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저자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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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적이고 재빨리 소진되는 생명을 가진 여름이 시작되었다. 긴 낮은 찌는 듯했지만 불타는 깃발처럼 금방 타올라 버렸고, 짧고 무더운 달밤 다음에는 짧고 무덥고 비 내리는 밤이 이어졌다. 화려한 몇 주가 꿈처럼 빠르게, 온갖 형상들로 충만하여, 열병처럼 달아오르다가 사그라졌다."
단지 너무 사랑하는 이 문장을 시작으로 읽게 된 책. 책 전체를 읽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취하기에는 게으르고, 어쩌다 읽은 문장들의 울림에 마음 속 한 구석을 내어주기. 여전히 소설을 읽을 땐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하는 의문이 내내 들면서도 반짝이는 문장 수집은 멈출 수 없어!
짧은 여름밤은 열병이 가시듯 사라져 갔고, 안개가 푸른 계곡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수십만 그루의 나무에서는 수액이 들끓었고, 클링조어의 선잠 속에서는 수십만 가지의 꿈들이 솟아 나왔다. 마치 주사위컵8) 속에서 별이 총총한 하늘이 뒤죽박죽되어 흔들리기라도 하듯이, 그의 영혼은 매 장면마다 수십 개로 복제되어 비치고 매번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의미가 만나서 다시 결합되는 인생의 거울 회랑을 걸어 지나갔다.
세상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고 기묘했다. 매우 다채롭고, 무언가 의문스럽고, 무언가 믿기지 않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아름다웠다.
“자네는 깃대, 광대, 서커스 등 내가 매우 좋아하는, 굉장히 사랑스럽고 재미있는 것들을 그렸어, 루이지.” 클링조어가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자네가 밤중의 회전목마를 그린 그림 위에 있는 반점(斑點)이네. 그곳의 자줏빛 천막 위로는 바람이 부는데, 밤에 모든 불빛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중 높이에 썰렁하게 매달려 있는 밝은 장밋빛의 작은 깃발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썰렁하고, 얼마나 고독하며, 얼마나 지독하게 외로운지 아는가, 자네? 그것은 이태백의 시나 폴 베를렌의 시와 견줄 만하네. 이 작고 바보 같은 장밋빛 깃발에는 세상의 모든 우수와 체념이, 그리고 또한 우수와 체념을 웃어넘기는 모든 선한 웃음이 존재한다네. 이 작은 깃발을 그린 것으로 자네는 살 자격이 있는 것이네. 나는 이 작은 깃발을 높게 평가한다네.”
여보게나, 루이지. 나도 종종 자네처럼 생각한다네, 우리가 하는 예술 행위 전체가 보상일 뿐이라고. 놓쳐 버린 삶, 놓쳐 버린 동물성, 놓쳐 버린 사랑에 대해 힘들고도 열 배나 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는 보상이라고 말일세. 하지만 그렇지 않아. 전혀 달라. 우리가 정신적인 것을 감각적인 것의 결핍에 대한 임시 보상책이라고 간주한다면, 그건 감각적인 것을 과대평가하는 것일세. 감각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니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양자는 하나이고, 모두 똑같이 좋은 것이야. 자네가 어떤 여자를 포옹하든, 시 한 편을 쓰든, 그건 똑같은 것이란 말일세. 여기에 중요한 것, 즉 사랑, 불타오름, 사로잡힘 등만 있다면 자네가 아토스 산15) 위의 수도승이건 파리의 바람둥이건 마찬가지란 말일세.”
단지 어리석은 나약함과 편안함 때문에, 친구에 대해 전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욕심, 친구에게 어떤 비밀도 숨기지 않으려는 욕심, 친구에게 어떠한 침착한 태도도 유지하지 않으려는 욕심, 단지 어린애같이 점잖지 못한 욕심 때문에, 지금 그는 자신의 예술을 완전하게 이해해 주고, 자신과 근접해 있고 자신에 필적하는 예술성을 지닌 유일한 친구, 이 유일한 친구를 놀라게 하고 부담스럽게 해서 침묵하게 하고 마음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어린애 같은 짓이었는가! 그렇게 클링조어는 벌 받은 것이다, 너무나도 늦게 말이다.
클링조어는 다른 방식으로 행동했다. 그는 침묵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는 몇몇만 알고 있을 뿐인 자기 삶의 은밀한 고통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종종 그는 두려움으로, 우수로 고통 받았으며, 종종 그는 암흑의 굴속에 갇혔고, 지나간 삶의 그림자가 이따금씩 그의 현재에 너무 커다랗게 드리워져서 현재를 검게 만들어 버렸다. 그럴 때는 루이스의 얼굴을 쳐다보면 마음이 편해졌다. 때때로 그에게 하소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이러한 나약함을 달갑게 봐 넘기지 않았다. 이러한 나약함이 그를 괴롭혔고, 그의 동정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클링조어는 친구에게 심중을 드러내 보이는 일에 익숙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친구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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