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연구실에서 이야기 중에 안수현, 바보의사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 중에 바보의사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검색창에 "의사 청년, 고대, 예수" 라는 키워드로 찾아보니, 안수현님에 대한 검색결과들이 나왔다. 아래 두개 블로그 글을 읽어보았다. 아~~~ 소개한 글인데도 은혜가 된다. 첫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anita731/130186199749 두번째 블로그 글 : https://blog.naver.com/sychae5002/10110954549 위 블로그에서 소개된 안수현님의 책의 내용의 일부 다른 사람들을 인식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반응만을 의식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 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다른 청중을 의식하는 데서 돌이켜 오직 최후의 청중이요, 최고의 청중인 '단 한분의 청중(An audience of One)'만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겠다는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존재할 때, 우린 눈문을 흘리면서도 씨를 뿌릴 수 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기뻐할 수 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성경은 말한다. 주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니라." 라고 말씀하시며 두 팔을넓게 벌려 우리를 맞으신다. 나의 어깨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시며 말씀하신다. "잘 했구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아!" '단 한명의 청중'으로부터 듣는 그 사람의 음성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길 기도한다. 하나님만 내주라고 고백하며, 주님께만 시선을 둔다고 고백한다. 주님 한분만으로 기쁘다고 찬양한다. 그러나 문제를 만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혹은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의견에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 언행에 대해서 반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진리라고 믿는 것에 반하는 것을 만나면, 왜 나는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되는 걸까? 안수현님의 말하는 것 처럼, 내가 다른 사람을 인식하기 때문일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가까? 안수현님의 문장에서 깊게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제약가운데 갇히지만,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주님께선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 이 문장을 곱씹어본다.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대상을 하나님만 두었을때 자유하게 될 까? 문득 드는 생각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 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진리" 이시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반문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가 의식하는 대상이 사람일 때, 그 대상은 선하지도 온전하지도 진리도 아니끼 때문에 불안할 수 밖에 없음이 이해가 된다. 안수현님의 책을 한번 읽고 싶다. 우리 아들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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