결과 청산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요담의 이 비유는 타락한 권력 구조의 실상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울만한 사람은 손사래를 치고, 세워지면 안되는 사람이 그 자리에 욕심을 내곤 합니다. 인격과 실력을 겸비한 사람은 욕심이 없고, 가시가 잔득 돋혀 자질이 안되는 사람이 유독 열심과 욕심을 내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대개는 꼭 그 자리에 올라가겠다는 야욕으로 가득한 사람이 높이 올라가고야 맙니다. 욕심이 없고 어질고,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주변을 살피는 시야가 넓은 사람들은 주로 낮은 곳을 자처합니다. 독선적이고 고집이 세며 인격이 미숙하고 타인의 희생에 무감각한 사람들이 윗 자리를 자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강력한 하이라키 시스템은 다수의 성숙한 아랫사람이 소수의 미숙한 윗사람을 견디고 이해하는 방식으로 조직이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적 방법으로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악순환을 부추길 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왕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들을 피하셨겠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사랑만이 유일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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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인가? 복음인가?] *잠깐묵상 | 사사기 8장
'클리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학이나 음악, 영화 등의 예술 작품에 등장하는 뻔한 설정, 예측 가능한 전개, 틀에 박힌 대사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출생의 비밀이나 연인의 가족 간에 얽힌 원한, 위기의 순간 주인공이 극적으로 구출되는 장면 등이 있습니다. 음악에서는 2-5-1과 같은 전형적인 코드 진행이 클리셰에 해당합니다. 클리셰가 괜히 클리셰가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잘 통하니까 클리셰가 되었습니다. 진부하고 뻔하긴 하지만 클리셰를 잘 이용하기만 하면 인기와 흥행을 보증하는 값을 톡톡히 하기 때문에 작가나 연출가들은 클리셰를 적절히 이용하여 작품을 만듭니다. 특히 대중 문화 속에서 클리셰는 대규모의 인원을 움직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대중 문화는 그럴 수 있고 그래야 하지만, 교회가 복음의 메시지를 클리셰처럼 이용한다면 어떨까요? 메시지 본연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그저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복음적 표현이나 성경적 표현을 이용하는 부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삿 8:23) 이 말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이 기드온에게로 움직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기드온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는 기드온 자신이 왕 노릇을 했습니다. 심지어 금 에봇을 제작함으로서 그는 정치적, 군사적 권력 뿐만 아니라 종교적 권력까지 쥐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기드온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닌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성도들의 특정한 반응을 이끌어내는 표현이나 장치들이 있습니다. 대형 집회의 찬양인도자들이 내뱉는 멘트, 박수를 유도하기 위한 제스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음악적 빌드업도 일종의 클리셰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 위해서 십자가의 보혈, 고통, 희생과 같은 개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분위기 띄우기 용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회 분위기를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성도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한 것이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선교한 바울의 이야기는 헌신 설교의 예화를 목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클리셰는 교회 문화에 익숙한 종교인을 만들고, 복음은 하나님과 친숙한 신앙인을 만듭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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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거품] *잠깐묵상 | 사사기 4장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삿 4:1) 인간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것 같습니다. 탁월한 지도자 곁에 있거나 부흥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을 때는 뭔가 좀 변화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지도자가 부재하거나, 부흥의 분위기가 사그라들면 언제 그랬냐는듯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맙니다. 에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사사입니다. 에훗이 살아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80년간 평화를 누렸습니다. 13명의 사사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물한 인물입니다. 80년 동안이나 탁월한 영적 지도자와 함께 했다면 사람들의 영적 수준도 상당히 올라갔을 것 같은데, 에훗이 죽자마자 이스라엘은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사람들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립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다니는 동안 자신들이 뭐라도 된 것 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드러난 제자들의 실상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3년 동안 동거동락했던 예수님을 배신하는게 그렇게 쉬운 일일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도대체 3년 동안 그들은 뭘 배웠던 것일까요?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호언장담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십자가는 내가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이 산산조각나는 자리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내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 서는 것이 부담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대신 영적으로 고양된 느낌을 보장하는 여러 종교적 활동 뒤에 숨는 것을 선택하곤 합니다. 탁월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노라면 내가 마치 좋은 신앙인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이름 있는 교회에 다니면 내 신앙도 교회의 이름값만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십자가 앞에 서 봐야 압니다.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예배에 빠지지도 않고, 헌금도 하고 구제와 봉사에 열심을 쏟아도, 십자가를 맞딱뜨린 적이 없다면, 그 앞에서 내 실체에 처절하게 실망해본 적이 없다면, 내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이 그저 교양생활이나 고상한 취미생활 이상도 이하도 아닐 수 있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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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요구하다] *잠깐묵상 | 사사기 1장
유다 지파의 갈렙은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브론 남쪽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그런데 헤브론과 그 이남 지역은 정복에 욕심을 낼 만큼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질 때, 땅에 대한 우선권을 쥔 롯은 헤브론 반대쪽을 향했습니다. 선택권이 있다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땅이 헤브론이었습니다. 갈렙은 그런 땅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며 개척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갈렙은 자기 딸을 걸고 황무지 개척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결국 옷니엘이라는 장수가 기럇 세벨을 점령하고는 갈렙의 딸, 악사를 얻습니다. 이제 갈렙은 남부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사위를 따라 딸을 떠나보냅니다. 가장 척박한 땅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5) 딸이 샘물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 갈렙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심 아까워서 주기 싫었는데 마지 못해 샘물을 주었겠습니까? 