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명언 중에는 '역사는 되풀이되지는 않지만, 일정한 운율을 지닌다(The past doesn't repeat itself but it rhymes)'란 말이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증기기관, 전기, 인터넷 등 새로운 기술은 늘 사람들의 삶과 일자리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오늘날의 변화를 이끄는 촉매가 단연 인공지능(AI)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 자체로도 파급력이 큰 AI는 산업 전방위를 혁신하고 다른 기술과 결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있다. 예를 들어 로봇 훈련을 가속화하고, 단백질 구조를 예측해 과학적 발견을 앞당기며, 에너지 시스템을 최적화한다. 다양한 산업에서 협업의 새로운 모델이 열리고 있다.
맥킨지가 전 세계 리더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 AI를 도입한 기업은 80%에 달했지만, AI 활용도가 성숙 단계에 도달했다고 답한 기업은 1%뿐이었다. 이는 AI의 활용 여지가 여전히 무궁무진하다는 방증이다.
글로벌 테크 트렌드가 보여주는 큰 그림
지금 기술 지형은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재편되고 있다. 혁신 기술들은 컴퓨팅 파워 수요를 기하급수적으로 끌어올리고, 전 세계가 실험과 투자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각 국가와 기업들은 전략 기술의 생산·적용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맞붙는 양상이다.
맥킨지는 최근 '2025년 기술 트렌드 전망(Technology Trends Outlook 2025)' 보고서를 통해 AI, 클라우드, 로보틱스, 바이오엔지니어링, 특수 목적 최적화 반도체, 퀀텀, 에이전트 AI 등 글로벌 경제를 바꿀 13개 핵심 기술을 짚었다. 2024년 기준으로 이들 기술에 약 8000억달러의 투자가 이뤄졌다. 특히 올해 눈에 띄는 변화는 에이전트 AI가 업무 보조를 넘어 업무 동료로 도약할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AI, 이제는 동료: 에이전트 AI의 시대
초창기 AI는 회귀모델과 같은 통계적 접근을 활용해 수요 예측이나 추천 시스템 등 일부 영역에서 활용됐다. 이후 등장한 생성형 AI는 대규모언어모델을 기반으로 텍스트를 넘어 이미지, 음성 등 비정형 데이터까지 다루며 비즈니스의 전면에 뛰어들고 있다.
다음 단계인 에이전트 AI는 사용자의 질문에 답을 주는 수준을 넘어 직접 행동한다. 예를 들어 '부품 교체가 필요하다'는 알림만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부품을 주문하고 동시에 고객 반품 절차까지 처리하는 식이다.
에이전트 AI는 다른 AI와 상호작용하면서 업무를 분담·조율하고 필요할 경우 기존 프로세스 자체를 재구성한다. 에이전트 AI가 업무 보조가 아니라 동료로서 위치에 올라서려는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력난과 초격차 경쟁이라는 이중 압박 속에서 에이전트 AI는 업무 방식 자체를 재설계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AI의 가치는 단순히 비용 절감에 있지 않다. 관건은 AI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는가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반도체, AI 슈퍼 사이클의 엔진
맥킨지글로벌연구소(MGI)는 미래 비즈니스 지형을 바꿀 18개 산업 중 하나로 반도체를 꼽으며 2040년까지 1조7000억~2조4000억달러의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야말로 AI가 반도체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바꾸고 있다.
과거 반도체는 전형적인 사이클 산업으로, 수요와 공급의 등락에 따라 호황과 불황이 반복됐다. 그러나 AI 학습과 추론에 필요한 연산 수요가 폭발하면서 반도체는 이제 AI 슈퍼 사이클의 엔진으로 자리 잡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특수 목적에 최적화된 반도체(Application-Specific Semiconductors) 수요의 급증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예상치 못했던 고대역폭메모리(HBM)의 급부상은 SK하이닉스를 단숨에 글로벌 선두권으로 끌어올렸고, 이는 반도체 업계가 얼마나 빠르게 재편될 수 있는지를 입증했다. 기존 그래픽처리장치(GPU) 중심의 독점 구도에서 벗어나 신경망처리장치(NPU), 전력 반도체 등 다양한 수요가 열리면서 새로운 승자들이 등장할 가능성도 커졌다.
이러한 변화는 소수 글로벌 빅테크만의 독식 구조를 넘어 반도체 밸류체인 전반에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칩 설계, 소재·장비, 공정 최적화, 패키징 등 모든 단계에서 새로운 기회와 위기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이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견·중소기업, 협력업체 등 모든 플레이어가 AI가 만들어내는 수요 변화에 맞춰 민첩하게 대응해야 한다.
