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즈마의 모든 작업은 현실을 부인하거나 외면하는 대신 마땅히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비평이 "어떤 특정 작품이나 특정 사건을 문화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대상처럼 각색하는 것, 다시 말해 특수성이 전체성과 관계 있는 듯한 환상을 제공하는 것"이고, 철학이 여기에 무한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유의 보고'라면, 양자가 사적 이해를 위한 도구로 쓰이거나 온라인 쇼핑몰에 게시된 상품 이미지처럼 존재한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아즈마의 산발적 관심사를 하나로 꿰뚫는 창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무비판적으로 답습된 과거의 유산을 거부하고 관성화된 사고 체계를 뒤엎음으로써 현재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 '어긋남'은 아즈마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든 반드시 되돌하오는 궁극의 토대다.
텍스트를 적확하고 치밀하게 독해하는 대신 텍스트가 만들어 낸 상상력의 공간을 최대한 벌려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 이것이 바로 아즈마가 이론과 현실을 접붙이는 방법이다.
... 주제나 메시지 같은 내용적 차원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관계, 사건의 전개, 갈등 양상, 대사, 그림체 같은 형식적 차원을 적절히 고려할 때 작품을 총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자신의 '취향'을 분리해 소비했다. 아즈마는 이를 '순수한 형식으로서 자기'를 성립하려는 의도로 읽는다. 이런 문화 소비 방식은 내용에서 형식을 분리해 내는 것과 다름없으며, 그 이면에는 초월적 가치나 절대적 서사에 대한 냉소와 불신이 놓여 있다.
서브컬처로 분류되는 영역에서 문화는 '원본과 복제'라는 전통적 가치 위계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뒤틀리고 굴절, 왜곡된 시뮬라크르의 수준에서 생산, 소비된다. 여기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외부인'이 원작을 자기 입맛대로 비틀어 소비하는 행위의 천박함을 비난하는 동안, 2차 창적을 즐기는 '내부인'은 자신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 ... 원작이라 할 수도 없고 복제라 할 수도 없는 '무언가'(시뮬라크르)를 끊임없이 증식하고, 누군가의 큰 이야기를 나의 작음 이야기로 축소, 변형하며, 복잡한 욕망을 단순한 욕구로 과감히 환원한다.
2층 구조 개념을 이해할 때 유념해야할 점은 세계 또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띠는 '양의성'이다. 경제는 연결되지만 정치는 분리되는 시대, 욕망은 공유되지만 행위나 사고는 독립되는 사회, 하반신은 이어지지만 상반신은 분리된 신체, 고유한 이름으로 개인화되지만 식별 불가능한 얼굴로 집단화되는 인간. 아즈마에게는 이 이중성이야말로 '동시대 철학'의 맹아다.
... 일본의 오타쿠 문화는 "미국 문화를 어떻게 '국산화'하느냐 하는 환골탈태의 역사"이기도 하다. ... '미국산 재료'로 패전 이전의 자신감을 회복하고 '좋았던 시절'을 재건할 수 있다는 낭만적 내셔널리즘이 일본 전역에 널리 퍼졌다.
... 캐릭터 모에가 심화할수록 등장인물의 설정이 먼저 있고, 설정을 바탕으로 갭려 인물의 고나계나 서사가 기획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캐릭터가 이야기에 선행하는 상황은 필연적으로 캐릭터의 소구력을 높이기 위한 노하우 축적, 즉 모에 요소의 광범위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으로 이어진다. 오타쿠 문화 자체가 '시뮬라크르(캐릭터)'와 '데이터베이스(모에 요소의 집적)'의 2층 구조로 작동하는 셈이다.
... 단수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기존의 관행이 일회적 삶과 죽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야기를 복수화하는 것, 즉 플레이어의 시점을 도입하는 것 또한 삶과 죽음의 일회성을 느끼게 만드는 대안일 수 있다. 전자에서 수용자는 주어진 운명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무력감에 이입한다면, 후자에서 수용자는 복수의 운명을 몇 번이고 횡단하더라도 결국 캐릭터에 한정된 삶밖에 줄 수 없는 플레이어의 무력감에 이입한다. 양자는 상반된 전략이지만 유한함이 갖는 무한한 힘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구조의 취약성은 편지의 개방성을 환기한다. 우편 제도가 불오나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편지는 항상 '열려 있으며', 배달 중에 일부가 상실되거나 손상될 위험 또는 다른 편지와 뒤바뀔 위험에 처해 있다. 이제 편지는 한곳에 정박되지 않고 자기확실성이나 자기동일성도 가질 수 없으므로, 매번 미끄러지고 탈주하며 갱신되는 존재로 거듭난다. ... 일차적으로 '오배'는 어떤 의지나 의도로 행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을 함축한다. 타인을 위한 노력이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누군가를(또는 무언가를) 책임지려는 노력이 반드시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며, 선한 의도가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지닌 복수적 불가능성, 예컨대 취약함, 불완전함, 미성숙함 탓에 필패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관광은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굳이 갈 필요가 없는 곳에 가고, 볼 필요가 없는 것을 보고,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는 행위가 관광이다. 관광객은 들뜬 마음으로 돌아가니다 우연히 만난 대상에 매료되고, 어쩌다 만난 사람과 교류한다. 본 적 없는 광경을 보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생소한 음식을 먹고, 나눠 본 적 없는 대화를 나누고, 들어본 적 없는 언어를 듣게 된다. 또 평소라면 결코 방문하지 않았을 장소, 이를테면 전쟁기념관, 포로수용소, 재해 현장 등에 흘러 들어가 일상에서는 결코 해 보지 못할 일을 경험한다. 관광의 모든 과정은 우연으로 매개되기에 우연성은 관광객론의 한계인 동시에 가능성의 지점이다. ... 낯선 곳, 낯선 사람, 낯선 언어, 낯선 풍경, 낯선 소리 등을 몸으로 감각함으로써 고작 한 뼘에 불과했던 자신의 인식과 이해와 사고의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일, 그리하여 나를 넘어서는 타자, 집단, 사회, 시계 곳곳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일, 이것이 바로 관광을 통해 이룩되는 연대다.
아즈마는 행위자의 신중한 언행이나 바른 처신이 반드시 타자 윤리를 담보하거나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도리어 타인에 대한 호기심이나 흥미에서 기인한 움직임이 타자와의 거리를 좁힐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나와 다른 상대를 만나고 낯섦을 희석해 가는 과정 안에서 개개인은 미약한 우정과 찰나의 연결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연결은 엄밀히 말해 "연결되었다는 착각"일 테지만, 그 착각은 우리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한다. 따라서 관광을 통한 연대란 "착각의 축적이 만들어 내는 연대"다.
통상 비극적 참사나 사건을 다를 때 직접적 피해나 희색만을 당사자의 조건으로 여기지만, '당사자 우선주의'는 상처의 치유나 일상 회복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통을 특정 시공간 안에 봉인해 타자화하기 때문이다. 피해는 상황적 개념이지 본질적 개념이 아니다. 피해란 누군가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지거나 귀속되는 닫힌 개념이 아니라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열린 개념이다.
문제는 어떻게 '다른 검색어를 향한 욕망'을 환기하느냐다. 아즈마가 떠올린 방법은 신체를 일정 시간 동안 비일상에 '구속'하는 일, 즉 '관광'이다. ... 이 강제된 시간은 크고 작은 욕망을 샘솟게 하는 작은 틈으로 기능할 수 있다. ... 비일상적인 시간에 내맡겨진 몸은 특정 감정, 느낌, 정서, 사유 등을 품으로 새로운 욕망을 싹틔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