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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공대 부경호 교수님팀 논문:
논문 제목: 공학교육에서 ChatGPT 활용의 실태 및 영향: 학습자 중심의 접근 원본 논문은 글 끝에 있음 아래 부경호 교수님 글에 너무 공감이 된다. "교수자는 ChatGPT가 가져온 공학 학습 과정의 변화를 분명하게 인식하 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학습자의 과업 수행능력 함양을 목표로 하는 학습활동에는 ChatGPT 사용을 범위를 제한하고 학습자에게 스스로 과업을 수행했을때기를수있는능력과그활용가치를상세히설명 하는 안내 단계가 필요하다. 또한 학습활동의 특성에 따라 학 습자에게 적절한 ChatGPT 사용 방법과 명확한 평가 기준 등 을 구분하여 제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공학분야 학습자의 성장을 위해서는 ChatGPT에서 제 공되는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선별 활용할 수 있는 능 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ChatGPT가 방대한 양의 데이 터를 기반으로 학습하였지만 반드시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정 보만을 제공하지 않으며 그 출처 또한 분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성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검증하여 과제 수행 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와 같은 고차원적인 사고 방법, 또는 문제 해결및조절방법을대학의교육을통해학습하게하는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교육이 앞서 살펴본 새로운 교육 방법의 적 용과 병행될 때, 공학분야 학습자는 ChatGPT를 학습 목표 달 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ChatGPT가 대학의 코딩 교육에 가져온 이러한 학습 과정의 변화를 대학 교육 현장에서 주목하여 반영할 필요가 있다. ChatGPT 도입 이전의 코딩 교육 방식이 변화한 학습 환경에 도 효과적인지 검토하고 적절한 교육 방법을 구성해야 할 것이 다. 특히, ChatGPT에 높은 의존성을 보였으나 과업 수행능력 강화에 부정적 인식이 조사된 ‘교양 과목’과 달리 과업 수행능 력 강화에도 긍정적으로 조사된 ‘코딩’ 분야에서의 ChatGPT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 다른 학문 영역으로 인공지능의 긍정 적역할을강화시킬필요가있다.예를들어,더이상데이터 사이언스 교육은 코딩 작성자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생성형 AI가 작성한 코드의 관리자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AI 프렌즈 석리송 회원님 글 https://youtu.be/p6sRHY7Moic 저에게 굉장히 깊은 인사이트를 최승준님이 얼마 전 이 영상 말미에 코드 리터러시 관련 이야기를 하셨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ㅎㅎ 원본 논문
오승훈
(설교-김병삼목사) 비판하지 말아라
설교영상 링크 : https://youtu.be/AiWQn4J0SaA?si=50HodSGA6vaC2kTq 비행사 하늘과 바다가 혼동되는 현상 : 버티고현상 비행에 숙달되어도 늘 게기판을 보아라. 우리가 생각, 사고, 경험은 늘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의 지침을 주기 때문에 비판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비춰서 분별해야 한다. 성경에는 "믿어라" 하는 말씀도 많지만 "생각하라" 라는 말도 많이 나옴. 비판하지 말라.. 의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가하는 것을 한다. 자연스럽다. 평가가 지나쳤을때 비판적인 시각..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어떤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 속에 일어나는 비판적인 시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존스토트, "검열관같은 비판을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일 거라는 가정을 하고 검사하는 행위, 무슨 잘못이 있는가 찾는 목적으로 검열하는 모 상대방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그 사람의 실수를 끄집어 내려고 하는, 누군가의 흠을 내려고 하는 "검열관" 그래서 그 검열관은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가혹하게 판단하면서 정죄하는 일을 하지 말라.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판단(심판/정죄)할만한 권세는 우리에게 없다. 고전 4: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오승훈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연구실에서 이야기 중에 안수현, 바보의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바보의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검색창에 "의사 청년, 고대, 예수" 라는 키워드로 찾아보니, 안수현님에 대한 검색결과들이 나왔다. 아래 두개 블로그 글을 읽어보았다. 아~~~ 소개한 글인데도 은혜가 된다. 첫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anita731/130186199749 두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sychae5002/10110954549 위 블로그에서 소개된 안수현님의 책의 내용의 일부 다른 사람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단 한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다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린 눈문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 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 사람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하나님만 내주라고 고백하며, 주님께만 시선을 둔다고 고백한다. 주님 한분만으로 기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문제를 만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혹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의견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언행에 대해서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반하는 것을 만나면, 왜 나는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걸까? 안수현님의 말하는 것 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인식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가까? 안수현님의 문장에서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하나님만 두었을때 자유하게 될 까?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 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진리" 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사람일 때, 그 대상은 선하지도 온전하지도 진리도 아니끼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음이 이해가 된다. 안수현님의 책을 한번 읽고 싶다. 우리 아들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
오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