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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상반기 일대일 양육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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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과 간증 - 나의 출애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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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과적인 간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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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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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관리 - 급한 일과 중요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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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약하여서(삼하3: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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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 사랑하고 (엡 5: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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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 날마다 촉촉히 적셔주는 이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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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기복을 넘어 팔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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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수 10: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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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 100% 옳으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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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영혼 구원을 위한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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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 : 갈등충만은 성령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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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5: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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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22] 김양재 목사 - 팔복(마5:3-10)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우리는 참 복을 좋아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그런데 그 복의 내용은 거의 돈으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복도 아니고 복이 8개나 되는 8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데, 나를 살리는 회계 후에 성화를 넘어 영화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복의 개념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서 그 복의 개념이 무엇일까요? 오늘 이제 여덟 가지로 좀 살펴보려고 하는데, 여러분 따라오기가 숨이 가쁘시겠지만, 성경 전체를 요약한 말이 8복입니다. 그걸 더 넓게 광희의 펼쳐짐으로 이제 그 복을 설명한 것이 십계명이고, 십계명 그 또 출애급기 19장, 20장에 쫙 나오는데, 그것을 또 더 간단하게 8복. 8복을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겁니다.
그래서 이것만 잘 알아도 성경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1.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며, 본문에 쓰이는 가난하다는 원어로 '웅크리다'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웅크린 거지의 모습, 의지할 곳 없는 거지, 나사로의 모습, 두 랩돈을 바친 과부에게 쓰인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궁핍함보다 훨씬 심한 절대 빈곤의 상태에 있지만 무엇을 간과하는 능동적인 모습이 아니라 삶에 찌들고 시달림을 당한 수동적인 형용사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구걸에 의존해야 하는 사람, 괴롭힘과 고난을 당하고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사람, 겸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겸손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입니다. 여러분, 너무 놀라셨죠? 그렇죠? 성경의 예를 들어보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에 비유해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기 상속분을 달라고 미리 달라고 해서 가출을 했어요.
그 결과 둘째 아들의 삶은 첫째로 허랑방탕하게 되고, 두 번째 다 허비했으며, 세 번째는 그냥 다 없이 했고, 네 번째는 업친대 덮친격으로 흉년이 들었으며, 다섯 번째는 군핍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번째는 그 무시하던 이방 백성에게 부쳐서 살게 되었고, 일곱 번째는 돼지를 치게 되었고, 여덟 번째는 너무 굶주려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자 했으며, 아홉 번째는 그 쥐엄열매마저도 주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 아홉 단계를 거치기 전에 가난한 것을 인정하고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홉 단계를 다 거치고 쥐엄열매도 주는 자가 없어서 주려 죽게 되어서야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어 싸우니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이라 이 걸음을 받지 못하고 이제 폼꾼의 하나로 여겨주소서 하며 자신의 죄와 가난함을 고백하게 됐습니다. 내가 지금 가난하다고요? 돈이 없습니까? 집이 없어요? 병이 걸렸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어 싸우니의 고백이 나오지 않는 것은 내가 가난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조차도 얻을 수 없어서 주려 죽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자기가 가난한 걸 인정하지 못할까요? 자기를 인정하는 것이 그렇게나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굶주려 죽게 될 지언정 다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딱 보면 될 텐데 그게 안 됩니다.
자 한 예를 들어볼게요, 양은 산길을 가다가 이제 맛있는 풀을 발견하면 그 1미터 아래는 아래되는 절벽으로 이제 폴짝 뛰어내린다고 해요. 그래서 내려가서 신나게 풀을 뜯어 먹다가 다 먹고 나서는 이제 배가 불러졌잖아요. 그러면 그 1미터를 죽어도 못 올라온대요.
그런데 아래에는 무서운 낭떠러지가 있고, 그냥 진태 악란인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모습을 보고 목자가 이제 줄을 내려줘서 감아 올리려고 하면 자기를 이제 잡아 가두려는 줄 알고 막 뒷걸음질 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서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 양을 살리려면 절벽을 그 뛰어내린 양이 그 자리에서 그냥 지칠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굶주림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보고 있다가 완전히 쓰러지면 줄로 몸을 감아서 올린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쓰러질 만큼 줄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아홉 번째 단계까지 못 갔어요.
하나님은 내가 완전히 물을 잃을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냥 저항할 수 없을 때까지 그냥 끝까지 가난해질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지금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그 힘들고 답답한 환경이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는 내 앞에 내 안에 있는 욕심이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입니다. 아직도 내 힘으로 잘 살아볼 수 있다고 다 바둥거린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복을 주려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이제 손 들고 돌아오라고. 가난하고 애통한 환경으로 나를 몰아가시는 것이 복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1.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난의 내용이 무엇인가요?
2.
물질과 애정과 건강의 가난 다 당하셨어요?
3.
그 가난이 결국 영적인 가난으로 이어져서 천국을 사모하게 되었습니까?
4.
