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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가정환경과 우리들교회로의 인도

경상도 집안에서 배를 타신 아빠와, 여러번 재혼으로 이복형제를 가진 엄마는 결혼하셔서 저희 삼남매가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직무는 계약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페이와 별개로 안정감을 바랬던 엄마는 본인도 일을 하겠다 나섰고, 다단계 사업으로 가진것 모두 잃고 빚을 크게 졌습니다.
배를 타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인감도용으로 신고한 뒤, 빚을 복구하는 대신 엄마를 감옥에 보내고 이혼을 택할지, 빚을 감내하는대신 가정을 지킬지 고민에 빠지셨지만 저희 삼남매를 생각해 가정을 지키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배우자의 배신과 가난의 사건을 해석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끝내 응답없는 하나님께 상처받고 일단 돈을 벌기위해서 다시 출국하셨습니다. 보호자없이 남겨진 저희는 수도와 전기가 반복적으로 끊기는 가난 속에서 간신히 살아갔습니다. 저희 가정은 부산에서 교회를 다같이 다녔었는데, 가난해지고모두 교회를 떠났습니다.
불안정한 환경 가운데 형은 비행청소년으로, 누나는 가해하는 형 때문에 피해의식이 깊어졌고, 막내인 저는 눈치보며 지냈습니다. 시간지나 형은 군대로, 누나는 가족들을 떠나 일하러 나갔습니다. 중3때 홀로 남겨진 저는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는 처지가 슬퍼 우울증이 깊게 왔습니다.
고2 주일학교 수련회에서 하나님이 진짜 계시다면 저희 집을 살려달라는 기도와 함께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우리 집의 예수씨를 지키기위한 하나님의 세팅이었으나, 믿음이 어려 우리 가족들 중에 저만 옳고 나머지는 하나님 보시기에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의식 가득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눈치를 보는 동시에 이러니 예수님께 선택받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집은 너무 불편해서 교회로 자주 나가기도했는데, 형은 그런 제가 이해가 안된다며 우리집이 교회다니고나서부터 망한것 같다고, 교회 다니지 말라고 많이 때리고 박해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형은 삶이 해석이 안되니 우울증이 깊어져 공황장애로까지 악화되었습니다. 매일 자살소동을 벌이며 심한 알콜의존과 가정폭력,공황발작 세 가지를 동시에 해대는 형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불쌍하기도하고, 그동안 눈치보면서 인내했는데 이게 결론인가 싶어 하나님께 원망도 됐습니다. 해석이 안 되는 나날속에서, 어머니가 큐티인을 접하게 되셨고, 우리들교회에 엄마와 함께 등록했습니다.
[2018 청년부 화해 수련회]에서, 고린도전서 본문으로 이런 가정 환경과 우울 가운데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회복됐습니다. 그 때의 기쁨으로 1년 목장에 잘 붙어가게 됐고 [2019 약속 수련회]에서는 비로소 우리 가족들도 하나님께서 구원 받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묶어주셨으며, 책임지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죄패와 하나님의 신실한 개입

