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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믿음, 세상 이야기
나의 개인적인 믿음에 묵상, 고찰, 기도, 설교 등을 정리한다.
(24.07.09.) 고린도후서 3장 성령에 의한 통치
여러분 자신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추천서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참된 삶이야말로 우리가 필요로 하는 추천서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의 참된 삶이야말로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는 편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 편지는 잉크로 쓰신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쓰신 것입니다. 그 편지는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에 새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편지를 전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새로운 행동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계획은 종이에 잉크로 쓴 것도 아니고, 페이지마다 율법에 관한 각주를 빼곡하게 달아서 여러분의 영을 죽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계획은 성령께서 영에 대고 쓰신 것, 그분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대고 쓰신 것입니다! 죽음의 통치, 돌판에 새긴 죽음의 헌법인 율법은 멋지게 시작했습니다. (3:7~8) 율법에 의해 이루어진 정죄의 통치가 인상적이었다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의의 통치는 얼마나 더 인상적이겠습니까? 옛 통치가 눈부셨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 새 통치와 나란히 서면 완전히 희미해 보일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제도가 깊은 인상을 주었다면, 영원토록 다스릴 이 밝게 빛나는 통치는 얼마나 더한 인상을 주겠습니가? 오직 그리스도만이 수건을 벗기셔서,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로 직접 보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처러 돌아서서 하나님을 마주하면, 하나님께서 그 수건을 벅셔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서 하나님과 서로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새긴 한 조각 돌판이 아니라, 살아 계셔서 인격적으로 임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 계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임하시면 우리를 옥죄던 저 낡은 법조문이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 법조문에서 풀려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얼굴은 그분의 얼굴빛으로 환히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그분을 닮아 갈 때, 우리는 메시아를 꼭 닮은 형상으로 변화되고 우리 삶은 점점 더 밝아져서 보다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오승훈
(24/07/08) 아침 묵상 - 감사
좋은 아침입니다. ^^ 누군가를 생각하며 미소짓는 경험들을 다 해보셨죠! 누군가를 마주하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신적이 있으시죠! 누군가의 존재만으로 마음에 평온함을 경험하신적이 있으시죠! 어떤 무엇 때문에 마음이 따뜻해 진 경험이 있으시죠! 어떤 상황으로 마음이 뭉쿨해진 경험이 있으시죠! 가족이 그럴 것같습니다. 연인이 그럴 것같습니다. 친구가 그럴 것같습니다. 선한 스토리가 그럴 것 같습니다. 역경을 극복한 스토리가 그럴 것 같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신 그분을 생각하면 아들까지 희생하며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생각하면 우리 삶속에서 항상 도우시는 그분을 생각하면 그런 하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 그런 하나님을 믿는 우리 청소년부! 하나님의 주신 마음으로 아이들 사랑하시는 우리 청소년부 선생님!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풀어 전해주시는 전도사님! 하나님을 배우고자 함께 하는 우리 학생들! 오늘 아침 이런 생각에 마음에 피어오르는 마음이 있어 묵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오승훈
(24/7/3) 성령의 열매
최용희목사님 설교 중.. 성령의 열매, The fruit of the Spirit, 둘 다 단수로 되어 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사랑(Love), 희락(기쁨, joy), 화평(평화, peace), 오래 참음(인내, longsuffering, forbearance), 자비(호의, gentleness, kindness), 양선(선의, Goodness), 충성(성실, faith, faithfulness) 온유(Gentleness, Meekness) 절제 (temperance, self-control) 이 9가지 열매중 몇가지만 지켜지고, 몇가지는 안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9가지 열매가 모두 하나라는 의미를 뜻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9가지 열매가 모두 나타날 때 성령의 열매가 맺는 것이다.