윗샘과 아랫샘 뿐만 아니라 더 줄 것은 없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다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다 주고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부모에게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다 커버려서 더 이상 부모의 지원이 필요 없는 자식에게는 호주머니 속의 사탕이라도 꺼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케이던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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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나안 땅이었을까?] *잠깐묵상 | 여호수아 23장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이토록 위험한 땅인데, 하나님은 왜 자꾸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려 하셨을까요? 사실 가나안 땅은 황무지에 가깝습니다. 좋은 땅도 아니었고 발전된 땅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막 지역에 비해 목축하기 좋은 땅이라는 말도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땅의 비옥함을 선물하고 싶으셨다면 아브라함을 굳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발원지역입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라는 두 개의 강이 제공하는 비옥함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애굽은 어떻습니까? 나일강 문명의 발원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괜히 그 비옥한 땅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끌어내셔서 비교거리도 되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 땅에 보내시려는 의도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5장 16절입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고많은 땅들 중에서 가나안 땅이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가나안 땅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상태가 도를 넘었기 때문에 그 땅에 대한 징벌적 차원에서 히브리 민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전쟁을 어렵게 치러야 했던 이유입니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 전체가 일종의 사전 교육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하면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의 위험성을 거듭 강조했고, 죽기 직전까지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애시당초 풍요와 번영을 선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좁은 문, 좁은 길로 부르셨습니다. 전쟁터로 부르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우르나 애굽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은 물질적 풍요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나일강의 풍요로움을 선망하게 됩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 16:13)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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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내리기 전에 던진 질문] *잠깐묵상 | 여호수아 22장
가나안 땅은 요단강 서쪽입니다. 그런데 요단강 동쪽에 이미 자리를 잡은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므낫세의 반 지파입니다. 이 세 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단강 서쪽으로 넘어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이 끝난 후 다시 자기네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염려 섞인 당부를 합니다. 그 땅에 가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힘을 다해 계명을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모습이 여호수아 22장 초반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을 건너 돌아간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수 22:11-12) 요단 동쪽 사람들이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는 뉴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분노부터 하고 봅니다. 순식간에 온 회중이 집결할 정도로 그들의 분노는 맹렬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그런지 이해보다는 오해가 빠릅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쉽게 진단해버리고, 타인의 언행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며, 사회적 현상을 읽어내는 자신만의 프레임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중심성을 정당화 해줄 명분을 신앙 안에서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분노하며 실로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자기들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족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라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강화시켜줄 근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매일 기도하는 삶의 축복이란 섣부른 판단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행히도 강 동쪽 지파들에 대한 오해가 풀렸습니다. 칼을 꺼내기 전에 질문을 꺼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판단이 이미 섰더라도 잠시 미뤄두고 한 번 더 물어본다고 나쁠 것 없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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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절충안이 아닙니다] *잠깐묵상 | 여호수아 19장
땅을 누가 어디까지 소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에 있어 변함 없는 핫이슈입니다. 특정 지역을 두고 나라와 나라는 끊임 없이 다투고 있고, 한 국가 안에서도 부동산 정책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땅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는 19장 51절을 끝으로 땅 분배에 관한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수 19:51) 드디어 가나안의 토지 분배가 마무리 된 것입니다. 분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제비를 뽑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데 제비를 뽑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땅을 분배하는 일을 각 지파의 리더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과연 회의가 끝이 나기나 했을지 의문입니다. 좋은 땅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다가 자멸하지는 않았을까요? 결정사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끼리 세력을 규합하여 투쟁하지는 않았을까요?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당을 지어 여론을 몰아가던 광야의 습관이 어디 갔겠습니까? 하나님은 가나안 땅 분배가 인간의 정치적 결과물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정치란 개인과 집단이 가진 이기심들의 절충안입니다. 그런데 욕심은 절충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분배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비를 뽑게 하셨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 욕심과 계산과 판단을 완전히 접겠다는 자기 부인이자 신앙고백이 바로 제비 뽑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비의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절충안도 늘 불만입니다. 천국은 회의하고 절충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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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걸고 싸우다] *잠깐묵상 | 여호수아 15장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수 15:16) 기럇 세벨은 '책들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그곳이 어떤 성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도시의 이름으로부터 당시 가나안 땅의 지식과 정보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정복해야 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기럇 세벨 정복을 갈렙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여호수아 15장 16절입니다. 자기 딸의 혼사를 걸면서까지 기럇 세벨 정복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앞서 14절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수 15:14) 기럇 세벨에 도달하기 직전에 치렀던 전투가 기럇 아르바 전투인데, 이 기럇 아르바는 아낙 자손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아낙 자손이 누구입니까? 40년 전, 출애굽 1세대의 기를 꺾어 놓았던 거인족입니다. 