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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일자
2024.08.09(금)
이름
법정, 『무소유』
초록색
글씨만
필사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 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무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일자
2024.08.12(월)
이름
법정, 『무소유』
초록색
글씨만
필사
인간의 일상생활은 하나의 반복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대개 비슷비슷한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고 있다. 시들한 잡담과 약간의 호기심과 애매한 태도로써 행동하고 거지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성찰 같은 것은 거의 없고 다만 주어진 여건 속에 부침하면서 살아가는 범속한 일상인이 있을 뿐이다.
자기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별난 사람이 있었다. 필자는 그를 데리고 불쑥 망우리를 찾아간 일이 있다. 짓궂은 성미에서가 아니라 성에 차지 않게 생각하는 그의 생을 죽음 쪽에서 조명해주고 싶어서였다. 여지가 없는 무덤들이 거기 그렇게 있었다.
망우리! 과연 이 동네에서는 모든 근심 걱정을 잊어버리고 솔바람 소리나 들으며 누워 있는 것일까. 우뚝우뚝 차갑게 지켜 서 있는 그 비석들만 아니라면 정말 지극히 평온할 것 같았다. 죽어본 그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만약 그들을 깊은 잠에서 불러 깨운다면 그들은 되찾은 생을 어떻게 살아갈까?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가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에 살고 있으면서도 곧잘 다음날로 미루며 내일에 살려고 한다. 생명의 한 토막인 하루 하루를 소홀히 낭비하면서도 뉘우침이 없는 것이다.
바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의 음악에서 장엄한 낙조 같은 걸 느낄 것이다. 단조로운 듯한 반복 속에서 심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일상이 심화 없는 범속한 되풀이만이라면 두 자리 반으로 족한 “듣기 좋은 노래”가 되고 말 것이다. 일상이 지겨운 사람들은 때로는 종점에서 자신의 생을 조명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심화를 위해서.
일자
2024.08.14(수)
이름
법정, 『무소유』
초록색
글씨만
필사
<침묵의 의미>
현대는 말이 참 많은 시대다. 먹고 빼어내는 것이 입의 기능이긴 하지만, 오늘의 입은 불필요한 말들을 빼어내느라고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수고를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별로 없다는 것이 우리들의 경험이다. 하루하루 나 자신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을 홀로 있는 시간에 달아보면 대부분 하잘것없는 소음인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말이란 꼭 필요한 말이거나 “참말”이어야 할 텐데 불필요한 말과 거짓말이 태반인 것을 보면 우울하다. 시시한 말을 하고 나면 내 안에 있는 빛이 조금씩 새어 나가버리는 것 같아 말끝이 늘 허전해진다.
사실 침묵을 배경삼지 않는 말은 소음이나 다를 게 없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함부로 내뱉는 말을 주워보면 우리는 말과 소음의 한계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의 입에서 토해지는 말씨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꾸만 거칠고 야비해져 가는 현상은 그만큼 내면이 헐벗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안으로 침묵의 조명을 받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따라서 성급한 현대인들은 자기 언어를 쓸 줄 모른다. 정치 권력자들이, 탤런트들이, 가수가, 코미디언이 토해버린 말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주워서 흉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골이 비어간다. 자기 사유마저 앗기고 있다.
침묵의 의미는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대신 당당하고 참된 말을 하기 위해서이지 비겁한 침묵을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다. 어디에도 거리낄 게 없는 사람만이 당당한 말을 할 수 있다. 당당한 말이 흩어진 인간을 결합시키고 밝은 통로를 뚫을 수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슬래시페이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