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Sign In
묵상&설교😌
[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 *잠깐묵상 | 출애굽기 26장
M
mwx2xwm
👍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출 26:1)
성막은 총 4겹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안쪽에 덮히는 막은 가늘게 꼰 베 실로 짠 천이었습니다. 이 천에다가 푸른 색, 자주 색, 붉은 색 실로 천사 무늬를 정교하게 수놓았습니다. 안쪽에서 두 번째 막은 염소의 털로 만들었고 별다른 무늬는 없었습니다. 세 번째 막은 숫양의 가죽이고 가장 바깥쪽의 네 번째 막은 해달의 가죽입니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은 가장 안쪽의 성막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요즘에야 방직기가 있어서 좋은 원단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당시에 천이라는 것은 사람이 손으로 일일이 짜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나누어 가지고 속옷은 제비뽑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그만큼 천이 귀했다는 것입니다.
길이 12.6m, 너비 1.8m짜리 천을 5개 만드려면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할까요? 게다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천사 무늬를 수놓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유일하게 유채색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성막 공정 중에 가장 세심한 디테일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을 들여서 만들어 놓고 그 위에다가 염소털, 숫양의 가죽, 해달의 가죽을 덮어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아름다운 부분을 아무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막 구조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가장 아름답고 보기에 좋은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하지 않고 안쪽을 향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내밀하고 은밀한 곳에 가장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내 삶에 성막 하나 잘 만드는 일입니다. 가장 은밀하고 내밀한 곳을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왜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할까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라야 내면이 가꾸어집니다. 왼손이 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겉치장에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Th
Subscribe to 'thelionnthelamb'
Welcome to 'thelionnthelamb'!
By subscribing to my site, you'll be the first to receive notifications and emails about the latest updates, including new posts.
Join SlashPage and subscribe to 'thelionnthelamb'!
Subscribe
👍
mwx2xwm
[알고도 짓는 죄] *잠깐묵상 | 신명기 28장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7) 아무리 먹을게 없어도 그렇지,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안타깝게도 신명기의 이 저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고스란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 28장의 내용은 축복과 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주가 축복보다 다섯 배나 많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해서 절대로 저주의 길을 택하지 않을 법한 것들입니다. 독극물이 담긴 병에 강력한 경고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손 대서는 안될 것들에 관하여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이 아니라 기어이 독을 선택하고 맙니다. 인간은 몰라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안되는 줄 알고도 짓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짓고 싶은 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죄를 짓고 싶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상황만 갖춰지면 죄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유혹을 바라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입장에서 유혹이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변명할 거리를 서비스로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00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크게든 작게든 망해봐야 인지의 차원에서 깨달음의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정신 차렸듯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는 길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악을 선택하고 마는 일그러진 본성에 하염없이 절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그런 나의 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복된 길이기도 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mwx2xwm
[자본주의와 희년] *잠깐묵상 | 레위기 25장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빚이 50년마다 초기화되는 경제 제도입니다. 희년은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속죄일이란 지난 1년간 쌓였던 모든 죄가 해결되는 날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날로부터 빚 탕감의 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빚 해결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유의미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러한 희년 정신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구절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해결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해결해 주소서"가 됩니다. 죄와 빚이 각각 서로에게 메타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시행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눅 4:18-19).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행하신 희년은 제도성을 띄지 않는다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으로, 빚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빚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전체 통화량보다 대출액이 항상 많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빚을 창출해야만 부가 창출됩니다. 경제 성장률이라는 것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의미하고,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것도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의 순환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는 아닙니다. 돈에 집약된 인간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스러운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경제의 선순환과 탐욕의 악순환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대 속에 희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희년 구현의 희망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년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희년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냄새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이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mwx2xwm
[찬양과 설교 속에 전시된 하나님] *잠깐묵상 | 레위기 16장
"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레 16:23)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의 옷차림과 다른 옷차림으로 지성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사장이 입어야 하는 옷차림 규정이 레위기 16장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단 한번도 에봇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제사장은 평소에 세마포 속옷 위에 에봇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봇의 원단에는 푸른색, 자주색, 붉은색, 금색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슴에는 열두 종류의 보석이 달려 있고, 양 어깨에도 호마노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제사장 관복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이 에봇을 벗은 채 세마포로 된 옷만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머리에도 세마포 관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마포만을 두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대개는 시체를 세마포로 두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은 세마포 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레위기의 동물 희생 제사는 단순히 동물만 죽이는 도축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동물의 죽음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레위기가 기록되었다면 소나 양, 염소 대신에 반려 동물의 희생 제사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반려 동물이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려 동물이 나를 대신해서 희생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예배의 의미가 훨씬 깊이 체감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부인 없이 위로와 회복의 감동만 있는 예배는 공연이나 전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찬양과 설교 속에 멋있게 전시된 하나님을 관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