가나안 정탐꾼 10명은 아낙 자손의 장대함을 보고 나서 자신들이 메뚜기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보지도 못하고 좌절을 맛보게 한 사람들이 아낙 족속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렙이 아낙 자손을 무찌른 일은 상징적이고도 기념비적인 사건입니다. 이 승전보는 가나안 땅 곳곳에서 전투를 치르고 있었던 다른 형제들에게 전해졌을 것입니다. ‘아낙 자손과 싸워서 이겼다’ 이 한마디가 모든 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지 않았을까요?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충천했습니다. 이 기세 그대로 몰아서 기럇 세벨로 돌진해도 됐을텐데, 갈렙은 굳이 딸의 혼사를 겁니다. 이것이 갈렙이 가나안 땅 전쟁에 임하는 자세였습니다. 그는 매순간이 최선이었습니다. 자기가 걸 수 있는 모든 것을 걸고 싸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나무 아래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감이 저절로 입 안으로 떨어지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혜라기보다 요행입니다. 진정한 은혜란 감이 열매맺고 익기까지 내가 땀흘리며 수고하고도 하나님이 다 하셨다고 고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진짜 은혜를 알면 요행을 바라지 않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답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마음을 다합니다. 갈렙은 은혜가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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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실하지만 얽매이지 않다] *잠깐묵상 | 여호수아 13장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수 13:1) 여호수아가 늙었습니다. 할일은 아직 많이 남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첫발을 딛을 때만 하더라도 여호수아는 자기 생애동안 정복 전쟁을 완수할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하지 못한 땅이 매우 많이 남았습니다. 그가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혼신을 다했지만 미수복지역이 남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을까요? 무리하지 않았을까요? 욕심 부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자기 왕국 건설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쉬움이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라도 이 영광스러운 일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 또한 크지 않았을까요? 모세도 자기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을 때 분노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대신에 다음 세대를 위해 신명기를 남겼습니다. 다윗도 자신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막으셨을 때,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들 솔로몬이 그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모든 건축 자재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일이 남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명으로 주신 일이라도 완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없든, 힘이 없든 최선을 다했지만 마무리할 여건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꼭 내가 거두어야 할까요? 내 기도의 응답을 꼭 내가 확인해야 할까요? 100여년 전에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의 씨앗을 뿌린 수많은 젊은 선교사님들 대부분은 열매를 얼마 보지 못하고 순교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후대 사람들이 그 열매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시간 관념이 달라지는 경험입니다. 일생을 사는 사람은 일평생 자기 소원 성취에 목을 매겠지만, 영생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꿈을 함께 꿉니다. 욕심이 아닌 열심을 낼 줄 알고, 충실하지만 얽매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과 내가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을 잘 구분합니다. 은혜가 족한 줄 압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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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당한 여호수아] *잠깐묵상 | 여호수아 9장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수 9:14-15) 길을 모르면 물어봐야 합니다. 일을 모를 때도 물어보면 됩니다. 한번 물어보면 될 것을 묻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여쭈어보지 않았던 것은 여호수아의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너무 강하고 담대했던 것일까요? 여호수아는 무슨 자신감으로 혼자 결정했을까요?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이다"(수 1:7)라고 하셨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려면 내가 길을 잘 가고 있는 것인지 항상 물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묻지 않아서 치우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되는 일들도 있긴 합니다. 모세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 지파의 가나안 땅 동편 정착에 대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 와서 결제를 받으라고 요구하시는 깐깐한 상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싶으면 일단 기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수아는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브온 주민의 곰팡이 핀 떡과 찢어진 가죽 부대, 낡은 옷과 신발을 보고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말투와 표정에서 진정성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마치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에게 떡과 가죽 부대, 신발과 옷을 보이며 믿음을 요구한 것처럼 세상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믿음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몇가지 정황만 주어지면 쉽게 확신에 도달하곤 합니다. 증거 몇 개만 있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왜 사기를 당하겠습니까? 믿을 만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기행각은 언제나 신뢰를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이란 내 경험과 이성과 느낌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곧 나에 대한 불신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메시지에 대한 의심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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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공불락의 성] *잠깐묵상 | 여호수아 7장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정복했습니다. 말이 안되는 방법으로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성 주변을 뱅글뱅글 돌기만 하다가 소리 한번 질렀을 뿐인데 거대한 성이 무너졌습니다. 여리고 성은 외벽의 두께만 2m이고 높이가 7m입니다. 외벽 안쪽으로는 14m의 내벽이 또 있었다고 합니다. 난공불락의 요새가 무너진 것입니다. 눈앞에 벌어진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고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모두가 승리를 자축하고 있을 동안 아주 은밀한 계획을 혼자 실행에 옮기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아간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말씀하셨지만 아간은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에 손을 댑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하더라"(수 7:21) 아간이 손을 댄 장물 리스트입니다.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의 금입니다. 시날은 ‘쉬느아르’라는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진 지역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입니다. 그러니까 시날에서 만든 외투라는 건 당시 최고 명품 자켓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에르메스 자켓 정도라고 보면 될까요? 그리고 한 세겔이 10g 남짓이니까 아간은 은화 200개와 500g 골드바 하나를 슬쩍 한 셈입니다. 은화나 골드바는 언젠가 표시 안나게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옷은 어디 입고 나가면 단번에 티가 날 옷인데, 입지도 못할 옷이 그 순간에는 그렇게 갖고 싶었을까요? 거대한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는 중에도 한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는 탐욕의 성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진정한 난공불락의 성은 여리고가 아니었습니다. 