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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일자
2024.05.10(금)
이름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필사 X
모든 면에서 내가 상상한 인도가 아니었다. 영적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났는가? 아니다, 걸인과 가짜 수행승이 더 많았다. 갠지스강은 순결하고 성스러웠는가? 아니다, 시체가 종종 떠다녔다. 거리에는 꽃들이 향기를 퍼뜨렸는가? 아니다, 각종 똥이 더 많았다. 조화롭고 지혜로운 이상세계였는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부조리함과 혼돈에 머리가 어지러운 세계였다.
그렇다, 내가 기대한 인도가 전혀 아니었다.
필사 O
그래서 그 낯설고 특별한 세계에 정신이 압도당하고, 나의 단단한 에고의 층을 생생한 경험들로 부수었으며, 예상하지 못한 숱한 사건으로 나의 여정을 다채롭게 색칠해 나갈 수 있었다. 나는 나의 관념으로 그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나의 작은 자아를 부수기 위해 간 것이었다. 세상의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이 내 생각과 선입견을 비우고, 안으로 깊어지고 밖으로 더 넓어지기 위해.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무엇인 줄 아는가? 자신이 상상한 인도가, 자신이 기대한 명상 센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 보니 자신의 생각 속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자유 영혼임을 느낀다. 타인의 예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라면 생생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일자
2024.05.13(월)
이름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필사 O
<기차에서의 인생 수업>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무렇지 않은 듯 마음속에 묻어 둔 일들을 여행지의 카페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처음 만난 이에게 조금의 가식도 없이 털어놓는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열 용기를 주는지도 모른다. 남자는 한 번도 시선을 창밖으로 돌리지 않고 한 번도 내 얘기를 끊는 법 없이 그저 따뜻하고 다정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어떤 대화는 감정의 정화 작용을 한다. 그 감정이 대단한 것이든 아니든, 혼자만 기억할 가치가 있든 없든 간에 우리의 감정은 진심으로 들어 주는 누군가와 나눌 때 단단한 껍질이 깨어진다. 그리고 금 갔던 곳이 조금씩 아문다. 섣불리 조언하거나 어리석음을 지적함 없이 끝까지 들어 주는 일의 힘이다. 고백이 끝난 후의 긴 침묵까지도.
필사 X
이윽고 기차가 뭄바이의 유서 깊은 차트라파티 시바지 역에 도착하고 우리는 내릴 때가 되었다. 가방을 챙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힌디어로 나에게 말했다.
“내 이름은 람쿠마르입니다. 나는 영어를 거의 할 줄 모릅니다. 힌디어도 서툽니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내 가슴으로 들었습니다. 신의 축복이 당신과 함께하기를!”
우리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마음속에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사는 것만큼 큰 고통은 없다. 기차 안에서 만난 그 인도인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내 말을 들은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들었다. 모든 만남의 궁극적인 의미는 조언이나 설교가 아니라 포옹이다. 포옹이 필요한 사람에게 강의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일자
2024.05.15(수)
이름
류시화,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필사 O
<네가 어떤 기분인지 내가 잘 알아>
의학적인 충고에서부터 사랑과 상실에 대한 조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도와줄게, 내 말 들어봐.”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무엇이 다른 사람에게 최선인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같지만 길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이야기할 때는 상대방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파머는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조언을 듣거나 바로잡아지거나 구원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주고, 들어 주고, 동반자가 되어 주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가 고통받는 사람의 영혼에 깊은 절을 할 때, 우리의 그러한 존중은 그 사람이 고통을 극복하는 중요한 치유 자원이 된다.”
필사 X
화살을 등에 맞은 사람이 아픔을 호소할 때,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내! 그 고통 내가 잘 알지. 하지만 별거 아니야. 나는 화살을 세 개나 맞은 채로도 잘 살아가고 있어.” 하고 말하며 자기 등에 꽂힌 화살들을 보여 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더 큰 두려움을 안겨 줄 뿐이다. 앞으로 더 많은 화살이 등에 꽂힐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한 개의 화살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이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될 테니까.
‘모두가 겪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다.’라는 식의 암시는 조언이 아니라 무시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군가는 화살을 다섯 개나 등에 꽂고도 성공해서 잘 살고 있다고 예를 든다. 위로도 아니고 격려도 아니며, 호러일 뿐이다. 그때 관계는 멀어진다. 영혼이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지금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서 “당신 말이 옳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자기도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