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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 이야기

"내가 저 우주인과 다를 바가 있는가?"
영화 “마션”을 보면 화성에 홀로 남겨진 와트니가 텃밭을 일구는 장면이 있어요.
흙과 물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만들어내고, 마침내 감자의 새싹을 틔워냅니다.
그 초록빛 이파리가 얼마나 반가웠을지 가늠이 가지 않더라구요.
수백일동안 매일 가공된 음식만 먹다가 직접 키워낸 자연의 음식을 먹을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요?
묘하게도 그 장면에서 문득 제 식생활이 떠올랐어요.
10년차 자취인이자 야근이 잦은 직장인이었던 그 당시,
제 식단은 냉동 만두, 참치 김밥, 편의점 도시락, 가끔 호사스러운 치킨 등 몇가지로 수렴했어요.
식재료의 출처도 조리과정도 모르는 음식을 완제품 상태로 받아서 먹기만했던 제 식생활은,
화성인 와트니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가공 식품들 뿐이었어요. 오히려 우주인의 식단이 더 영양학적으로 균형잡혀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때 이후로 "정성껏 챙겨먹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레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저 뿐만 아니라 주변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기 시작했어요.
다행히 먹을만 했던지, 호스팅 횟수가 잦아지고 제 집은 주막이 되었지요.
"제대로 배워보자!"
직장인 3년차로 접어들 무렵, 큰 결심을 하게됩니다.
제대로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에 요리 유학을 결심합니다.
나와 내 주변 소중한 사람들을 잘 먹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고,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의 끝에 실행에 옮깁니다.
르꼬르동블루 시드니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요리를 배웠습니다.
서늘한 공기마저 생소했던 키친,
무어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던 도구들의 쓰임을 알아가게 되고,
멘탈을 흔들던 셰프들의 고함이 표현의 방식임을 깨닫게 되고,
요리 영화에 나오는 식재료와 대사를 이해해 나가는 것들에서 큰 행복을 느꼈어요.
온 몸에 파스와 밴드, 화상 자국을 달고 살았지만 행복했습니다.
"눈치없이 왜 피가 나고 난리야."
호주 학생비자 특성상 주 20시간은 일을 할 수 있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하였어요.
쇼핑센터의 일식 회전초밥 집에서 일하던 때의 일화입니다.
전쟁같은 토요일 저녁 서비스 타임,
당근을 빠르게 채썰어서 프랩해야하는 상황에 허둥대다가 그만 왼쪽 검지 손톱 절반을 날려먹었어요.
당근은 둥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평평하게 살짝 다듬은 후에 채썰어야 했는데, 급한 마음에 냅다 썰었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피가 흥건한 제 검지 손가락을 보며, 순간 머리속에 스친 생각은
"눈치없이 왜 피가 나고 난리야."였어요.
촌각을 다투며 메뉴를 빼야 하는 주말 저녁에 시프트 멤버들에게 큰 민폐를 끼치게 된거죠.
미안한 마음 가득안고 주방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날 밤, 그 상황을 떠올려보니 문득 제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프로페셔널한 커머셜 키친에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단순히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요리를 한다는 홈 쿠킹의 마음가짐보다는
더 실질적이고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잠 못 이루던 그 날 밤이 떠오릅니다.
"좋아하지 않는 일에선 감각을 쌓을 수 없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직장인으로 복귀하였어요.
가슴 한 켠에는 여전히 요리와 식재료에 대한 관심을 품고 있었고,
다양한 요리 관련 활동들을 사이드 프로젝트로 진행했어요.
제철소도 그런 기회로 시작하게 되었고,
기회가 되는대로 음식 관련 콘텐츠도 제작했어요.
이를 위해서는 워라밸을 사수해야했습니다.
하지만 회사 일과 음식 사이드 프로젝트 사이에서 밸런스를 맞추기가 점점 어려워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중, ⌜일을 잘 한다는 것⌟의 저자 야마구치 슈·구스노키 겐의 글귀가 마음을 때렸어요.
"좋아하지 않는 일에선 감각을 쌓을 수 없다."
생계를 위한 일과 좋아하는 일은 철저히 분리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왔으나,
생계를 위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삶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 뜨고 잠에 들기 전까지 요리와 식재료만 생각하며 살아가도 생계가 유지되고 커리어가 쌓여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이러한 생각 끝에 다시 도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