여리고는 하루에 일곱 번도 돌 수 있는 성이었지만 우리 안의 욕심은 평생을 둘러봐도 시간이 모자랄만큼 크고 광활하지 않습니까? 욕심의 끝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인간이 우주의 끝을 논하는 이 시대에도 욕심의 끝은 아득할 뿐입니다. 잠언 16장 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오늘도 욕심이 내 인생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나님이 내 마음을 다스려 주시길 기도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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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으로 받은 땅] *잠깐묵상 | 여호수아 1장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 1:3-4) 여호수아서는 본격적인 땅 정복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기 위한 이스라엘의 고군분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성경에서 ‘땅’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창조입니다. 종말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것이 새 창조입니다. 첫 창조와 새 창조 사이의 시간, 태초와 종말 사이의 시간을 역사라고 합니다. 성경적 관점에서의 역사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하늘이 땅을 정복하는 이야기가 태초와 종말 사이의 구원사를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첫 명령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아담 또한 흙으로 지어진 땅의 존재였기에 존재론적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7) 둘째 아담인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사건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또한 그분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하신 후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땅의 본질은 혼돈과 공허입니다. 태초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습니다(창 1:2). 하늘의 본질은 질서입니다. 혼돈과 공허를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질서가 생겼습니다. 카오스가 변하여 코스모스가 된 것입니다. 공허하고 혼돈한 땅에 빛이라는 질서를 부여하신 창세기 1장의 창조가 특정한 역사적 공간 속에서 현실화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여호수아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땅'이란 경제적 가치로 평가되는 부동산 개념이 아니라 하늘의 씨앗이 심기어져서 열매 맺는 공간으로서의 땅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업으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어디인지 생각해 봅니다. 그 땅을 어떻게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까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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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력보다 초심이 필요한 일] *잠깐묵상 | 신명기 34장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 34:7) 기력이 다하여 생을 마감하는게 일반적입니다. 몸이 더 이상 생명을 유지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내쉰 숨, 다시 들이쉬지 못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아직 눈의 총기가 가득한데 하나님이 불러가십니다. 모세 스스로도 더 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신 3:25).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에 충분한 기력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멈추어 세우시고는 그만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므리바에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을 대리하는 일이 그에게 너무 익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데 있어 도가 튼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오랜 시간 꾸준히 하다보면 익숙해지곤 합니다. 처음 할 때보다 일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도가 트는 경우도 있습니다. 달인의 경지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명감과 익숙함은 상극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도가 튼다는 것은 위험신호일 수 있습니다. 할만하다 싶은 생각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떨림이 퇴색되기 때문입니다. 40년 전, 80세의 모세는 하나님께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자격도 없고, 그럴 만한 힘도 없고, 파라오를 설득할 말주변도 없고, 자신도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못하겠다는 모세를 세우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셨다면 능력있는 사람을 세우셨을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에 있어 일의 효율을 따지셨다면 굳이 리더십 교체를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도가 터서 달인의 경지에 오른 모세를 계속 사용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력이 남아서 더 할 수 있다고 하는 모세를 멈추어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힘이 없다고 못 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할 수 있고, 불러가시면 그만해야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나의 쓸모를 평가하는 분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산산조각난 유리파편도 예술가의 손에 들리면 스테인드 글라스가 됩니다. 인생이 깨어지는 것도, 붙여지는 것도 다 하나님의 기획 안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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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들었던 그 생각] *잠깐묵상 | 신명기 30장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흩어져서 사는 동안에, 당신들의 마음에 이 일들이 생각나거든"(신 30:1, 새번역) 살다가 문득 든 생각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왜 그런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라며 자기 인생 이야기를 풀어 놓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평소같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생각인데 그날따라 머릿속에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번의 생각 때문에 삶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그랬습니다. 정신없이 살던 중에 문득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집 생각이 나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이미 틀렸어'라는 생각에 의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상쇄될 수도 있었을텐데, 왜인지 집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같은 진공 상태라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입자와 반입자의 쌍생성 쌍소멸 현상이 관찰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 우리의 내면도 오만가지 생각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생성되었다가 소멸되어야 할 생각이 영문도 모르게 소멸되지 않고 가슴 속에 남아서 새 삶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기억이 난 것도, 생각이 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해 들어오신 작지만 분명한 흔적이 바로 그 생각, 그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편, 사탄도 생각을 틈타고 들어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사탄이 뿌린 생각의 씨앗은 가룟 유다의 욕망과 허영심을 먹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종류의 씨앗이 섞여 뿌려진 밭과도 같습니다. 좋은 씨앗만 싹을 틔었으면 좋겠지만 오만가지의 씨앗이 오늘도 싹을 틔었다가 시들곤 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내 생각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가꾸시고 경작하시기를 매일 기도할 뿐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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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도 짓는 죄] *잠깐묵상 | 신명기 28장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7) 아무리 먹을게 없어도 그렇지,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안타깝게도 신명기의 이 저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고스란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 28장의 내용은 축복과 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주가 축복보다 다섯 배나 많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해서 절대로 저주의 길을 택하지 않을 법한 것들입니다. 