여러분들은 아홉 단계 중에서 어느 단계에서 아직도 가난한 것을 못 보고 있습니까?

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두 번째 애통한다고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사절에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며 애통함은 가까운 가족이 죽었을 때의 극한 슬픔을 의미합니다. 정말 가슴을 찢는 슬픔입니다. 네, 바로 내 죄 때문에 그런 슬픔으로 울어야 합니다.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위로를 얻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엉엉 우는 자를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가난함은 애통함과 같이 오는 것입니다. 가난해야 애통합니다. 부유하면 애통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내가 구걸할 수밖에 없는 자이고, 내가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애통함이 나옵니다. 옳아,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려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애통이고 탄식입니다.
하나님의 복, 하나님의 위로가 최고입니다. 환경이 아니라 내 죄 때문에 가난하고 애통해야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자는 그 누구도 어떤 사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천국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자, 적용해 보세요.
1.
여러분들은 무엇 때문에 애통합니까?
2.
절박한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도 필요 없다고 버둥거리고 있습니까?
3.
믿음이 성숙할수록 나의 가난함을 보고 그것 때문에 애통하며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위로와 천국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3. 가난하고 애통한 자는 세 번째 온유한 자로 나갑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온유한 자는 어떤 자입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얼굴이 온유하고 표정과 말씨가 온유하다고 해서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짐승을 길들일 때 쓰는 말로 길들여져 주인 뜻대로 사는 것으로 의미합니다.
내가 짐승만도 못하다는 것을 날마다 인정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길들여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동산 등기를 내 앞으로 해준다는 뜻일까요?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그랬는데 땅을 차지하고 화평을 즐기는 것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등기 소유가 내 것이 되지 않아도, 이 땅을 즐기는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존심이 있을 때는 누가 저를 초청을 해줘도, 내가 별장이 없으면 별장 가진 사람이 초청을 해줘도 가기가 싫은 거죠. 그러니까, 그게 온유한 자가 못 돼서 얼굴은 온유하게 보일지 몰라도, 제 속이 온유하지 못하니까 여유가 없어요.
땅을 차지하지 못해요. 그런데, 지금은 제가 여유가 있어졌기 때문에 이 세상 땅이 다 내 건데, 우주가 다 내 건데 그냥 시간이 없어 못 가는 거죠. 수금지하목터 천여명이 다 내 건데, 시간이 없어 못 가는 거. 완전히 그랜드캐년도, 알래스케어도 그냥 하와이도, 와이키키도 다 내껀데. 고수부지만 해도 내껀데. 내가 정말 요새 시간이 없네요. 정말 모든 땅이 내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여유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의 인물 중에 온요함으로 유명한 사람은 모세입니다. 이 사람 모세는 민수기 12장 3절에 온요함이 지면에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하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 줄 아십니까? 앞서 민수기 11장에서 백성들이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할 때 나온 게 아니에요, 민수기 12장 1절 2절에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다 그리고 그 구수 여자를 취했으므로 미리안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더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며 여호와께서 이 말을 모두 들으셨다. 모세의 친형제인 미리암과 아론을 비방할 때 이제 그의 온고가 지면에서 더하다는 말씀이 나왔잖아요. 우리가 온고할 때 가장 힘든 것은 가정이고 형제가 부부가 아니라고 이것을 모세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기를 먹었던 생각하면서 불평하고 지금 모세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 형제들이 모세를 도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도리어 비방을 했습니다. 그럴 때 온유하는 게 얼마나 힘들까요? 하지만 이때 모세가 입을 딱 다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수기 12장 2절 마지막에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그러셨잖아요. 하나님이 다 들으실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참는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을 바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누가 비방을 해도 반응하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습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이렇게 영류간에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듣는 것보다 하나님이 들었어요. 얼마나 자신감이 생기나요? 할렐루야 이것이 온고입니다. 우리는 매일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누가 나의 죄를 지적하는 걸 못 들어줍니다.
누가 나를 비방할 때 내가 옳다, 네가 옳다 할 것 없이 아 하나님이 들으시겠구나. 그러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나를 위해서 비방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푸실 때까지 딱 기다리면 됩니다. 그걸 못 기다리고 내 지위와 능력으로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온유는 자신의 지위. 뒤에 자기를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온유는 그래서 성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무조건 져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연약함입니다. 늘 돈을 풀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증명하려는 거, 그것도 온유가 아닙니다. 연약함입니다. 진짜 온유는 진리를 붙드는 것이고, 진리를 붙들기 위해서 순종까지도 하는 강함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야말로 외유내강한 사람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아무리 부드러워도, 십자가를 경험하지 않은 온유는 가짜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온유는 내게 많은 제주와 은사와 능력과 지위와 권세가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능력만 나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나를 판단해도 불편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나서서 해결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적용해 보십시오.
1.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내가 온유하다고 착각하지 않습니까?
2.
성품이 아닌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 하나님 때문에 인내하고 순종하는 이 온유가 있나요?
