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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설교😌
[찬양과 설교 속에 전시된 하나님] *잠깐묵상 | 레위기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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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은 회막에 들어가서 지성소에 들어갈 때에 입었던 세마포 옷을 벗어 거기 두고"(레 16:23)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평소의 옷차림과 다른 옷차림으로 지성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 제사장이 입어야 하는 옷차림 규정이 레위기 16장에 여러 차례 언급되는데, 단 한번도 에봇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나옵니다.
원래 제사장은 평소에 세마포 속옷 위에 에봇을 입도록 되어 있습니다. 에봇의 원단에는 푸른색, 자주색, 붉은색, 금색 실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슴에는 열두 종류의 보석이 달려 있고, 양 어깨에도 호마노가 각각 하나씩 달려 있는 모양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제사장 관복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이 에봇을 벗은 채 세마포로 된 옷만 입고 들어간 것입니다. 머리에도 세마포 관을 썼습니다.
유대인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마포만을 두르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 대개는 시체를 세마포로 두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입은 세마포 옷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란 내가 죽는 경험입니다. 레위기의 동물 희생 제사는 단순히 동물만 죽이는 도축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죽음을 동물의 죽음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날 레위기가 기록되었다면 소나 양, 염소 대신에 반려 동물의 희생 제사가 기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반려 동물이 내 죄 때문에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려 동물이 나를 대신해서 희생을 치르는 장면을 상상해 본다면 예배의 의미가 훨씬 깊이 체감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시간이 예배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고백이 없다면 예배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부인 없이 위로와 회복의 감동만 있는 예배는 공연이나 전시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찬양과 설교 속에 멋있게 전시된 하나님을 관람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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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들었던 그 생각] *잠깐묵상 | 신명기 30장
"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서,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쫓아내신 모든 나라에 흩어져서 사는 동안에, 당신들의 마음에 이 일들이 생각나거든"(신 30:1, 새번역) 살다가 문득 든 생각 하나가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왜 그런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라며 자기 인생 이야기를 풀어 놓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합니다. 평소에는 잘 하지도 않던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는 것입니다. 평소같으면 무시하고 지나갔을 생각인데 그날따라 머릿속에 맴돌았다는 것입니다. 그 한번의 생각 때문에 삶의 방향을 돌이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이 그랬습니다. 정신없이 살던 중에 문득 '집에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집 생각이 나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이미 틀렸어'라는 생각에 의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상쇄될 수도 있었을텐데, 왜인지 집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찰나의 순간에도 오만가지 생각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같은 진공 상태라도 면밀히 들여다 보면 입자와 반입자의 쌍생성 쌍소멸 현상이 관찰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 우리의 내면도 오만가지 생각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합니다. 생성되었다가 소멸되어야 할 생각이 영문도 모르게 소멸되지 않고 가슴 속에 남아서 새 삶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기억이 난 것도, 생각이 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해 들어오신 작지만 분명한 흔적이 바로 그 생각, 그 기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한편, 사탄도 생각을 틈타고 들어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요 13:2) 사탄이 뿌린 생각의 씨앗은 가룟 유다의 욕망과 허영심을 먹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온갖 종류의 씨앗이 섞여 뿌려진 밭과도 같습니다. 좋은 씨앗만 싹을 틔었으면 좋겠지만 오만가지의 씨앗이 오늘도 싹을 틔었다가 시들곤 합니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게 내 생각이고,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내 마음입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농부이신 하나님께 맡겨드립니다. 하나님이 돌보시고 가꾸시고 경작하시기를 매일 기도할 뿐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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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도 짓는 죄] *잠깐묵상 | 신명기 28장
"자기 다리 사이에서 나온 태와 자기가 낳은 어린 자식을 남몰래 먹으리니 이는 네 적군이 네 생명을 에워싸고 맹렬히 쳐서 곤란하게 하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함이리라"(신 28:57) 아무리 먹을게 없어도 그렇지,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요? 안타깝게도 신명기의 이 저주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고스란히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명기 28장의 내용은 축복과 저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주가 축복보다 다섯 배나 많이 나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너무 끔찍해서 절대로 저주의 길을 택하지 않을 법한 것들입니다. 독극물이 담긴 병에 강력한 경고의 표시가 되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대 손 대서는 안될 것들에 관하여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이 아니라 기어이 독을 선택하고 맙니다. 인간은 몰라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안되는 줄 알고도 짓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짓고 싶은 것이 죄입니다. 문제는 죄를 짓고 싶다는 것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허락되지 않아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상황만 갖춰지면 죄를 이길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유혹을 바라기도 합니다. 죄를 짓는 입장에서 유혹이란 참 고마운 일입니다. 변명할 거리를 서비스로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00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우리는 크게든 작게든 망해봐야 인지의 차원에서 깨달음의 차원으로 넘어갑니다.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나서야 정신 차렸듯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착한 사람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내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는 길입니다. 선이 무엇인지 뻔히 알면서도 악을 선택하고 마는 일그러진 본성에 하염없이 절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그런 나의 실상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복된 길이기도 합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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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희년] *잠깐묵상 | 레위기 25장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빚이 50년마다 초기화되는 경제 제도입니다. 희년은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속죄일이란 지난 1년간 쌓였던 모든 죄가 해결되는 날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날로부터 빚 탕감의 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빚 해결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유의미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러한 희년 정신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구절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해결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해결해 주소서"가 됩니다. 죄와 빚이 각각 서로에게 메타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시행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눅 4:18-19).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행하신 희년은 제도성을 띄지 않는다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으로, 빚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빚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전체 통화량보다 대출액이 항상 많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빚을 창출해야만 부가 창출됩니다. 경제 성장률이라는 것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의미하고,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것도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의 순환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는 아닙니다. 돈에 집약된 인간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스러운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경제의 선순환과 탐욕의 악순환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대 속에 희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희년 구현의 희망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년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희년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냄새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이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잠깐묵상 #ShortMessageService #성경통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