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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통이다

쇼펜하우어의 고뇌, 라깡의 욕망, 그리고 불교의 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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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고통이다. 이는 쇼펜하우어 철학의 출발점이자 불교 사상의 핵심 명제이기도 하다.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의 근원을 의지와 욕망의 메커니즘에서 찾습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욕구하게 만드는 맹목적 의지, 그리고 충족되는 순간 새로운 결핍을 낳는 욕망의 굴레. 이것이 바로 인간 실존의 비극적 조건이라는 것이죠.
(주석) 쇼펜하우어의 '의지'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의지'와는 의미가 조금 다릅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한 의지는 모든 생명체를 움직이는 원초적이고 맹목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이 의지는 끊임없이 욕구하고 갈망하지만, 그 욕구가 충족되는 순간 곧 새로운 갈망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인간은 끊임없는 결핍과 불만족 속에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주장입니다. 반면 '표상'은 의지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현상 세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은 의지의 표상일 뿐이며, 의지 자체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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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라깡이 말한 욕망의 개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라깡에게 욕망이란 근원적 '결여'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지만 그 욕망의 대상은 영원히 우리를 비껴갑니다. 욕망은 주체를 움직이는 동력인 동시에 주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주석) 라깡은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말의 개념은?
라깡이 말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개념은 주체의 욕망이 본질적으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타자의 시선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 예로 SNS에서의 인정 욕구: 타인의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태도에서 타자 욕망을 향한 갈망이 드러납니다.
소비 사회: 우리는 광고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소비함으로써 '욕망받는 나'가 되고자 합니다. 물건 자체보다 그것이 상징하는 가치에 욕망하는 거죠.
획일화된 욕망: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지배적인 욕망의 틀에 자신을 맞추려 하다 보니 주체의 고유한 욕망은 억압될 수 있습니다.
욕망의 전도: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워하거나, 욕망의 진정한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쇼펜하우어와 라깡의 사유는 이처럼 인간 존재의 딜레마를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우리는 의지와 욕망의 추동 아래 고통받지만,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습니다. 의지는 생의 본질이고 욕망은 우리를 구성하는 필연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요?
쇼펜하우어는 예술적 관조, 공감과 연민, 금욕적 삶을 통해 의지로부터 일시적으로나마 해방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찰나의 자유일 뿐, 결국 우리는 다시 의지의 노예가 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 사상과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의 실상인 무아(無我)를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날 것을 가르칩니다. 열반의 경지에 이르러 근원적 자유와 평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해탈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의지의 본질을 철저히 통찰했지만 그것을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이는 그가 '철학자'로서 인간 실존의 한계를 직시했기에 내린 결론이 아닐까 유추해 봅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한계가 그의 사상적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아닐겁니다. 오히려 그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본질적 조건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고통의 근원과 욕망의 메커니즘을 철저히 탐구함으로써, 보다 깨어있는 삶을 향한 지혜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통찰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의지와 욕망의 지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그 속에서도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것. 라깡이 욕망을 긍정하고 욕망의 실존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처럼 말입니다.
불교의 가르침 역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열반의 경지가 아니더라도 맑고 평온한 마음, 자비와 연민의 태도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고통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발견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닐까요?
쇼펜하우어, 라깡, 불교. 이들의 사유는 인간 실존의 고통과 욕망이라는 물음 앞에서 각기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그 물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의미를 모색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궤를 같이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지혜를 교차하며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고통과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삶. 그것이 쇼펜하우어를 넘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는지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