3.
성품인가요? 믿음인가요? 여러분들의 온유는 성품인가요? 믿음인가요?
나눠보세요. 이렇게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한 자는

4. 의를 더하고 목마르다고 했습니다.

의를 더하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며, 의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틀려먹어서 노동자 권리를 위해서 노존이 있어야 돼, 저런 나쁜 사람들은 다 감옥에 보내야 돼. 이런 게 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더하고 목말라야 해야 할 의는 내 뜻, 내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마치 환자가 자기 병의 원인을 찾아서 치료하지 않고 그저 고통만 제거해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는 행복하고 싶어' 이거는 그냥 고통만 제거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의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에 줄이고, 돈에 줄이고, 애정에 줄이고, 남편에 줄이고, 아내에 줄이고, 자녀의 성적에 줄이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매력 없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굶주려 하면 할수록 상대방은 도망가게 돼 있습니다. 남편, 자식에게 굶주려 있으면 그 부담을 견디지 못해서 다 밖으로 도는 겁니다. 사람에게 주리고, 세상에 주린 것은 내가 그 주릴수록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비참한 목마름과 주린 경험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뜻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채워 주십니다. 인생의 목적, 결혼의 목적이 거룩이라는 것을 알고 그 거룩을 원할 때 주님이 내 인생도 가정도 책임져 주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은 굶주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더 줄이고 목마르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의리를 더욱 사모하도록 나를 가난하고 애통하게 만드는 사람과 환경이 내게 얼마나 축복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줄이고 배부른 자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너무나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7년 동안 모셨다는 집사님이 이런 고백을 했어요. 남편은 막내이고 형님이 두 분이나 계셨는데, 그냥 남편이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직장도 그만두고 이제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이렇게 모시는데,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힘들었다고 했어요. 특히 중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에게 너무나 그 성적이 떨어질 것 같아서 날마다 불안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집사님이 잠깐 의자에 앉아서 잠든 사이에 시어머니가 거실에 온통 대소변을 다 묻혀 놓았어요.그때 중학생 아들이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들은 정신을 놓고 앉아있는 집사님을 방으로 딱 들어보내더니 할머니를 목욕탕에 모시고 들어가서 씻겨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엄마 말 잘 듣고 있을 줄 알고 내가 이렇게 과자 사왔는데 왜 그랬어? 아들은 어리듯 할머니를 씻겨드리고는 진물은 사타구니에 발라 옷까지 갈아입혔어요. 그리고 이제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고 있던 집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할머니를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해보세요. 그렇게 심란한 마음으로 같이 지내려니까 엄마가 병이 들죠. 엄마가 남몰래 흘린 눈물을 내가 왜 모르겠어요? 제가 커서 다 갚아드릴게요. 아들의 말을 듣는 순간, 집사님은 그동안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손님, 동서들을 원망했던 것, 남편과 살기 싫었던 마음을 다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공부할 시간에 할머니를 챙기는 것이 너무 싫었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아들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웠다고 했어요.
여러분들, 이타적인 것이 하나도 이렇게 손해가 아니에요. 이 아들이야말로 참 이렇게 의롭게 주릴 수밖에 없는 환경으로 몰아가서 진짜 온유한 자가 되고, 의롭게 주린 목마른 자가 된 것 같아요. 자기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랬겠어요? 힘든 할머니 엄마 보니까 저절로 의롭게 주리게 되었어요. 스스로 사랑을 보이며 엄마를 책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엄마의 눈물을 다 보고 있다. 이렇게 엄마의 아픔을 감싸 안았어요. 치매 할머니를 보며 힘든 엄마를 보며 의의 줄이고, 목마른 환경이 되었기 때문에, 이 어린 나이에 지혜와 사랑을 갖게 된 것이에요.치매 할머니를 모시면서 엄청난 복을 이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금세는 모르잖아요. [3]눈앞에 보기 좋은 것만 택하잖아요. 진짜 중요한, 그 하나님이 주시는 팔복을 택하지 않고 눈앞에서 잘 되는 것, 공부 잘하는 것 이것만 택하려고 하니까 적용해 보십시오. '내가 끊임없이 줄이고 목말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좋은 집, 좋은 차, 사람의 관심과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합니까?' 줄이고 목마른 환경을 통해 이 영적인 배부름을 알게 하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자,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줄이는 자는

5. 이제 긍휼히 여기는 복을 주신다고 했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긍휼은 장자가 끝나듯이, 끊어지듯이 아파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아파하고, 나를 사랑하던 남을 사랑하고, 나를 이해하던 남을 이해하고, 내게 관대하던 남에게 관대한 것이 긍휼입니다. 한 부인이 공동체의 지도자와 불륜을 저질렀어요. 이 사실을 안 한 남편이 그 지도자를 죽이고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까진 사람들은 다 그 부인을 비난하고 정조했어요. 그러나 어쩌면, 가장 아픈 사람이 간음을 행한 그 여인 아니겠습니까? 하루아침에 남편은 살인자가 되고 정말은 죽었어요.