독극물이 담긴 병에 강력한 경고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손 대서는 안될 것들에 관하여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이 아니라 기어이 독을 선택하고 맙니다. 인간은 몰라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안되는 줄 알고도 짓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짓고 싶은 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죄를 짓고 싶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상황만 갖춰지면 죄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유혹을 바라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입장에서 유혹이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변명할 거리를 서비스로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00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크게든 작게든 망해봐야 인지의 차원에서 깨달음의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정신 차렸듯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는 길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악을 선택하고 마는 일그러진 본성에 하염없이 절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그런 나의 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복된 길이기도 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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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희년] *잠깐묵상 | 레위기 25장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빚이 50년마다 초기화되는 경제 제도입니다. 희년은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속죄일이란 지난 1년간 쌓였던 모든 죄가 해결되는 날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날로부터 빚 탕감의 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빚 해결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유의미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러한 희년 정신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구절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해결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해결해 주소서"가 됩니다. 죄와 빚이 각각 서로에게 메타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시행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눅 4:18-19).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행하신 희년은 제도성을 띄지 않는다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으로, 빚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빚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전체 통화량보다 대출액이 항상 많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빚을 창출해야만 부가 창출됩니다. 경제 성장률이라는 것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의미하고,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것도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의 순환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는 아닙니다. 돈에 집약된 인간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스러운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경제의 선순환과 탐욕의 악순환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대 속에 희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희년 구현의 희망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년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희년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냄새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이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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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양과 설교 속에 전시된 하나님] *잠깐묵상 | 레위기 16장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레 16:23)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의 옷차림과 다른 옷차림으로 지성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사장이 입어야 하는 옷차림 규정이 레위기 16장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단 한번도 에봇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제사장은 평소에 세마포 속옷 위에 에봇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봇의 원단에는 푸른색, 자주색, 붉은색, 금색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슴에는 열두 종류의 보석이 달려 있고, 양 어깨에도 호마노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제사장 관복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이 에봇을 벗은 채 세마포로 된 옷만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머리에도 세마포 관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마포만을 두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대개는 시체를 세마포로 두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은 세마포 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레위기의 동물 희생 제사는 단순히 동물만 죽이는 도축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동물의 죽음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레위기가 기록되었다면 소나 양, 염소 대신에 반려 동물의 희생 제사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반려 동물이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려 동물이 나를 대신해서 희생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예배의 의미가 훨씬 깊이 체감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부인 없이 위로와 회복의 감동만 있는 예배는 공연이나 전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찬양과 설교 속에 멋있게 전시된 하나님을 관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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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 *잠깐묵상 | 출애굽기 26장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출 26:1) 성막은 총 4겹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덮히는 막은 가늘게 꼰 베 실로 짠 천이었습니다. 이 천에다가 푸른 색, 자주 색, 붉은 색 실로 천사 무늬를 정교하게 수놓았습니다. 안쪽에서 두 번째 막은 염소의 털로 만들었고 별다른 무늬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 막은 숫양의 가죽이고 가장 바깥쪽의 네 번째 막은 해달의 가죽입니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가장 안쪽의 성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방직기가 있어서 좋은 원단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에 천이라는 것은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만큼 천이 귀했다는 것입니다. 길이 12.6m, 너비 1.8m짜리 천을 5개 만드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할까요? 게다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천사 무늬를 수놓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유일하게 유채색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성막 공정 중에 가장 세심한 디테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을 들여서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가 염소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을 덮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아름다운 부분을 아무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안쪽을 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내밀하고 은밀한 곳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삶에 성막 하나 잘 만드는 일입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곳을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할까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라야 내면이 가꾸어집니다. 