오승훈
우리 성도들이 함께 진정한 교회를 이루어야 할 이
오늘 아침 QT (24.06.28) 에서 위 본문 중 아래 글이 들어온다. 믿는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힘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보배로운 산 돌' 이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삶은.. 이 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가치없고 거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부디치는 가치관의 충돌로 우리 믿는자들이 받는 심리적은 충격은 생각보다 크다. 특히, 새롭게 믿음으로 믿음의 가치를 발견해 가는 사람들은 이 보물 같은 것을 깨닫고 세상에 나아가나, 세상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련한 것으로 치부하거나 관심 조차 주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예수님만을 바라봐야 하는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세상의 반응에 적잖게 당황하게 된다. 그래서 위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것 같다. 그렇게 때문에 믿는자들의 모임, 교회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믿는 자들에게는 '신령한 집'으로 지어질 기초가 되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삶의 제사를 드리게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함께 기쁘게 여기고 함께 예배함이 우리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승훈
에너지공대 부경호 교수님팀 논문:
논문 제목: 공학교육에서 ChatGPT 활용의 실태 및 영향: 학습자 중심의 접근 원본 논문은 글 끝에 있음 아래 부경호 교수님 글에 너무 공감이 된다. "교수자는 ChatGPT가 가져온 공학 학습 과정의 변화를 분명하게 인식하 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교육 방법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특히 학습자의 과업 수행능력 함양을 목표로 하는 학습활동에는 ChatGPT 사용을 범위를 제한하고 학습자에게 스스로 과업을 수행했을때기를수있는능력과그활용가치를상세히설명 하는 안내 단계가 필요하다. 또한 학습활동의 특성에 따라 학 습자에게 적절한 ChatGPT 사용 방법과 명확한 평가 기준 등 을 구분하여 제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공학분야 학습자의 성장을 위해서는 ChatGPT에서 제 공되는 데이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선별 활용할 수 있는 능 력을 기르는 교육이 필요하다. ChatGPT가 방대한 양의 데이 터를 기반으로 학습하였지만 반드시 정확하고 신뢰할 만한 정 보만을 제공하지 않으며 그 출처 또한 분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생성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검증하여 과제 수행 시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는 메타 인지(metacognition)와 같은 고차원적인 사고 방법, 또는 문제 해결및조절방법을대학의교육을통해학습하게하는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교육이 앞서 살펴본 새로운 교육 방법의 적 용과 병행될 때, 공학분야 학습자는 ChatGPT를 학습 목표 달 성에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ChatGPT가 대학의 코딩 교육에 가져온 이러한 학습 과정의 변화를 대학 교육 현장에서 주목하여 반영할 필요가 있다. ChatGPT 도입 이전의 코딩 교육 방식이 변화한 학습 환경에 도 효과적인지 검토하고 적절한 교육 방법을 구성해야 할 것이 다. 특히, ChatGPT에 높은 의존성을 보였으나 과업 수행능력 강화에 부정적 인식이 조사된 ‘교양 과목’과 달리 과업 수행능 력 강화에도 긍정적으로 조사된 ‘코딩’ 분야에서의 ChatGPT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 다른 학문 영역으로 인공지능의 긍정 적역할을강화시킬필요가있다.예를들어,더이상데이터 사이언스 교육은 코딩 작성자를 키우기 위함이 아니라 생성형 AI가 작성한 코드의 관리자를 키우기 위한 교육이 되어야 한다." AI 프렌즈 석리송 회원님 글 https://youtu.be/p6sRHY7Moic 저에게 굉장히 깊은 인사이트를 최승준님이 얼마 전 이 영상 말미에 코드 리터러시 관련 이야기를 하셨는데 관심있는 분들은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ㅎㅎ 원본 논문
오승훈
(설교-김병삼목사) 비판하지 말아라
설교영상 링크 : https://youtu.be/AiWQn4J0SaA?si=50HodSGA6vaC2kTq 비행사 하늘과 바다가 혼동되는 현상 : 버티고현상 비행에 숙달되어도 늘 게기판을 보아라. 우리가 생각, 사고, 경험은 늘 불안전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삶의 지침을 주기 때문에 비판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에 비춰서 분별해야 한다. 성경에는 "믿어라" 하는 말씀도 많지만 "생각하라" 라는 말도 많이 나옴. 비판하지 말라.. 의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평가하는 것을 한다. 자연스럽다. 평가가 지나쳤을때 비판적인 시각..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가. 어떤것에 대한 우리의 생각, 우리 속에 일어나는 비판적인 시각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존스토트, "검열관같은 비판을 하지 말라." 어떤 사람일 거라는 가정을 하고 검사하는 행위, 무슨 잘못이 있는가 찾는 목적으로 검열하는 모 상대방에 대하여 파괴적이고 부정적이고, 그 사람의 실수를 끄집어 내려고 하는, 누군가의 흠을 내려고 하는 "검열관" 그래서 그 검열관은 누군가 위에 군림하려고 한다. 누군가를 가혹하게 판단하면서 정죄하는 일을 하지 말라. 누군가를 비판할 수 있지만 누군가를 판단(심판/정죄)할만한 권세는 우리에게 없다. 고전 4: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오승훈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연구실에서 이야기 중에 안수현, 바보의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바보의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검색창에 "의사 청년, 고대, 예수" 라는 키워드로 찾아보니, 안수현님에 대한 검색결과들이 나왔다. 아래 두개 블로그 글을 읽어보았다. 아~~~ 소개한 글인데도 은혜가 된다. 첫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anita731/130186199749 두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sychae5002/10110954549 위 블로그에서 소개된 안수현님의 책의 내용의 일부 다른 사람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단 한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다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린 눈문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 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 사람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하나님만 내주라고 고백하며, 주님께만 시선을 둔다고 고백한다. 주님 한분만으로 기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문제를 만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혹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의견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언행에 대해서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반하는 것을 만나면, 왜 나는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걸까? 안수현님의 말하는 것 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인식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가까? 안수현님의 문장에서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하나님만 두었을때 자유하게 될 까?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 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진리" 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사람일 때, 그 대상은 선하지도 온전하지도 진리도 아니끼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음이 이해가 된다. 안수현님의 책을 한번 읽고 싶다. 우리 아들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
오승훈
인생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요셉의 웅성이
말씀 링크 : https://youtu.be/-rfJFaPnxiQ?si=1TGNf8f9ySf1NW2K 추후에 정리하자..