우리가 비난하지 않아도 이미 벌을 충분히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주님은 음욕을 품는 것 자체가 가늠이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테레비를 보면서 잘생긴 탤런트를 보고 얼마나 음욕을 품고 있습니까? 그거 가늠 아니에요? 가늠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도 가늠한 자이고 살인자인데 하나님의 긍휼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아까 집사님이 남편이 그러고 있으니까 지휘자가 차 태워주고 가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거죠. 우리가 누구를 정조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죽이고 죽고 음욕대로 행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가면서 어떻게 심하다 때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조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부인이 옳다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그 속에서 나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속으로 마음을 가졌지만 행함으로 옮기지 못하는 내가 잘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분노와 상처로 아파서 다 정신병원에 있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나 때문에 창자가 끊어지도록 아파하시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내가 이 정도로 살고 있다는 거 아십니까? 내 자신이 얼마나 긍휼히 필요한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은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불쌍해하고 염려하는 것이 긍휼히 아니라 찾아가서 상처를 만져주고 안아주고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 그 실천까지 가는 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내가 긍휼히 여겨할 사람이 옆에 있다면 그것이 나의 복입니다.
저 사람만 없다면 나한테 복이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있어서 내게 복이 있습니다. 저 나라만 없으면 저 나라가 있어서 우리나라가 복입니다. 이번에 이제 이렇게 파리 테러 났습니다. 그 희생자 그 남편이 그 앙토왕 레르라는 사람이 자기 부인이 갔는데 그런 글을 올렸어요. 막 지금 20만 건이 넘게 클릭이 되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신이 그의 모습대로 우리를 만들었다면 내 안에 몸에 박힌 총알이 그 신의 마음에도 상처를 내 아프게 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분노라는 선물을 하지 않을 거라고. 분노를 되돌려주는 것은 당신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무지함을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당신들은 내가 두려워하기를 원하겠지만 우리는 우리 일상을 그대로 영유할 것이라고. 나는 곧 내 안에와 우리 가족이 그대는 절대로 오지 못할 자유로운 영혼이 숨쉬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와 내 아들 이제 우리는 둘만 남았다고.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대라고. 17개월 된 그 아들과 이제 곧 나는 점심을 먹을 거고 곧 뛰어놀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인생을 살아갈 것이라고. 이것이 당신에게는 얼마나 모욕적인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제 우리는 그렇게 잘 살 거라고. 당신이 우리가 두렵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실패했다고. 바로 이렇게 정말 이것이 그들을 극히 여기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정말 두려워하지도 아니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참 불쌍히 여기고 이런 한 마음이 정말 우리가 어디까지 우리가 기도를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도 보니까 아프가니스탄은 양기비 그 마약으로 전체가 이제 다들 그냥 그 피골이 상접해 가지고 그 마약 다 주사를 하고 하는데 그렇게 모여 있어 가지고 정말 그 정말 너무나 불쌍해서. 그런데 그것이 탈레반의 수입원이고 무기입니다. 공급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계속 그냥 하도록 한다는 거예요. 그 땅은 밀가루를 심으면 수확이 안 된답니다. 밀가루를 수확해도 양기비의 10분의 1도 안 되니까 사람들이 그것이 그렇게 나쁜 건 줄 알면서도 자 그걸 계속 심는다는 거예요.
도대체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전부 모여 가지고 다 양기비 피고 있어요. 굴 같은 데 모여 가지고 다 피고리 상접해서 주여 어찌하오리까,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민족 이 세계를 어떻게 해야 될까요? 적용해 보겠습니다. 비록 가족이라도 인연을 끊고 싶은 연약한 식구가 있습니까? 우리는 탈레반 막 없어졌으면 좋겠는 거예요.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나를 회개한다는 것,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 되는데 연민을 느끼지만 찾아가거나 만나기는 싫어서 돈만 붙이는 얄팍한 극류를 보이지는 않나요? 죽으시는 순종으로 내게 베푸신 주의 긍휼을 생각하며 몸으로 실천하는 긍휼을 보여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정말 애통밖에 안 됩니다.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주리고 긍휼히 여기는 자는

6. 마음이 청결하다고 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욕심 없는 빈 마음이나 행위의 청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위시 유부녀 바세바와 불륜을 행하고 계약을 세워서 그 남편 의리아를 죽게 하고 가는가 거짓말과 살인을 행했습니다. 행위로는 청결하다고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털어서 문제 안 날 사람이 없지만 당시 누군가 도청을 했다면 다위시 얼마나 걸릴 일이 많았겠습니까? 당장 왕위에서 물러날 만한 엄청난 스캔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음이 청결한 자였습니다. 나단 선지자가 와서 죄를 지적했을 때 즉시 죄를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바세바 사건을 통해 모친이 죄악종에서 날림태했다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웃을처럼 나를 청결케 해달라고 자신의 죄가 씻어지기를 간고했습니다. 자기 죄를 고백하며 흘리는 눈물이 우리의 마음을 청결케 합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나는 잘못한 게 별로 없어. 이런 사람이 청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부도도와 비리를 저질렀어도 그 죄를 인정하고 회귀하는 사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율로 죄짓심을 받고 거듭난 사람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불신자는 결코 볼 수 없는 하나님이지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 만물을 통해서도 환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두 눈을 주신 것은 두 곳을 보라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정확하게 보라는 것입니다. 카멜레온은 한쪽 눈은 이쪽을 보고 한쪽 눈은 저쪽을 볼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사람을 사랑할 때도 양쪽을 쳐다보고 두 마음을 품는 것은 배신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다들 자신만을 쳐다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전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지만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마음 속에 두 마음이 있어 날마다 싸움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청결입니다.