왼손이 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겉치장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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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를 하루치만 주시는 이유] *잠깐묵상 | 출애굽기 16장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출 16:19-20) 하나님은 광야 40년 동안 단 한 번도 만나를 내려주지 않으신 날이 없었습니다. 만나를 먹느니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서 노예 음식을 먹는 편이 낫겠다고 사람들이 망언을 일삼았을 때, 그때도 하나님은 만나 공급을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노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이 아닙니다. 잘했다고 더 받을 수 있거나 잘못했다고 깎이거나 하는 인센티브가 아닙니다. 누구나 다 똑같이 누릴 수 있는 은혜입니다. 그런 만나에 의외의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 치고 너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만 지나면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났습니다. 기왕에 주시는 것, 방부처리를 잘 해서 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금요일에 내리는 만나는 이틀을 둬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증거궤 항아리에 넣어둔 만나는 수십 년이 지나도 끄떡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만나의 유통기한을 늘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 간단한 일이었을텐데 하나님은 일부러 만나를 썪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나의 공급 목적에는 식용 외의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출 16:4) 만나는 은혜인 동시에 시험지였습니다.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았습니다. 약간의 산도(pH)변화에도 색이 변해버리는 리트머스 용지처럼, 만나는 약간의 욕심에도 상태가 변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내면의 보이지 않는 욕심을 체크할 수 있는 측정기로 만나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또 다른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허락하신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이지만 욕심이 들어가는 순간 부패가 시작됩니다. 우리 삶의 결핍은 은혜가 부족해서일까요? 욕심이 들어가니까 늘 부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욕심 부리다가 잃어버린 은혜가 적지 않습니다. 감사와 절제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천연 방부제입니다. 은혜는 만나처럼, 햇살처럼, 공기처럼, 내리는 비처럼 모든 이에게 언제나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다만 욕심 부려서 은혜를 상하게 하는 사람과 감사와 절제로 은혜를 누리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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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1 마크최 목사님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다' 설교중
'좋은말 할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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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기록하고, 기록을 기억하다] *잠깐묵상 | 출애굽기 13장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여호와께 절기를 지키라“(출 13:6) 만약에 모든 기억을 잃고 단 몇 가지만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떤 기억을 간직하시겠습니까?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의 기억은 잃어버리고 삽니다. 작년 365일, 8750시간을 모조리 기억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작년 한 해의 기억 조각을 전부 이어 붙인다 한들 800시간에도 한참 못미칠 것입니다.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선택적이고 부분적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순간에 펜을 들기도 하고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변성과 휘발성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현재를 느끼는 온도가 달라집니다. 미래에 대한 질감이 달라집니다. 추억을 안고 사는 사람과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집트 430년의 노예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만한 기억입니다. 그러나 트라우마가 추억으로 바뀌는 사건이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막 출애굽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한 가지를 요청하십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기억하고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억이 광야를 걸어갈 힘이 될 것이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기억하기 위해 그들은 매년 절기를 지켰습니다. 무교절을 지키고 무교병을 구워먹었습니다. 무교절 예식을 거행할 때면 마치 그 때의 구원 현장에 서있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무교병 굽는 냄새를 맡고 맛을 볼 때면 그 때의 기억이 되살아 났을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은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기억하라고 주신 자리가 기도의 자리입니다. 구원 받은 감격을 회상하고 은혜 받으며 흘린 눈물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 기억이 희미해지면 하나님 나라와 의가 막연해집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기억을 너머 기록이 필요합니다. 기록되지 않은 기억은 기억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교절은 무엇이고 나의 무교병은 무엇입니까?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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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없는 것을 구하는 기도]*잠깐묵상 | 출애굽기 6장
"모세가 여호와 앞에 아뢰어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도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출 6:12)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말 한마디에 원수지간이 되기도 하고, 말 한마디에 미움이 눈녹듯 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말입니다. 말이 가진 힘과 영향력을 무시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모세도 이것을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파라오 앞에 서기가 더 두려웠을 겁니다.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파라오를 설득하기는 커녕 자신의 말실수 때문에 도리어 일을 크게 그르칠까봐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출 4:10)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출 6:12) "나는 입이 둔한 자이오니 바로가 어찌 나의 말을 들으리이까"(출 6:30) 모세의 이런 걱정은 타당해보입니다. 파라오 앞에서 어버버했다가 일을 그르치면 안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파라오의 마음을 돌려세워야 하는 중대한 일에 왜 입이 둔한 모세를 세우셨을까요? 파라오는 애시당초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말 잘하면 될 일, 조리있게 설득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파라오는 사람이 죽어나가야 마음을 고쳐먹을까 말까 한 사람입니다. 말로 해서는 안되는 사람입니다. 파라오를 설득하는데 언변 능력은 없어도 되는 능력치였기에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도 모세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굳이 없어도 되는 것인데 꼭 있어야 한다며 그거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나야말로 말이 잘 안통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말씀하시는데 못 알아들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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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어긋나서 받은 축복] *잠깐묵상 | 창세기 48장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손을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창 48:14) 유대인들에게는 오른손이 중요합니다. 