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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믿음 이야기
나의 개인적인 믿음에 묵상, 고찰, 기도, 설교 등을 정리한다.
(설교-김병삼목사) 비판하지 말아라
설교영상 링크 : https://youtu.be/AiWQn4J0SaA?si=50HodSGA6vaC2kTq 비행사 하늘과 바다가 혼동되는 현상 : 버티고현상 비행에 숙달되어도 늘 게기판을 보아라. 우리가 생각, 사고, 경험은 늘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의 지침을 주기 때문에 비판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비춰서 분별해야 한다. 성경에는 "믿어라" 하는 말씀도 많지만 "생각하라" 라는 말도 많이 나옴. 비판하지 말라.. 의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가하는 것을 한다. 자연스럽다. 평가가 지나쳤을때 비판적인 시각..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어떤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 속에 일어나는 비판적인 시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존스토트, "검열관같은 비판을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일 거라는 가정을 하고 검사하는 행위, 무슨 잘못이 있는가 찾는 목적으로 검열하는 모 상대방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그 사람의 실수를 끄집어 내려고 하는, 누군가의 흠을 내려고 하는 "검열관" 그래서 그 검열관은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가혹하게 판단하면서 정죄하는 일을 하지 말라.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판단(심판/정죄)할만한 권세는 우리에게 없다. 고전 4: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비판은 단순 비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위험하게 우리의 교만으로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위험하다. 비판. 누군가를 정죄를 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정말 위험하다. (누군가를 향해 저 사람이 틀린 사람이라고 규정짓게 되면 소망이 사라진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 소망의 중요 물이 들어있는 상자 하나는 뚜껑을 닫고(빛을 보지 못함), 하나는 뚜껑을 열어놓음. 뚜껑의 닫힌 곳에 있는 쥐 4분 동안 헤험을 치다가 죽음. 뚜경이 없는 곳에 있는 쥐는 36시간 동안 헤험을 친다. 빛을 보며, 쥐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으로 해석→ 사람에게 소망이 중요하다. 긍정적인 판단에는 소망이 있다. 비판 : 옳고 그름을 따져 그릇된것을 지적하는 것은 심판 : 그 지을 넘어서 상대방을 저주하거나, 정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그 당시 종교지도자를 행해서 많은 비판을 하심. 그렇지만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라고 함. 비판은 사람에 일어나는 너무나 자연적 현상이지만. 그것이 정죄함이 되지 않도록 자녀들을 훈계하고 때린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이 아파야 한다. → 자녀를 사랑하는 훈계이다. 부모의 마음이 아프지 않고 때리는 것은 학대이다. 훈계와 학대. 진정한 사랑은 누군가를 비판하고 지적할 수 있음, 그러나 비판하는 그 가운데 마음이 아프다. 그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때 이다. 공동체는 건전한 비판을 통해서 성장하게 되어 있다. 사람들의 세상에는 비판은 늘 존재한다. . 비판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은 하되 심판/정죄은 하지 말아라. 시몬, 마을의 여자 (창녀).. 이 여자를 향해.. 저런 여자.. 저런 종류의 여자.. 이 사람과 나는 다르다. 그 여자의 불의를 기뻐하고 있었다. 그녀의 죄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확증하고 싶었다. 여자의 불의를 기뻐하며 자신의 영적 자만심에 불을 집혔다. 나보더 훨씬 큰 죄인이 있는한 나는 하나님 앞에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비판을 즐겨하는 이유 ( 그 사람의 잘 못을 왜 드러내려고 하는지) 왜 저 사람은 저런 행동을 하지, 나같으면 저런 행동을 하지 않을 거야. (내 의를 드려내려고 하는 것) 누군가에 대해서 비판, 험담을 할때 우리들의 마음을 들려다 보자. 누간가의 잘못을 나로 하여금 안전감을 주고 죄책감을 사라지게 한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비판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잘 못 된것이 부각되어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이기적인 발상. 누군가를 이야기할 때, 사랑의 눈을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마 7:3-4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상대방의 티를 보는 것은 잘 못 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내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 하는것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바라봄의 차이 , 누군가의 글 누군가를 일을 끝내지 않으면 게으르다. 내개 일을 끝내지 않으면 너무 바쁘다고 많은 일에 눌러 있기 때문이다. 다름 사람에 대하여 말하면 수다쟁이라고 하고, 내가 하면 건설적인 비판이라고 하다. 다른 사람이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고 하고, 내가 하면 개성이 뚜렷한 것이라고 하고,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은 사람이라고 하고, 내가 하면 그 순간 나는 복잡하고 많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고, 그가 나에게 친절하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고, 내가 하면 내 유쾌하고 좋은 한 부분이라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맹목적인 자기 중심이나, 하나님을 향한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 광신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전한 이성과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눈을 가지고 판단하고 생각해 보아라. → 중요한 믿음의 원리이다. 디도서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우리의 문제는 상대방의 문제가 과장되게 보이고 우리의 잘못이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 문제다.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 상대방을 염려하는 것 같으나, 그 속에서는 그것을 기뻐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는 구나. 상대방에 대하여 외식하는 것이 다 보인다. 들보를 빼고 상대방의 티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상대방의 티를 보고 자신의 위로받은것.. 신앙적이지 않다. 복음... 상대방의 티를 볼때 그것이 비난의 티가 아니라 사랑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들에게 소망이 있다. 요약 정리 자신의 눈에 있는 훨씬 큰 이 물질을 제거하기 전에는 상대방을 탓하지 말라. 먼저 내면을 바라보고, 내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는데 상대방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라 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형제의 잘 못 된 모습을 사랑하며 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 티 때문에 그 사람이 얼마나 잘 못 될 지 있을까 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 사랑하지 않는 마음,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티를 빼러고 노력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인데,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이 안 들으면, 하나님께 맡껴라. 