내가 날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의 연약함과 죄 때문에 너무나 아플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가 청결한 자입니다. 적용해 보세요.
1.
하나님이 내게는 안 보인다고 불평하십니까?
2.
내 죄를 회개하는 눈물로 마음이 청결케 돼요.
3.
주변의 모든 환경과 사람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까?
어떤 힘든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사람은

7.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는 거예요.

그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천국에 속한 사람은 화평케 하는 자입니다. 화평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무려 400번 정도 나옵니다. 성경은 평화를 그렇게 중요시합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루어지고 내 속에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웃과 화평하게 되고, 그 일을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어주심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화목재물이 되어주셨다면, 우리도 이제 남을 위해서 화목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수동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서 갈등과 다툼과 원망의 자리에 들어가 화목재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제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유다가 그냥 이름도 없이 빚도 없이 요색과 그 형제들의 중재자, 화해자가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렇게 됩니다. 목숨을 걸고 화해자가 됩니다.
구원 때문에 중재자가 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로 수치를 당해봐야 이렇게 화해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남편의 수입이 적어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가정주부가 동네에서 구멍가게를 내고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정직하고 친절하게 장사를 하니까 날마다 트럭으로 물건을 실어와도 모자랄 지경이 되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남편이 들어와서 '여보, 어쩌지? 우리 집 때문에 다른 동네 가게들이 망하게 생겼어, 오늘 저 건너편 가게 완전히 문을 닫았대.' 그래서 다음 날부터 부인은 트럭으로 물건을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몇 가지만 선별해서 받았어요. 그래서 물건을 사러 오면 건너편 가게나 다른 가게에 가서 살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여유 시간이 생겼어요. 자신이 좋아하던 그 여유 시간에 책 읽기와 글쓰기를 마음놓고 했습니다. 그 부인은 그 시간에 결국 소설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빙점'입니다. 그래서 그때 일본 돈으로 천만엔, 아주 어마어마한 액수의 그런 상금을 받아서 그 돈도, 명예도 얻고 재물도 얻었습니다. 척추 카리에스라는 장애를 가진 주부 무유라 아야꼬가 이해타산을 포기하고 그 여유 시간에 쓴 글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웃간의 화평을 위해 내 이익을 포기했을 때, 하나님은 돈도 주고 명예도 주셨습니다.
그럼 우리들 교회 찾아오는 사람도 '이 교회 가세요, 저 교회 가세요' 제가 좀 그래야 되지 않을까요? 제가 이해타산으로 그렇게 한다면, 정말 그래도 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다 회복이 되면 얼마든지 다른 교회 찾아가셔도 됩니다. 여러분들의 급한 불만 끄시면 정말 저는 여러분들이 가정을 중수하기를 바라고 또 이제 죽지 않고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날마다 현수막도 “그럼에도 살아냅시다, 살아줘서 고마워요.” 이런 것만 써놓는 우리들 교회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해결되면 정말 가는 사람만 막고 오는 사람 안 막습니다. 정말 이 마음이 그 마음이에요. 우리 교회는 현재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것이 꼭 옳은 것만은 아니에요. 항상 그 구속사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은 아마 여러분들이 이제 다 돌아가시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그런 교회에요. 다 왔다가 돌아가는 교회에요. 매일 이런 팔복의 설교를하는 데, 누가 붙어 있겠습니까? 조금 해결됐다 하면 다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또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나 성숙한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여러분들 누가 이렇게 간다고 해도 너무 놀라지 마시고, 또 갈 사람이 가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적용해 보세요.
1.
가정과 직장 내의 갈등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인내와 성김을 보이며 화평을 이룹니까?
2.
인간적인 의와 이해 타산 때문에 간에 붙었다 쓸게 붙었다 하는 그 비겁한 화평은 아닌가요?
