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부

가장 좋아하는 책. 몇 년만에 다시 읽게 되었다. 읽고 싶었고 상상만으로도 흥분됐는데도 안 본 이유는, 숏폼이라는 손쉬운 자극만 좇는 무기력한 삶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독서처럼 능동적인 행위는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에 저항이 있던 것이라고. 조금씩 조금씩 움직여서 책을 봤다. 27장짜리 책을 3시간 동안 졸면서 봤다. 이 무기력한 사람에게 27장짜리 책은 고강도의 웨이트 트레이닝이라 뇌가 전원을 내렸을 거라고. 결국은 다 봤다. 아름다워. 그토록 원하던 뇌의 환기가 되는 기분. 막혀 있던 혈관에 맑은 피가 통하는 느낌. 실제로. 기분이 아니라 그 느낌이었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미룬 것일 뿐인데도 나를 겹겹이 덮어 짓눌렀었나 보다. 다 보고 나니 해소되는 느낌, 성취감까지도 느껴졌다. 내가 10년 동안 가짜 도파민과 상상으로 보상을 얻으면서도 끝없이.. 책을 보고자 했던 이유, 적지에 가라앉아 있는 몸뚱아리의 오래된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언젠가 한번 맛보았던 왕국의 생기 때문이었다. 그 기억은 점점 흐려져서 기억이었는지, 꿈이었는지 그 고민마저도 잊혀진 때에야 왕국을 향해 걸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감각에 날이 선 내 모습도 이젠 완전히 지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독서를 통해서 그때의 내 모습을 조금은 되찾은 느낌이다. 왕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익숙한 찬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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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속으로 잘려진 듯한 인상의 후리후리하고 하얀 종려나무가 두서너 장의 유리창에 솟아오르더니 이내 사라졌다.

- 그러나 새벽에 기차의 종점을 출발한 차는 두 시간 전부터 이 써늘한 아침, 돌 섞인 황막한 고원 위를 달리고 있었다.

- 적어도 출발시에는 불그스레한 지평선까지 선이 똑바로 뻗어 있던 고원이었지만, 바람이 일면서 차차 이 광막한 벌판을 삼켜버렸다.

- 그녀는 외투로 몸을 포근히 감쌌다.

- 가장 고달픈 때는 더위로 나른한 권태의 감각까지도 말살하는 여름철이었다.

- 추위나 살을 에는 바람, 그리고 퇴석이 어지럽게 널린 극지 같은 고원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 _그러나 자닌은 지평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저 멀리, 더 남쪽으로 내려가 하늘과 땅이 깨끗한 선으로 마주치는 곳에서는 자닌이 그때까지 알지 못했던, 그러나 끊임없이 그녀에게 결핍되어 있었던 그 무엇인가가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다._

- _그녀는 다만 이 왕국이 원래부터 그녀에게 약속되어 있었지만, 어쩌면 이 덧없는 한순간, 돌연 정지된 하늘과 얼어붙은 빛의 물결을 향해 그녀가 다시 눈을 뜨고, 한편 아랍 마을에서 올라오던 목소리들이 문득 잠잠해지는 이 순간을 제외하고는, 영영 자기의 것은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_

- 약한 바람이 일어나는지 종려나무 숲속에서 가볍게 흐르는 물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바람은 저 멀리 남쪽, 다시금 요지부동인 하늘 아래 사람과 밤이 한데 섞이는 곳, 삶이 멈추고 이제는 아무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곳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 그녀는 다시 요새를 향해 달음질쳤다. 계단 한가운데에 이르자 가슴을 얼얼하게 하는 찬바람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걸음을 멈추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지막 남은 충동적 힘에 밀려 망루 위로 내달았다. 난간 벽에 몸을 붙이고 있자니 배가 뿌듯하게 눌려왔다. 자닌은 헐떡거렸다. 눈앞의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졌다. 줄달음질을 쳤지만 몸은 더워지지 않았다. 아직도 사지가 와들와들 떨렸다. 그러나 곧 폭포처럼 마구 들이마신 찬공기가 이내 규칙적으로 몸 안에 흘러들어, 조금씩이나마 약간의 열기가 으스스 떨리는 몸 속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의 두 눈은 밤의 공간을 향해 열린 것이었다.
> 아무런 숨결,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다만 이따금 추위로 말미암아 돌들이 모래가 되어 부스러지면서 내는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자닌을 에워싸고 있는 고독과 침묵을 나직하게 흔들어놓곤 할 뿐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자닌의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육중하게 선회하는 어떤 힘에 휘말리는 것 같았다. 차갑고 건조한 밤의 짙은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별들이 끊임없이 돋아나고, 그 반짝거리는 얼음덩어리들은 또렷한 윤곽을 드러내자마자 어느새인가 지평선으로 미끄러져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자닌은 하늘에 표류하고 있는 이 불들을 바라보는 데 완전히 정신이 나가 헤어날 수가 없었다. 자닌은 그들과 더불어 선회했고, 부동의 전진을 통하여 차츰 가장 깊은 자신의 존재와 한덩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 깊은 곳에서는 지금 추위와 욕망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서 별들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서 이윽고 사막의 수많은 돌들 가운데로 꺼져갔다. 그럴 때마다 자닌은 조금씩 더 밤을 향해 스스로를 열었다. 그녀는 숨을 쉬었다. 그녀는 추위며 존재들의 무게며, 광란하는 혹은 얼어붙은 삶이며 삶과 죽음의 기나긴 고통, 그 모든 것을 잊어가고 있었다. 공포를 피하느라고 목적도 없이 미친 듯 달리기만 했던 오랜 세월 끝에, 드디어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발견한 듯싶었다. 이제는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그녀의 몸속에 수액이 다시금 솟아오르고 있었다. 난간 벽에 배를 꽉 누르면서 움직이는 하늘을 향하여 전신을 긴장시킨 채 자닌은 아직도 뒤흔들린 상태인 그녀의 마음이 마침내 가라앉고 자신의 내면에 침묵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성좌의 마지막 별들이 사막의 지평선 위 좀더 낮은 곳으로 그 떨기 송이들을 떨어뜨리더니 가만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참을 수 없는 보드라움과 함께 _밤의 물이 자닌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서_ 추위를 뒤덮어버리고 차차 그녀의 존재의 불가해한 중심에서 용솟음쳐올라 그칠 새 없는 물결이 되어 신음소리로 가득한 그녀의 입에까지 넘쳐나고 있었다. 잠시 후 하늘 전체가 차가운 땅 위에 벌렁 넘어진 자닌의 몸 위로 내려와 덮치면서 활짝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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