수련회에서 제 죄패도 비로소 알게해주셨습니다. 저의 죄패는 질서 불순종과 이기심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저에게는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미워해주는 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저를 따돌리려는 한 친구가 있었고, 군대에서는 직속 선임중 한 사람이 저를 처음부터 너무나 미워하는 바람에, 부대 내에서 굉장히 무능하고 사고뭉치인 이미지로 몰려서 1년을 고생했습니다. 또한 작년에는 성희롱으로 누명이 씌어져 부서이동이라는 조치를 순식간에 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사엘을 지나고 벤하닷의 손에 맡겨지듯 '그 한 사람'만 지나가면 될 것이라고 항상 생각했지만 그 다음, 그 다음도 있었습니다.
가정에서는 그 한 사람은 빚을 지고 집에 안 들어오는 엄마, 난폭하고 또 아픈 형, 형한테 눌려있다 형이 없어지면 저한테 군림하는 누나였습니다. 그래도 가족이라 아프고 불쌍하게 생각은 했지만 언젠가 때가 차면 꼭 떠나리라. 졸업해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그 시간들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삶이었습니다.
전역 후 처음에 우리들교회에 등록하고, 설교는 이전 교회에 비해 너무 길고, 걸어다니던 교회를 버스까지 타서 와야하나 하는 쓸 데 없는 불만으로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남녀가 나뉜 청년부 목장, 가정사까지 전부 얘기하는 목욕탕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렇게 묘하게 무시하면서도 편안한 양가감정이 딱 제 죄성입니다. 인본주의에 사로잡혀서 가족들이 잘 되길 바라고 낫길 바라지만, 천국에서는 절대 함께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게 묶어주신 환경에서 단 한 번도 제가 감사함으로 묶여있었던 적이 없었고, 이가 갈리는 그 원수같은 역할들이 다 예수님이었구나! 설교 가운데 그게 깨달아지고 들렸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얼마나 무시하고 미워했는지, 그리고 그런 가족, 선임, 친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얼마나 내가 옳은 사람인지를 드러내고 싶었는지. 그렇게 내게 임한 예수를 못되고 악한 사람으로 몰아넣고 죽여 없애고 싶었구나.. 100% 죄인임을 깨닫고나니까, 어릴때부터 저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제 삶에 개입해주셨던 순간들이 기억나기 시작했습니다.
중3때 홀로 남은 저의 이야기를 알게되시고, 공부를 어떻게든 시켜야겠다는 마음으로 제 학원비를 대신 내주신 학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주일학교 수련회를 차로 데려다주시고 회비도 내주시면서 양육시켜주셨던 주일학교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입시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홍익대 광고홍보학부로 붙여주셨고, 장학재단이 잘 되어있어 4년을 공짜로 다닐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이유를 갖고 제게 엄선한 환경을 허락해주셨습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해석되고나니 제 모든 환경이 너무 감사해졌습니다. 그리고 우리들교회로 오게 된 지금까지의 시간이 기적같이 여겨졌습니다.
구속사 가치관이 좋아지니 요셉이 아니라 유다가 선택받는 '여호와 보시기에' 옳다는 게 너무 기뻤습니다. 그 기쁨으로 일대일 양육, 양육교사를 연달아서 받고 양육자가 된 후로 올해까지 8번 연속 양육자를 맡게 됐습니다. 막상 양육자가 되어 동반자들을 만나보니, 우리들교회를 부모님 덕분에 아주 어릴때부터 다녔어도 구속사 가치관을 제대로 소개받은 친구가 너무 없었습니다. 매 주 담임목사님께서 설교해주시는 이야기가 흘러나가는게 너무 아까웠습니다. 그 사이 목자, 마을장으로 3년, 그리고 간사로도 2년 동안 섬기며 구속사 가치관을 기회만 나면 소개했습니다. 그렇게 양육받은 많은 친구들이 벌써 청년 휘문 1부에 정착하여 목자와 부목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교회에 양육받고 정착하기 위해 허락하신 건강 문제로 2년을 쉬시는 동안 가정에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그래서 매달 월급에서 1/3은 빚을 갚고, 또 1/3은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그러다보니 월급은 늘어도 돈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회복하시고 다시 일을 하심에도 가족들은 제게 생활비를 계속 보태길 요구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나누고 갈 때, 공동체에선 분가가 필요하다고 처방해주었습니다. 그때 결혼의 뜻도 모아졌고, 영보와 결혼준비를 하려고하니 모아둔 돈이 너무 없어, 큰 낙담이 되었습니다.