그래서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이 여기고 마음이 청결한 자는 화평케되고

8. 이제 마지막으로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의 복이 있다고 해요.(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입니다. 내가 주님 때문에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애 줄이고 목마르고 극률이 여기고 청결하게 되고 화평케되면 뭐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팔복대로 사는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핍박입니다. 팔복대로 살기 시작하면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게 아니라 본격적인 욕과 핍박과 악한 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팔복을 너무 좋아하는데 이 부분에서 성경책을 집어던졌대요. 이제 다른 것은 불교나. 유교나 이렇게 말로는 비슷해 보이지 않아요. 근데 결국 그렇게 살았더니 핍박이 오더라. 부부가 함께 교회 다니지만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인이 있었어요. 부인은 평소 자신을 무시하는 남편의 말과 태도로 인해 우울증을 알았고, 날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서 시체처럼 살았습니다. 이 부인이 우리들 교회 와서 살아나기 시작했어요. 시체같은 사람이 얼굴도 환해지고 목장에서 교재도 잘하고 건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신이 나서 남편에게 교회 얘기를 하니까, 남편은 "너 그 교회 가더니 광신도 됐구나. 교회 가지 마. 그냥 우울증으로 누워 있어. 누워 있는 게 더 낫다." 비록 교회 다니는 사람이지만 뭔가 영적인 열등감이 느껴질 때 부인이 믿음으로 기쁘고 즐거워졌는데도 이렇게 핍박을 했습니다. 다 당해본 건 아니지만 육체적으로 고문을 당하고 거짓말에 당하고 악한 말을 듣고 누명을 쓰는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런 핍박 속에서 12절처럼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한다는 거 너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믿음 때문에 핍박 당할 때 즐거워 하는 것, 이게 천국이고 부활입니다. 우리는 부부 싸움만 해도 자식이 말을 안 들어도, "내가 죽겠어. 죽겠어. 못 살아. 못 살아." 가 주제인데, 우리를 핍박하고 때리고 욕하고 음해하고 모함하고, 이런 사람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 하기는 약간 힘들 것 같지 않아요?
이게 바로 천국 아닐까요? 이게 바로 천국일 것 같아요. 팔복의 핵심은 가난이고, 주제는 핍박이라고요. 팔복은 시작도 끝도 천국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핍박받지만 환경을 초월하시는 주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 주님의 제자가 갈 길입니다. 복음은 세상의 고정관념을 깨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외치는 사람들, 복음대로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은 그를 미워했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대하는 태도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당장 우리가 직장에서 술을 물어도 안 끼면 핍박당하죠. 또 뇌물을 받아야 될 때 같이 사바사바해서 뇌물 받자고 했을 때 안 받는다. 그러면 그것도 핍박.
'넌 굉장히 훌륭하다' 이런 사람 아무도 없고, '넌 완전히 쪼잔하다' '별애별 소리를 다 합니다.' 교회 가는 것도 여러분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고 오십니까? 적용을 해보세요. 크리스찬으로서 뇌물을 거절하고, 술자리를 거절해서 따돌림에 핍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믿음 때문에 참고 양보했다가 미련하다는 그 악한 말을 들었습니까? 그것을 참고 인내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믿음을 높게 보셨구나 하며 적극적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이 왕따를 당했을 때 적극적으로 기뻐할 수 있을까요? 제가 팔복 말씀을 거꾸로 풀어 놓으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잘 들어보세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고, 심령이 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가 아니고 화가 있나니. 지옥이 저희 것이며, 그러니까, 심령이 부유한 자는 화가 있나니. 지옥이 저희 것이며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아깝게 없는 사람은 지옥이 저희 것이래요.
정말 잘 들으세요. 다시 육이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영으로 세워질 수가 없어요. 육이 무너지지 않은 사람은 심령이 부유해요. 여긴 심령이 가난하다고 그랬지만, 마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하다고 그랬어요. 가난한 자, 가난한 자가 천국에 임하기가 쉬워요. 부유한 자는 지옥이 저희 것이며, 거꾸로, 그러니까 그대로 거꾸로 하면 부유한 자는 지옥이 네 거다. 이렇게 되는 거죠. 지금 부유한 자가 여기를 앉아있고 싶겠어요. 저는 맨날 성도 좁는 설교를 하는데 1등이에요. 죄 때문에 애통하지 않는 자는 화가 있나니 위로 받지 못할 것이며, 내가 남편이 죽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내 죄 때문에 애통하지 않으면 남편이 살아나서 위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위로를 받는 건 내 죄 때문에 애통하셔야 돼요. 혈기 부리는 자는 화가 있나니 땅을 얻지 못해요. 그래도 날마다 혈기 부려요. 진급이 안 돼서 혈기 부리고 놀러가지 못해서 혈기 부리고 리조트가 없어서 그냥 혈기 부리고. 나는 이 땅이 모두 내 건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안 가는데 완전히 땅을 기업으로 받지 못해요.