오승훈
"여화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4
우리는 분별과 비판, 비난에 대해서 구분하지 못 하고 사는 듯 하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주안에서 분별하라고 한다. 사회에서는 건강한 비판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타인에 대해서 비난하지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을 분별해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주님이 기뻐하는 사랑의 마음으로 비판의식을 가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정리하면 우리에게는 분명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르켜주신 아가페 프로텐(궁극의사랑)으로 세상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뜻을 분별(비판)해야 하지만, 사랑의 마음이 없이,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확한 이해와 성숙함이 없으면, 우리는 사람을 비난하는데 우리의 감정을 모두 소모하게 된다. 이것이 관계를 끊어지게 하는 사탄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는 주님의 뜻을 기억하며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분별(비판)하는데까지가 우리의 역할이다. 사람에 대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아주 무서운 죄이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실거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온전히 주님의 뜻을 분별할수 있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승훈
당신이 성령의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법
영상 링크: https://youtu.be/Lk_w94a4Dac?si=CELtF8T6WHvApzJm 질문: '성령의 사람'은 어떻게 구분하나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비 윤리적인 목사들을 왜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이 쓰는지 자기가 자기를 쓰는지 어떻게 아세요? 하나님이 쓴다고 한적이 있는가? 언제? 사람들은 주장한다. "자기가 쓰임을 받는다고" 마태복음 7:22~23 주여 주여 내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도 쫓고 이런 일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알지 못 하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멀어져라 사람을 믿으려면, 10년 두고 봐야 하지 않을까.. 믿을만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사람을 알수 있는 방법 바울이 말하는 성령의 인덱스, 9가지 정말로 사랑하냐? 진짜로 진정으로 기쁨이 있나? 화평케 하는 사람인가? 진짜 오래 참는 사람이냐? 인내가 있냐?
오승훈
믿음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이재철목사님 설교 링크: https://youtu.be/xRqmUDeqmuY?si=Zyfoai0hQj8hJvfr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키고 매일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단어를 내 삶의 터전에서 어떤 뜻을 가지는지 구체적인 용어로 대체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내 언어로 생각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 생활이 미신이 될 수 도 있다. 이재철목사님의 언어로, 믿음은 순종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순종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이다. 선포된 말씀에 대해서 내 삶속에서 얼마나 순종하고 있는가? 이것이 믿음의 척도이다. 믿음은 용기다. 마리아가 천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를 낳는것 그 당시 처녀가 임신하는것은 돌 맞아 죽는 일이다. 용기가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지시한 땅으로 가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 아무런 정보가 없는데, 가족을 이끌고 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왜 말씀대로 못 하는 가? 손해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순종에 용기가 필요한데, 그 용기의 출처가 자기 자신이면, 그것은 만용이다. 그 출처가 하나님이어야 한다. 그래서 믿음은 시선이다. 내 시선이 하나님께 고정되었을때, 말씀에 용기있게 순종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다루어짐이다. 그래야. 믿음이 우리의 삶과 동행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은 질서와 정돈입니다. 모든 관계에서 질서와 정돈을 확립해 가는 것이다. 그 속에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오승훈
목회자란?
참고 영상 링크: https://youtu.be/SLgFBHmAGy4?si=vICm3IbDjKre7Tb2 1. 목사란 구약의 제사장이 아님. 구약시대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백성의 신앙을 지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달한느 사명을 맡은 사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을 가로막고 있는 하늘의 휘장이 위로 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음.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예배 드리는 모든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 이라고 함. 히브리서 10장 14절, 예수님께서 단번에 영원한 대속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말함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사역자, 양 떼의 성도를 먹이고 양육하는 목회자. 교회는 장로들이 다스리게 되어 있음 (성경). 장로들이 치리를 맡음. 치리를 맡은 장로 중에 '치리와 말씀 선포'를 함께 하는 장로를 목사라 함. 장로교 헌법 24조, 목사의 의의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인 교인을 양육하는 목자 목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인들을 깨우치는 교사 목사는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는 전도인
오승훈
교회, 권위,
영상링크: https://youtu.be/WFeJwiiF7QI?si=VbCt-aIDXuoAsmK5 베이직교회 조정민목사님 설교에서 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대해서 정리한다. 교회의 권위와 질서 위계적인 질서 (hierarchy) → 전통적인 질서 교회의 질서는 네트워킹 질서이다. 초대교회부터 전혀 차별없는 질서,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전혀 차별 없이 예배를 같이 드리는 질서 네트워킹하는 귀한 만남의 관계 위계질서를 만드는(갑질이 있는) 질서는 교회의 본질을 벗어났다고 볼 수 있음 형제됨, 자매됨의 아름다운 사랑의 나눔과 교제가 하나님이 분명히 함께 하시는 공동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일때 세상을 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더 위에 있다 라는 것처럼 그게 영적교만 이라고 단정 사랑이 없을때 권위를 내세웁니다. 우리 교회는 권력을 지향하지 않습니다.
오승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