그들에게 오른손이란 존귀와 영광과 축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의 오른손은 언제나 장남을 향했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임종 직전에 오른손을 장남의 머리 위에 얹고 축복하는 행위는 아버지의 영적, 경제적 권위 모두를 장남에게 상속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야곱의 임종때가 가까워지자 요셉은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야곱 앞에 섭니다. 요셉은 야곱의 오른손 앞에 장남 므낫세를, 왼손 앞에 차남 에브라임을 세웠지만 야곱은 손을 바꾸어 얹습니다. 야곱의 오른손이 차남에게 올라간 것입니다. 축복 받을 자격이 없는 차남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도 오른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손이 늘상 향하는 곳이 있습니다. 돈이 되는 일, 정보가 모이는 곳, 이익이 될만한 사람에게 언제나 손길이 갑니다. 사람들의 손길이 많이 닿는 곳을 보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손을 뻗을 만하니까 손을 뻗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도 오른손이 있습니다. 구원과 평안, 은혜와 자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오른손을 뻗을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오른손은 당신의 독생자가 아니라 우리를 향했습니다. 손을 엇바꾸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엇갈린 자리, 그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손이 엇갈린 사건,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세상의 오른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 오른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나에게 왼손을 내밀었다고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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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지나 화해로] *잠깐묵상 | 창세기 42장
https://youtu.be/tAgZI9BSNAI?si=LujaNBSN5pOUb0hb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창 42:21) 미운 사람이 사라질 때 미움도 함께 사라지면 참 좋겠지만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진다고 해서 내 안의 미움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이 사라지면 맘 편할 줄 알았던 형들은 22년이란 세월동안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 미움을 해결할 기회도 함께 사라져버릴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입니다. 기회가 사라진 자리엔 후회가 남습니다. 다행스러운건 후회하고 있던 그들에게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화해할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용서는 혼자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22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요셉은 이미 형들을 용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화해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했던 그가, 나를 미워했던 그가 내 눈 앞에 있어야 가능한 것이 화해입니다. 형들에게도, 요셉에게도 이제 그 기회의 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습니다. 화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먼저 알아차린 쪽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이 기회를 지혜롭게 붙잡습니다. 그리고 형들에게도 이 시간이 기회일 수 있도록 조심스레 다가갑니다.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형들이 알게 되었을 때 형들이 느껴야 할 죄책감과 수치심, 공포심이 어떨지를 알기에 요셉은 먼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형들을 대합니다. 형들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3일 동안 갇혀서 지난 세월 숨겨왔던 미안함과 후회에 직면하고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사실 이것은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를 너머 하나님과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자마자 그 죄를 해결할 방법부터 제시하셨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미 끝난 일입니다. 하나님에게 등돌린 인간을 용납하시기로 하나님은 이미 결정을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나의 죄성에 직면하고 하나님의 용납을 나도 용납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 3:15)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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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섭과 일임의 적절한 균형] *잠깐묵상 | 창세기 34장
"그러면 그들의 가축과 재산과 그들의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들의 말대로 하자 그러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주하리라"(창 34:23) 세겜은 정착민들이었고 야곱의 가족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유목민들이 세겜 땅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영주권을 발급해 주자고 세겜이 세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가문이 자기네 땅에 정착하게 되면 세겜성의 경제 규모가 늘어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주장의 근거였습니다. 기업으로 치면 M&A 제안입니다. 세겜성의 자산 규모, 경제 규모가 커진다는 말에 솔깃했던 세겜성 남자들은 야곱측의 요구대로 모두가 할례를 받습니다. 추장 세겜이 이렇게까지 일을 밀어 붙이는 이유가 그저 아내 한 명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세겜성 주민들은 알리 만무했습니다. 3일 뒤에 자신들에게 무슨 재앙이 닥칠지 모른 채, 그들은 추장의 말을 수용합니다. 지도자의 결정과 그것을 아무 검증 없이 수용한 주민들이 빚어낸 참담한 결과를 우리는 창세기 34장으로부터 읽습니다. 말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모두를 위한 것이다‘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세겜 개인의 탐욕이 서려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세겜성 주민들의 목숨을 담보 삼은 것입니다. 세겜성 주민들이 맞이한 이번 비극은 주민들이 적극 나서야 할 일을 지도자에게 일임했다가 발생한 참상입니다. 동시에 이번 일은 아버지 야곱이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을 아들들에게 맡겼다가 생긴 참상이기도 합니다. 나서야 할 아버지가 나서지 않고 나서지 말아야 할 아들들이 나서서 피바람이 불고 말았습니다. 야곱 가문의 입장에서 보면 아들들이 아버지를 믿지 못해 생긴 비극이고, 세겜성 입장에서 보면 추장을 너무 믿어서 생긴 비극입니다. 지도자를 믿고 맡겨야 할 일인데 사사건건 간섭하다가 배가 산으로 가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반대로 각자가 목소리를 내야 할 일인데 리더를 믿고 맡겼다가 배가 침몰하는 일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34장을 묵상하며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 봅니다. 참여와 일임의 적절한 균형을 찾아가는 나라이기를 기도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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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밝은 아버지, 딸의 어두운 그늘] *잠깐묵상 | 창세기 31장
라반은 리브가의 오빠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게는 외삼촌인 동시에 장인인 셈입니다. 야곱이 형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향할 때, 그는 아마도 외삼촌 라반이 자기에게 다정했던 엄마와 비슷한 성정의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라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조카가 자기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자 라반은 야곱에게 품삯을 제안했습니다. 야곱이 아무 대가 없이 성실하게 일을 해주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으로 임금 제안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야곱을 정식적으로 부려먹기 위한 빌드업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야곱의 처지와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야곱에게 지극히 불리한 근로계약을 체결한 횟수만 지난 20년간 열 번에 달했습니다. 라반이 성사시켰던 최고의 딜은 둘째 딸을 연모했던 야곱의 순정을 이용해서 야곱의 노동력을 후려쳤던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일로 라반은 14년 동안이나 아무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야곱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시집 못갈 것 같았던 첫째 딸의 결혼마저도 단번에 해결해버립니다. 