혈기와 분노의 대마왕은 평생에 혈기 부리다가 이제 땅을 얻지 못한답니다. 자기 위를 자랑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자기가 맨날 잘났대요. 맨날 나는 옳고 너는 그렇대요. 그런 사람은 늘 배고프대요. 그러니까 배고파 죽겠고, 불러 죽겠고, 미워 죽겠고, 싫어 죽겠고, 맨날 죽겠고, 죽겠고 이렇게 배고픕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는 자는 화가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며. 누가 나를 위해 창제가 끊어지도록 기도해 주겠습니까? 더러운 자는 화가 있나니?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요. 분열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분열케 하는 자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걸음을 받지만, 분열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사단의 자식이라 일걸음을 받을 것입니다. 핍박받지 안된 자는 화가 있나니? 지옥이 저의 것입니다. 처음에 가난한 자와 핍박받는 자의 복이 제일 큽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이 저의 것이고, 핍박받지 않는 자. 그러니까 부여한 자는 지옥이 저의 것이고, 핍박받지 않는 자도 지옥이 저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은 지옥이 내 것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셔야 돼요. 어떻게 예수를 믿는데 지옥이 없을 수가 있어요? 아니, 어떻게 핍박을 받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핍박은 따라오는 순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팔복대로 살기를 끔찍하게 생각하고 세상에 한눈 팔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으로 가장 확실한 투자는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줄이고 핍박받는 것입니다. 팔복대로 사는 삶이 가장 성공하는 삶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어떤 활란과 고통을 당할지라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어떤 욕을 먹고 억울한 소리를 들어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해도 우리는 괜찮습니다. 잠을 자지 않으면 원하는 대학과 직장의 합격을 보장해 주겠다고 하면 그까짓 거 얼마든지 포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잠자고 싶어서 대학과 직장을 포기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땅에서의 가난과 핍박은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는 세상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포기 못해서 영원한 천국을 포기한다면 그것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곳에 갈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괜찮고, 가난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울어도 괜찮고, 잠 못 자는 것도 괜찮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부도가 나도 자식이 가출을 해도 문제 없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약속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어떤 일을 당해도 우리는 천국을 놓지 말아야 합니다. 공동체 고백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저 스스로 믿음이 좋다고 착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사법고시에 실패하자 교회 나가지 않게 됐습니다. 하나님께 억울하고 섭섭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제 믿음이 기복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잘 돼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거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보이지 않는 제 인생은 아홉 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아버님이 재혼하고 새 엄마와 이복 동생들 그리고 그 이혼이 어머니의 외도로 인한 것임을 알게 돼요. 저는 제 사연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누군가에게 말을 꺼낼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또 온해를 베푸셔서 안정적인 대기업에 취직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반대하는 아버지와 새 엄마가 결혼식에 오지 않는 이 분노와 혈기로 친년과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습니다. 전화를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고 형님이 명절에 아버지에게 가자고 하면 그런 말을 할 거면 전화하지도 말라고 아버지 장례식에도 갈까 말까 고민 중이고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싶었던 분노와 혈기는 이제 돈과 권세가 생기자 음란,술,도박,골프,다양한 중독으로 번져갔습니다. 바람까지 피게 되었습니다. 이혼과 파탄 지점까지 가게 됐습니다. 아내는 우울증으로 첫째 딸은 분노조절 장애로 둘째 딸은 야뇨증으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가난과 애통으로 몰고 가는 환경입니다. 모태신앙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몰고 가시는 축복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에게 제 설교가 들렸어요. 그리고 이제 멀리서 간증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들교회 옷자락을 잡았습니다. 처음으로 수치스럽던 가족의 사연과 마음속에 분노와 미움, 원망 혈기를 목장에서 쏟아냈습니다. 많은 눈물로 애통을 했고, 그렇게 제 혈기와 음란의 근원이 말라갔습니다. 고난과 상처의 혈류증을 치유받으려고 목장에 다녔지만 예수님의 계획은 그것 이상이었습니다. 저는 큐티로 매주 큐티를 하게 되었고 이 먼 지방에서, 예수님은 말씀으로 저를 주리고 목마르게 하셨습니다. 저는 가족의 사연을 넘어서면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조금씩 살아나고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기적같이 예수 공장에서 서울 본사로 발령을 해주셨습니다. 