온유하돼 우유부단한 사람이 되지 말라. 너그러운 사람이 되돼 잘못을 묵과하는 사람이 되지 마세요. 믿음위에 서서 우리가 해야 할 것.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 하겠어가 아니라 이해하려고 하는 모습들. 조엘 오스틴, 행복의 힘 어린 시적 아버지 목회 때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 찬양하면 춤을 추는 사람, 친구와 함께 손가락질 하며 이상한 사람이라고 아버지가 그 사람 간증을 시켰다. 부모없이 혼자 자라나 너무 힘들었던, 늘 자기 인생에 대하여 비관적이었던 이 사람. 어느날, 교회를 나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사업을 하고 삶이 안정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찬양을 하면 손과 다리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나도 모르게 찬양합니다. 그 간증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 하는 이유가 그 사람에게 있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보는 시각이 바뀌게 되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 하는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내 들보를 빼야. 그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눈으로 보고 비판, 정죄하지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해 주자.
오승훈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연구실에서 이야기 중에 안수현, 바보의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바보의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검색창에 "의사 청년, 고대, 예수" 라는 키워드로 찾아보니, 안수현님에 대한 검색결과들이 나왔다. 아래 두개 블로그 글을 읽어보았다. 아~~~ 소개한 글인데도 은혜가 된다. 첫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anita731/130186199749 두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sychae5002/10110954549 위 블로그에서 소개된 안수현님의 책의 내용의 일부 다른 사람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단 한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다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린 눈문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 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 사람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하나님만 내주라고 고백하며, 주님께만 시선을 둔다고 고백한다. 주님 한분만으로 기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문제를 만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혹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의견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언행에 대해서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반하는 것을 만나면, 왜 나는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걸까? 안수현님의 말하는 것 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인식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가까? 안수현님의 문장에서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하나님만 두었을때 자유하게 될 까?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 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진리" 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사람일 때, 그 대상은 선하지도 온전하지도 진리도 아니끼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음이 이해가 된다. 안수현님의 책을 한번 읽고 싶다. 우리 아들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
오승훈
인생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요셉의 웅성이
말씀 링크 : https://youtu.be/-rfJFaPnxiQ?si=1TGNf8f9ySf1NW2K 추후에 정리하자..
오승훈
"여화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4
우리는 분별과 비판, 비난에 대해서 구분하지 못 하고 사는 듯 하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주안에서 분별하라고 한다. 사회에서는 건강한 비판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 비난하지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주님이 기뻐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의식을 가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면 우리에게는 분명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켜주신 아가페 프로텐(궁극의사랑)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비판)해야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이,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확한 이해와 성숙함이 없으면, 우리는 사람을 비난하는데 우리의 감정을 모두 소모하게 된다. 이것이 관계를 끊어지게 하는 사탄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억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분별(비판)하는데까지가 우리의 역할이다. 사람에 대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아주 무서운 죄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온전히 주님의 뜻을 분별할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승훈
당신이 성령의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법
영상 링크: https://youtu.be/Lk_w94a4Dac?si=CELtF8T6WHvApzJm 질문: '성령의 사람'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 윤리적인 목사들을 왜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이 쓰는지 자기가 자기를 쓰는지 어떻게 아세요? 하나님이 쓴다고 한적이 있는가? 언제? 사람들은 주장한다. "자기가 쓰임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7:22~23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 하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어져라 사람을 믿으려면, 10년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믿을만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을 알수 있는 방법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인덱스, 9가지 정말로 사랑하냐? 진짜로 진정으로 기쁨이 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가? 진짜 오래 참는 사람이냐? 인내가 있냐? 자비로운가? 선함 (Goodness)이 있나? 충성(Faithfulness)가 있나? 하나님앞에 신실한가 ? 온유한 사람인가? 절체 (Self-control) 이 있는가? 시간으로 검증 되는 것들이다. 성령의 능력은 관계적이 능력, 성품이 바뀌어 지는 능력, 시간이 걸리는 능력이다.