성경에 라반이 처음 등장했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신부감을 구하러 나홀의 동네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의 종을 영접했던 사람은 리브가의 아버지가 아니라 오빠 라반이었습니다. 원래 딸의 결혼에는 아버지가 관여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오빠가 왜 그토록 적극적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종에게서 돈 냄새를 맡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사례를 알고 그때의 라반을 다시 보니 그때도 라반은 여동생의 결혼을 수익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던 그의 인생의 결산이 무엇입니까? "라헬과 레아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아버지 집에서 무슨 분깃이나 유산이 있으리요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우리의 돈을 다 먹어버렸으니 아버지가 우리를 외국인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창 31:14-15) 두 딸의 평가, 이것이 라반이 최선을 다해 살았던 삶의 결산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형통이란 무엇일까요? 인생 잘 산다는건 어떤 것일까요? 세상이 점점 돈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색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힘에 밝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밝히는 것이 진정 우리 인생을 밝혀줄 수 있을까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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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ild 5. 박지범 선교사님 @리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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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에 시작된 인테리어 공사] *잠깐묵상 | 창세기 28장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창 28:11) 이날, 야곱의 인생에 해가 졌습니다. 이날 졌던 해는 20년 후, 야곱이 얍복나루를 건너 고향으로 돌아올 때 다시 뜹니다(창 32:31). 장장 20년동안 야곱의 인생은 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해가 떠 있을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야곱이 봤다는 것을 강조하는듯 창세기 28장 12-13절은 '보다'를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합니다. 야곱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난생 처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16) 이 말을 듣는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하루 아침에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쫓겨가는 야곱이었습니다. 제대로 묵을 곳도 없이 길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처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5-16) 한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장자권에 눈이 멀어 정작 봐야할 것을 못 보고 살아온 야곱은 그때서야 하나님을 봅니다.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창 28:18-19)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 붙였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하나님의 집으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집으로 삼으신 야곱의 인생 내부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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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하나님이 하셨을까?] *잠깐묵상 | 창세기 27장
"이삭이 그의 아들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네가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그가 이르되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로 순조롭게 만나게 하셨음이니이다"(창 27:20) 거짓말 한번 은혜롭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셨다니요. 야곱은 어머니와 짜놓은 사기극을 들키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팝니다. 순발력이 좋아서 머뭇거림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말, 우리도 신앙생활하며 많이 듣고 많이 하는 말입니다. 동일한 표현에 여러 용례가 있습니다. 자기 자랑을 실컷 늘어 놓고는 겸손한 척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는 의미로 '이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이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도들에게 헌신과 헌금을 요구할 때도 '이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될대로 되라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하실겁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동의는 되지 않지만, 교회 분위기상 다들 그렇게 얘기하니까 관례적으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내 주민번호와 이름을 도용해서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내 이름으로 하고 다닌 정황을 발견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타인의 명의를 본인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는 일은 엄연한 불법입니다. 십계명 제 3계명에는 하나님의 명의 도용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따라서 함부로, 아무 때나 하나님이 하셨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만 하나님이 하셨다는 사실이 내면 깊숙이 인정되기까지 잠잠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요엘 선지자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의미가 여호와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남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기에 때로는 아껴 말하고, 때에 맞게 말하고, 이름의 격에 맞게 말할 때, 그 이름이 우리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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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기 소개] *잠깐묵상 | 창세기 24장
“그가 이르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창 24:34) 사람이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가면 이름이 박탈됩니다. 감옥에 가면 죄수는 이름 대신에 번호를 부여받습니다. 이름으로 불릴 자격을 박탈당하는 벌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이 불리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는데 이름을 부르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유명한 시도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이름은 그저 표식이 아닙니다. 존재의 의미를 가득 품고 있는 것, 그것이 이름입니다. 창세기는 이름이 유독 많이 나오는 책입니다. 창세기 중간 중간에는 사람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족보가 등장합니다. 무려 9개의 족보에 사람 이름만 수백 명입니다. 야곱이나 요셉처럼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가 기록으로 남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저 이름 한 단어만 남긴 채 그가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다가 떠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됐건 이름 하나는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중대한 역할을 맡았지만 도무지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 종은 이삭과 리브가의 결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활약이 장장 67절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의 이름 한 번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성경도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종입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소개한 전부였습니다. 성경의 한 구절로 남은 그의 짧은 자기 소개를 가만히 묵상해 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할 수 있는 자기 소개의 전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엔딩 크레딧 끄트머리 한 구석에 자기 이름을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건 세상 일을 할 때나 필요한 노력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시켜 주셨다는 것, 그 자체를 영광스럽게 여기는 분들이 지금도 많이 계시는 줄 압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겨서 사람이 기억 못할 뿐이지 하나님이 영원히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