결혼준비

결혼 준비를 묻고서 시작하고, 많이 섬겨왔으니 하나님께서 결혼만큼은 당연히 해결해주시겠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년 말 예식날짜를 잡자마자, 직장에서 경영악화로 권고사직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결혼 자금과 생활비를 '해결'하고자 면접을 분별없이 잡았습니다.
그러다가 병원을 운영하는 이사장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었고, 하나님이 내 처한 환경을 아시고 멜리데 섬으로 가는 배 파편을 보내주셨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5월 초 '이 편지가 이르거든' 말씀을 들은 주에 저는 해고통보를 받았습니다. 연휴를 앞두고 통보를 받게되어, 마음이 복잡해져 엘더님께 연락드렸더니 일단 주일 말씀을 들어보자고 해주셨습니다. 그 다음 주 '네 마음도 진실하냐' 말씀으로 내가 사로잡힌 것을 보라하시고, 내 계책을 세우기보다 하나님께, 공동체에 '물음'으로 진실해야 한다고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일희일비할 때, 그 다음주 '네 바알을 죽이라' 말씀으로 비로소 제가 의지하는 바알을 깨닫게 됐습니다.
3년의 직장생활동안 권고사직, 경영악화, 강제부서이동 등 제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려하는 순간마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결혼 자금을 위해 이사장 눈에만 잘 들면 '내가 1년 정도는 해고당하지 않고 돈 모아볼 수 있겠구나' 계획을 했으나 내가 내 바알을 죽이지 못하니 예후가 장로들, 이세벨과 아합 가문의 수 많은 사람들에게 쳤던 뒷통수처럼 저도 똑같이 권고사직을 당했습니다. 이사장은 제가 요구한 조건은 다 맞추어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근로계약은 병원소속이 아닌 언제든지 해고가 가능한 5인 이하 사업장으로 작성하길 원했었습니다.
편지를 받고 이행했다 예후에 속은 이스르엘 장로들처럼 제가 속은 건 그 이사장이 아니라, 멋대로 믿은 '결혼 준비'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나 속상하기만하고 하나님이 밉기만 한 저에게 그 다음주 주일설교 '그 죄에서 떠나라' 라는 말씀으로 내가 의지하고자 했던 바알을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번 더 "전심"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너무 무모하게 시작한 건 아니었을까, 권고사직을 당한 후로 결혼을 미루던지 했어야 했던 걸까.. 공동체는 절대 미루지마라고 권면해주었는데,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고 결정한걸까.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민이 들지만 그때마다 두려워말고, 내적성전을 먼저 세워야한다(느헤미야), 진짜 두려움은 내 미래가 아니라 내 악하고 음란한 가치관이다(예레미야) 등등 ⋯. 지금 결혼준비의 때가 전심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사람을 소개하는 하나님의 원리 : 영보와의 만남

영보와는 2019년 4월부터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저는 구속사 말씀에 재미를 붙여 한창 담임목사님 책을 하나씩 하나씩 읽고 있을 무렵이었습니다. 이기심의 죄패로 아무 여자나 만나며 1년에 12명과 책임지지 않는 관계를 이어오다 매정하게 끊어 실족하게 한 일도 있었던 저에게 '어떤 사람을 만나야하지?' 라는 궁금증이 깊었습니다. 그때 보시기에 좋았더라 책으로, 아담에게 하와가 왜 필요했는지. 사명감당할 때 하나님이 돕는 베필을 주시는 원리.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어떤 구조인지. 그것을 이해하는 게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목사님의 가정사역에 대해 띵크하던 차에 영보를 알게 됐습니다.
이전의 에로스 사랑만 탐내던 제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만큼 관계가 진전되어도 차분한 제가 신기했고 교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무렵 저는 형의 공황장애를 케어하다 제가 공황장애가 너무 심해져서 영보가 참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저는 병으로, 영보는 엄마의 간호로 한 주를 정신 없이 버티다 둘이서 데이트 하는 날이면 쉼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5개월만에 영보의 어머니가 소천하시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돌아가시는 그 주간 아가서 큐티가 시작되었는데, 그 주간 어머니를 놓고 하나님의 편지가 계속해서 전해졌습니다. 그 직후 영보네 집문제가 꼬여 이사가게 된 사건, 아버지의 암 사건 등 해석하기도 싫은 일이 계속해서 찾아오는데 저는 남자친구로서 무슨 역할을 하나님께서 맡기셨는지 알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힘든 환경에서 영보가 신앙을 지켜나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큐티인을 2년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큐티인을 보내길 2년이 지나 마침내 영보의 둘째, 셋째 동생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은혜를 허락해주셨습니다. 영보네 집이 한 명씩 회복될 때마다 저는 제 가족들이 전도되는 것처럼 기뻤습니다.
현실적으로 바라봤을 때 저희가 결혼으로 나가기는 어려웠고, 그 두려움을 없애는 데에만 만 3년이 걸렸습니다. 여호세바와 여호야다가 아달랴로부터 아무도 관심갖지 않는 '성전'에서부터 요아스를 지키고 개혁을 진행했듯 저와 영보의 결혼도 조심스럽게 말씀만큼만 진행했습니다.
제 오랜 가난과 더불어 피해의식 낮은 자존감에서 비롯된 우울/ADHD 들을 치료할 수 있게 병원도 함께 가주고 함께 말씀보며 기도해줬습니다. 영보는 요아스같은 저를 지켜준 여호세바입니다. 그리고 백부장 같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자친구를 넘어 돕는 베필로 영보를 붙여주셨습니다. 구속사 가치관으로 영보를 알아볼 수 있게 양육해주신 목사님과 하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