오승훈
믿음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이재철목사님 설교 링크: https://youtu.be/xRqmUDeqmuY?si=Zyfoai0hQj8hJvfr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고 매일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내 삶의 터전에서 어떤 뜻을 가지는지 구체적인 용어로 대체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 언어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미신이 될 수 도 있다. 이재철목사님의 언어로, 믿음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다. 선포된 말씀에 대해서 내 삶속에서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이 믿음의 척도이다. 믿음은 용기다. 마리아가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낳는것 그 당시 처녀가 임신하는것은 돌 맞아 죽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가족을 이끌고 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왜 말씀대로 못 하는 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순종에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의 출처가 자기 자신이면, 그것은 만용이다. 그 출처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시선이다. 내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었을때, 말씀에 용기있게 순종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다루어짐이다. 그래야. 믿음이 우리의 삶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질서와 정돈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질서와 정돈을 확립해 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오승훈
목회자란?
참고 영상 링크: https://youtu.be/SLgFBHmAGy4?si=vICm3IbDjKre7Tb2 1. 목사란 구약의 제사장이 아님. 구약시대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백성의 신앙을 지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달한느 사명을 맡은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는 하늘의 휘장이 위로 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 이라고 함. 히브리서 10장 14절,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말함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역자, 양 떼의 성도를 먹이고 양육하는 목회자. 교회는 장로들이 다스리게 되어 있음 (성경). 장로들이 치리를 맡음. 치리를 맡은 장로 중에 '치리와 말씀 선포'를 함께 하는 장로를 목사라 함. 장로교 헌법 24조, 목사의 의의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 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 목사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인 목사는 그리스도의 설립한 율례를 지키는 자인 고로 하나님의 도를 맡은 청지기 요약하면 바른 말씀을 전하여 그리스도의 양들을 양육하는 사람 사도 바울의 이야기 (롬 12장 4절)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는 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궁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지어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를 이루는 여러 지체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으신 2. 목사님은 성도보다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운신 분이 아님 목사님은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중재자가 아님 성령님은 몇 사람의 특별한 사람에게만 오는 것이 아님,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강림하심, 소수의 선택된 목사들을 통해서만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안에 거하심 하나님은 모두의 기도를 들어주심 (목사님의 기도만 듣는 것이 아님) 사도행전 3장 12절 , 베드로가 말함.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말씀을 주시는 분은 목사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목사님 그 넘어 하나님을 봐야 한다. 예레미아 3장 15절,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목사님을 통해서 받는 것이지, 경배하고 순종하라고 목사님을 세우신 것이 아님. 주의 종인 목사의 말을 어기면 성령을 거스리는 벌을 받는 것이 아님. 목사님게 순종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목사님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처럼 순정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목사님도 잘못판단하고 실수 할 수 있는 분 교회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아니라 목사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권능을 두려워 하기 시작하면 목사님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좌지우지하게 될 수 있음. 3. 목사님을 대하는 성도들의 자세는?
오승훈
교회, 권위,
영상링크: https://youtu.be/WFeJwiiF7QI?si=VbCt-aIDXuoAsmK5 베이직교회 조정민목사님 설교에서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정리한다. 교회의 권위와 질서 위계적인 질서 (hierarchy) → 전통적인 질서 교회의 질서는 네트워킹 질서이다. 초대교회부터 전혀 차별없는 질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전혀 차별 없이 예배를 같이 드리는 질서 네트워킹하는 귀한 만남의 관계 위계질서를 만드는(갑질이 있는) 질서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음 형제됨, 자매됨의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과 교제가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하시는 공동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일때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위에 있다 라는 것처럼 그게 영적교만 이라고 단정 사랑이 없을때 권위를 내세웁니다. 우리 교회는 권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목숨을 주는 것이 목회고, 섬기는 것이 목회고 낮아지는 것이 목회라면 무슨 권위를 내세울 것이 있겠는가?
오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