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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일자
2023.10.06 (금)
이름
호리코시 요시하루,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필사X
"'본다'는 말을 자주 쓰시는군요." 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그러게. 그럴 수도 있다. "오늘 아침에 텔레비전에서 봤는데"라든가 "좀 보여줘" 같은 말은 항상 하는 듯하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굳이 "텔레비전을 들었다"라든가 "조금 만지게 해줘"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는 부족에 속하는 사람들은 이런 나를 역시 부자연스럽게 느낄까?
어느 날 강연이 끝난 후 밥을 먹는데 한 청중이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재미있네요. 이야기 중에 '보다'나 '읽다'라는 말을 하시던데, 실은 전혀 읽지 못하시잖아요?" 이 말을 듣고 돌이켜 생각해보니, 분명 조금 전에 긴 인용을 했을 때 손에 잡히는 점자 자료의 문자대로 '읽었다'. 하지만 '읽는다'의 뜻을 종이에 눈을 떨어뜨리되 손을 사용하지 않는 행위라고 규정한다면, 그때 내 행동은 '더듬는다' 또는 '뒤적거린다'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 것이며 '읽는다'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점자를 '쓴다'고 말하지 못하고 '친다'거나 '찍는다'고 말하는 것도 결국 그런 보이는 모습에서 오는 인상으로부터 유래했을지 모르겠다.
필사O
'보다'라는 말을 쓸 때, 사람들은 얼마나 순수하게 눈으로 본 것만 이야기할까? 텔레비전과 꿈만 해도 그렇다. 그저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기를 봐줘" "목욕물을 봐" "냄비 좀 보고 와"라고 했을 때 그저 "응, 봤어"라고만 하면 꾸중 들을 게 분명하다. '보다'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메타포인 것이다. 아마 '인정한다는 것은 눈에 담아두는 것이다'라고 여기는, 눈으로 보는 부족의 감각이 이런 비유를 만들어냈으리라. 그렇다면 눈으로 보지 않는 부족인 우리 또한 이 비유의 세상을 살아가는 주민으로서 어떤 부자유도 없을 것이다.
메타포란 훌륭한 것이다. 마음속의 '상상력'이라는 감각기관을 작동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경치를 보여주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려주며, 경험한 적 없는 감각을 생생하게 느끼게 하고, 어려운 것을 손에 쥔 듯이 알게 해준다. 이는 우리 같은 감각장애인에게도 완벽하고 평등하게 작용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풍요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문이 열린다. 이렇듯 우리는 '본다'. 단지 눈으로 보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생생하게 '신(scene)'을 획득한다. 그렇게 '신(scene, 풍경)'은 결코 '신(seen, 보이는)'이 아니다.
일자
2023.10.09 (월)
이름
호리코시 요시하루,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필사X
장애인의 고용에서 굳이 '자력으로 통근 가능할 것'이라는 조건이 달라붙는 배경에는 '건상자'는 당연히 '자력으로 통근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건상자'와 달리 자력으로 통근할 수 없는 장애인은 한 명의 사람으로서 '자립'했다고 할 수 없으며, 그 때문에 행정기관과 회사가 특별히 배려하고 또 모두의 세금을 사용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어떤 강연 중에 연사가 갑자기 "자, 여러분. 자리에서 일어나보세요"라고 한 적이 있다. 여우에게라도 홀린 기분이었지만 일단 일어났더니 연사는 이렇게 질문했다. "여러분은 지금 정말로 자기 힘으로 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점점 더 여우에게 홀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자 연사가 이렇게 말했다. "지구 중력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그렇게 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야 그렇다. 이렇게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의 힘을 빌려서 살고 있나. 예를 들어 공공 교통과 가스, 수도 등 이른바 인프라라고 불리는 것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그럭저럭 '자립생활'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다.
필사O
인프라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는 이들은 바로 '건상자'이다. '건상자'는 엘리베이터가 없더라도 계단의 도움을 받아 쉽게 오르내릴 수 있다. 점자 블록이 깔려 있지 않아도 플랫폼과 도로에 그어진 선을 보면서 안심하고 걸어갈 수 있다. 또 역과 건물 게시판에 있는 문자와 지도의 힘을 빌려 빠르고 정확하게 목적지에 도착한다. 차내 안내 방송 목소리 덕분에 비상 사태를 알게 되고, 곧장 대처법을 결정한다. 말하자면 '건상자'는 '완전 의존 상태'이다. 이 충분한 도움에 완벽하게 의존하는 그들은 '자립'해서 그럭저럭 '자력'으로 통근할 수 있다.
이에 견주어 우리 장애인이 의존할 수 있는 곳은 아직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 어쩔 수 없이 '자력'으로 다양한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때는 가족과 가까운 사람들 또는 지나가는 사람에게 도움을 부탁한다. 공적 서비스와 제도를 이용할 때도 있다. 때로는 국가와 행정에 제도와 인프라를 확충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런 우리 모습이 사회에는 "장애인은 많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으며, '자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전혀 '자립'했다고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비치는 모양이다.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패러독스인가!
일자
2023.10.11 (수)
이름
호리코시 요시하루, 『귀로 보고 손으로 읽으면』
필사X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이런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반드시 선생님들에게도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대학에서 준비한 어린이들의 교류교육연구회에 초청받았을 때 생긴 일 때문이다. 당시 특수학교(양호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무리 우리가 아이들의 모습이나 수업 내용을 소개하려 해도, 보통은 학교 선생님들이 굳이 자기들이 준비한 프로그램대로 하려고 해요. 그래서 필요 없는 도움을 준다든가 이해할 수 없는 책 읽어주기 같은 것을 한 뒤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리는 거죠. 어이없어서 멍하니 있다 보면 며칠 뒤에는 엄청나게 많은 작문 더미가 날아와요. 거기에는 도장이라도 찍은 듯 이런 말이 써 있지요. "모두 몸이 자유롭지 않아 힘든데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래에는 그런 아이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아이들도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우리는 정말 제멋대로 살고 있어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뒤 내가 이야기해야 할 상대는 아이들이 아니라 오히려 선생님이 아닌가 싶어졌다.
필사O
강연이 끝난 뒤 장소를 옮겨 선생님들과 간담을 나눈다. 나는 이렇게 물어본다. "여러분은 평소 학생들에게 장애인은 곤란한 일이 많으니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말을 걸어 도움을 주라고 가르치시지요? 여러분 스스로는 어떠십니까? 자신은 그렇게 못하면서 아이들에게만 그렇게 말하고 계신다면 이 좋은 메시지가 아이들 마음에 순수하게 전달될까요?" 그러면 보통은 조금 전까지 아주 좋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해진다. 언젠가는 바로 옆에 앉은 교장 선생님이 너무나 불쾌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세 번이나 몰아쉰 적도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선생님들을 적대시하고 책임을 묻는 것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좀 더 나은 사회를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니 우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부터 '곤란한 상황에 놓인 장애인 vs. 도와주는 건상자'라는 전형적인 대립 구도에서 해방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장애인과의 교류를 단순한 제목이나 '일상 업무'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 즐길 수 있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앞으로도 이 방침을 바꿀 생각은 없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강연 의뢰가 점점 줄어든다. 뭐, 어쩔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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