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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설교😌
[천국은 절충안이 아닙니다] *잠깐묵상 | 여호수아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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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누가 어디까지 소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인류 역사에 있어 변함 없는 핫이슈입니다. 특정 지역을 두고 나라와 나라는 끊임 없이 다투고 있고, 한 국가 안에서도 부동산 정책은 언제나 뜨거운 감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땅에 대한 이슈를 다루고 있는 여호수아서는 19장 51절을 끝으로 땅 분배에 관한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수 19:51)
드디어 가나안의 토지 분배가 마무리 된 것입니다. 분배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언제나 제비를 뽑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데 제비를 뽑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땅을 분배하는 일을 각 지파의 리더들이 모여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면 어땠을까요? 과연 회의가 끝이 나기나 했을지 의문입니다. 좋은 땅 차지하겠다고 서로 싸우다가 자멸하지는 않았을까요? 결정사항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끼리 세력을 규합하여 투쟁하지는 않았을까요? 걸핏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며 당을 지어 여론을 몰아가던 광야의 습관이 어디 갔겠습니까?
하나님은 가나안 땅 분배가 인간의 정치적 결과물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정치란 개인과 집단이 가진 이기심들의 절충안입니다. 그런데 욕심은 절충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분배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비를 뽑게 하셨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어떤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내 욕심과 계산과 판단을 완전히 접겠다는 자기 부인이자 신앙고백이 바로 제비 뽑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기로 결정한 사람들 사이에 하나님 나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제비의 결과가 어떠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절충안도 늘 불만입니다.
천국은 회의하고 절충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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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 요구하다] *잠깐묵상 | 사사기 1장
유다 지파의 갈렙은 헤브론 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브론 남쪽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해 갑니다. 그런데 헤브론과 그 이남 지역은 정복에 욕심을 낼 만큼 매력적인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질 때, 땅에 대한 우선권을 쥔 롯은 헤브론 반대쪽을 향했습니다. 선택권이 있다면 선택하고 싶지 않은 땅이 헤브론이었습니다. 갈렙은 그런 땅을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며 개척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갈렙은 자기 딸을 걸고 황무지 개척의 의지를 드러냅니다. 결국 옷니엘이라는 장수가 기럇 세벨을 점령하고는 갈렙의 딸, 악사를 얻습니다. 이제 갈렙은 남부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사위를 따라 딸을 떠나보냅니다. 가장 척박한 땅으로 시집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삿 1:15) 딸이 샘물을 요구했을 때 아버지 갈렙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내심 아까워서 주기 싫었는데 마지 못해 샘물을 주었겠습니까? 윗샘과 아랫샘 뿐만 아니라 더 줄 것은 없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고 또 주고, 더 주고, 다 주고 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다 주고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녀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 부모에게는 존재의 의미입니다.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다 커버려서 더 이상 부모의 지원이 필요 없는 자식에게는 호주머니 속의 사탕이라도 꺼내 손에 쥐어 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고백입니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필요 없어'라는 거절에서 부모는 서운함을 느끼고 '주세요'라는 요청에 기쁨을 느낍니다. 케이던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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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나안 땅이었을까?] *잠깐묵상 | 여호수아 23장
"확실히 알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의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의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수 23:13) 이토록 위험한 땅인데, 하나님은 왜 자꾸 당신의 백성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려 하셨을까요? 사실 가나안 땅은 황무지에 가깝습니다. 좋은 땅도 아니었고 발전된 땅도 아니었습니다. 주변의 사막 지역에 비해 목축하기 좋은 땅이라는 말도 있지만, 만약 하나님이 땅의 비옥함을 선물하고 싶으셨다면 아브라함을 굳이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우르는 수메르 문명의 발원지역입니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라는 두 개의 강이 제공하는 비옥함은 세계 최고였습니다. 애굽은 어떻습니까? 나일강 문명의 발원지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대표적인 지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괜히 그 비옥한 땅으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끌어내셔서 비교거리도 되지 않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 민족을 가나안 땅에 보내시려는 의도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15장 16절입니다.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하고많은 땅들 중에서 가나안 땅이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가나안 땅이 가장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타락의 상태가 도를 넘었기 때문에 그 땅에 대한 징벌적 차원에서 히브리 민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들이 진멸전쟁을 어렵게 치러야 했던 이유입니다.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 전체가 일종의 사전 교육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를 대비해서 '어떻게 하면 가나안 사람들과 구별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땅의 위험성을 거듭 강조했고, 죽기 직전까지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애시당초 풍요와 번영을 선물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좁은 문, 좁은 길로 부르셨습니다. 전쟁터로 부르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은 우르나 애굽에 비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도 아니었습니다. 젖과 꿀은 물질적 풍요가 절대로 대체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오해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나일강의 풍요로움을 선망하게 됩니다. "네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이려 함이 어찌 작은 일이기에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민 16:13)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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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내리기 전에 던진 질문] *잠깐묵상 | 여호수아 22장
가나안 땅은 요단강 서쪽입니다. 그런데 요단강 동쪽에 이미 자리를 잡은 지파들이 있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므낫세의 반 지파입니다. 이 세 지파는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땅 정복전쟁을 치르는 동안 요단강 서쪽으로 넘어와서 함께 싸웠습니다. 그리고 정복전쟁이 끝난 후 다시 자기네 땅으로 돌아갑니다. 이때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염려 섞인 당부를 합니다. 그 땅에 가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힘을 다해 계명을 지키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모습이 여호수아 22장 초반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을 건너 돌아간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상한 소문이 들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수 22:11-12) 요단 동쪽 사람들이 우상의 제단을 쌓았다는 뉴스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단 분노부터 하고 봅니다. 순식간에 온 회중이 집결할 정도로 그들의 분노는 맹렬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그런지 이해보다는 오해가 빠릅니다. 누군가의 아픔을 쉽게 진단해버리고, 타인의 언행을 내 방식으로 해석하며, 사회적 현상을 읽어내는 자신만의 프레임이 각자에게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 중심성을 정당화 해줄 명분을 신앙 안에서까지 찾는다는 것입니다. 분노하며 실로에 모였던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이나 했을까요? 자기들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민족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모인 하나님의 거룩한 군대라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강화시켜줄 근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함입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매일 기도하는 삶의 축복이란 섣부른 판단을 잠시 유보할 수 있는 넉넉한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다행히도 강 동쪽 지파들에 대한 오해가 풀렸습니다. 칼을 꺼내기 전에 질문을 꺼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판단이 이미 섰더라도 잠시 미뤄두고 한 번 더 물어본다고 나쁠 것 없습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