멀리서 옷자락을 잡던 제가 판교 가까운데로 이사를 하고 판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부부 목장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구한 것이 팔복이 아니라 기복이었음을 인정하게 되었고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심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혈기와 음란의 근원이 마른 제 사건을 통해 저와 같이 이혼과 부모의 분노와 혈기로 아파하는 다른 지체들을 돕기 위해 제 사건을 오픈하고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적용을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이분은 혈기 부리고 분노 가운데서 지옥의 자식이 될 뻔했는데 말씀이 들리는 축복,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되어 천국이 저희 것이 된 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팔복의 가치관이 서서히 들어오시고, 또 이분도 들어오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 죽고 싶은 고난을 통해서 이제 가난해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온유로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로 나가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화평케 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서 박해를 받는 그 수준까지 가는 그 복임하기를 바랍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온유 한자는 복음으로 위로를 받을 것이오. 나의 가난을 보고 한경 때문에 애통하지 말고, 나의 죄 때문에 애통하시기를 기도하십시다. 성품의 온유가 아니라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지위와 재물 때문에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십자가로 처리된 온유로 나가서 구원을 이루기를, 그래서 말씀에 줄이게 해달라고, 의에 주리게 해달라고, 긍휼히 여기게 도와주시고, 청결하게 해주시고, 화평케하는 자가 되며, 그로 인해 이제 박해까지 받을 수 있는 이 팔복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다같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기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너무나도 잠깐이고, 장차 이루어질 영광은 좋게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늘나라에 복을 주기를 너무나도 원하십니다. 참으로 이 복을 주기를 너무나 원하십니다, 아버지. 그러나 제가 가난도 겪고 찢어지게 참으로 힘든 이 고학 시절도 해보았지만, 가장 힘든 것은 사람과의 관계였습니다. 제가 부동나고 고학을 하면서는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지만, 사람때문에 제가 자살하고 싶었습니다. 끊임없이 사람에 주리고 세상에 주려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너무 얄팍해서 가족이라도 끊고 싶은 연약한 식구가 있습니다. 그러니, 내 안경을 통해 하나님을 보기보다 안 보인다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내 식구가 연약한 식구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만하고 싶어서,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 때문에, 그 힘든 과정을 통해 가난하고 애통하고, 의에 주리면서 마음이 청결해져가는 이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핍박도 받으며 기뻐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은 '저 여자가 언제 무너질까' 하면서 식구여 받겠지만, 저는 하루로도 안 무너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날마다 오늘이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에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가난하고 애통할 수밖에 없어서 날마다 눈물을 흘리며 오니 두려워, 사람들이 달라지고 이혼을 거치고 어떤 것으로도 안 되던 사람이 말씀으로 치유가 되는 것을 볼 때 제가 이것이 바로 천국이 저의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 기쁨이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내 배우자가 자녀가 부모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를 빚박한다면 그것을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국을 소유하게 이 땅에서 어떤 일을 당해도 뒤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어떤 일을 당해도 천국을 놓지 않겠습니다. 이런 팔봉을 누리면서 우리 모두 천국에서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천국에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나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20살이 되자마자 알바를 병행하며 살아왔고 언제나 자급자족해오며, 번 돈도 가족들에게 갖다주며 살아왔습니다. 역기능가정 속에서, 아버지는 저한테 받은 게 없고 준 것만 있지만 저는 가족들에게 마이너스 되지 않게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그 끊어진 선 안에서, 저는 부재중이었던 부모님을 미워해야할지 그 돈을 아무렇게나 쓴 형을 미워해야할 지 항상 헷갈려했습니다.
언제나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이번 양육이 기회가 되어 처음부터 가난한 자가 아니라 스스로 힘 있는 자였구나 싶습니다. 완전히 수동적으로, 가난한 자신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일 때 비로소 말씀이 들립니다. 저는 제 힘으로 말씀도 듣고, 제 힘으로 봉사도 하고, 제 능력껏 섬기고, 제 능력껏 참고, 제 능력껏 가족들을 미워하지 않으려했고, 지금도 제 힘으로 그래도 이번 달 생활비만큼은 벌어내자 하며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제 삶은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가 베스트 컨디션으로 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으로 그게 내 힘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팔복을 누리지만 팔복이랑 상관없는 삶들이 많이 부럽고 저건 어떤 기분일까, 나는 매순간 깨있어야되고, 작전을 짜야하는데, 하며 긴장때문에 잘 쉬지도 못하는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나이에 비해 많은 적용과 많은 경험/약재료가 있음은 제 자신을 살아내게합니다. 아직 사명이 있겠지하며 하루를 버티게 해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수동적이고 스스로 답을 못 찾아가는 가난한 제 인생에 화평이 찾아오길 바랍니다.

적용

1.
박해하던 형과 박해하는 누나에 대해 미운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2.
해석보다 지금은 해결도 필요한 상황인만큼 공급해주시기를 기도하기

기도

하나님 오늘 팔복을 통해, 제가 사실은 이런 상황에도 아직도 능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열정이나 에너지로 아직도 세상을 감당해보려들지만 역부족인 현실에 낙담하는 죄인입니다. 때마다 하나님은 왜 안 돕고 가만히 계시냐는 역정이 올라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원망하나 사실은 세상논리에 굴종하는 제 태도를 꺼내보이시고, 하나님의 뜻에 주리도록 겸손한 환경을 허락해주심에 감사합니다. 원칙적으로/율법적으로 제 상황과 해석을 갖다대는게 아니라 인내로 시간을 쌓아, 깊은 공감능력을 키우는 시간임을 믿습니다. 팔복의 때를 온전히 누리고 애통한자로, 온유한자로, 긍휼히 여기는 자로, 그리고 의를 위해 박해받아 복을 누리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