한편 인력 부족이라는 큰 과제도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는 2031년까지 약 5만6000명의 숙련 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맥킨지는 지역·국가를 막론한 구조적 인력난이 반도체 산업의 스케일업을 가로막는 핵심 제약 요소라고 분석한 바 있다.
AI, 신약 개발을 넘어 바이오산업 혁신으로
AI는 바이오 분야의 게임 체인저다. 맥킨지 분석에 따르면 생성형 AI는 제약·의료 산업 전반에서 연간 600억~1100억달러 규모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잠재력을 지닌다.
AI는 임상 데이터 분석을 도와 신약 후보 발굴 기간을 전반적으로 줄이고 단백질 구조 예측 등 기존 바이오 연구의 방식을 바꾸고 있다. 2024년 노벨 화학상으로 주목받은 알파폴드(AlphaFold)가 대표적인 예다. 단백질 구조를 정확히 예측한 이 AI 기반 시스템은 수년이 걸리던 연구 과정을 며칠 만에 가능하게 만들며 AI가 연구 보조를 넘어 바이오 혁신의 촉매가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AI의 강점은 서로 다른 데이터를 연결해 새로운 통찰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DNA·RNA·단백질 등 분리된 정보를 통합해 정밀의료, 유전자 편집, 합성생물학, 대사공학 등 다양한 분야를 한 단계 도약시킨다. 예컨대 단백질 구조 예측 모델은 식품 효소 개발로, 화학 합성 모델은 신약 후보 발굴로 응용되며 연구와 산업을 동시에 가속화한다.
한국에도 기회는 열려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기술집약적 산업에서 보여준 혁신 역량을 바이오 분야에 접목한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다. 관건은 규제 혁신, 인재 육성, 기업 간 협업이다. AI는 단순히 연구개발(R&D) 속도를 높이는 도구를 넘어 한국 바이오 생태계를 도약시키는 성장 엔진이 될 수 있다.
로보틱스, AI라는 '두뇌'를 달다
AI의 진정한 힘은 다른 기술과의 융합에서 드러난다. 로보틱스가 대표적인 사례다.
과거에 로봇은 단순 반복 작업을 수행하는 데 머물렀지만, 이제는 AI라는 '두뇌'를 달아 텍스트·음성·제스처를 이해하고 낯선 환경에서도 스스로 학습하며 적응한다.
제조·물류 현장에 본격 투입되고 있는 AI 로봇은 기존 인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인력이 고부가가치 업무에 집중하도록 돕는 방식으로 업무 효율을 높이고 있다.
최근 주목받는 개념은 피지컬 AI다. 이는 로봇이 기계적 동작을 넘어 사람의 의도를 이해하고 실제로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기술을 의미한다. 자율이동 로봇(AMR), 휴머노이드 로봇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는 이미 로보틱스 패권 경쟁에 들어섰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CES 2025에서 기조연설 무대에 휴머노이드 14대를 등장시켰는데 이 중 6대는 중국 기업 제품이었다. 2024년 기준으로 중국은 로봇 분야에서 19만건이 넘는 특허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전 세계의 약 3분의 2에 해당한다.
시장의 흐름은 명확하다. 2023년 한 차례 위축됐던 글로벌 로보틱스 투자는 2024년 급반등해 과거 고점을 넘어섰다. 맥킨지는 2040년까지 전 세계 로보틱스 시장이 약 9000억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아쉽게도 한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우리나라의 산업용 로봇 보급률은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시장 수요가 산업 경쟁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하드웨어 생산 중심의 강점을 유지했지만, 소프트웨어·AI와의 융합 경쟁에서는 뒤처질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한국은 제조업 강국으로서 방대한 데이터와 학습 환경을 보유하고 있는 장점이 있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과의 협력이나 인수·합병(M&A)을 통해 역량을 보완하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잇는 로보틱스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나아가 제조업-AI-로보틱스를 잇는 새로운 가치사슬을 주도해야 한다. 반도체·바이오·로보틱스 등 각 산업의 사례가 보여주듯, AI는 우리나라 기업들에 기회와 위협을 동시에 안겨주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변화를 어떻게 종합적인 전략으로 연결해내느냐다.
AI 전환, 혁신은 완결형이 아니다
AI 전환은 단숨에 모든 것을 바꾸는 '만능열쇠'가 아니다. 조직문화, 연구개발, 인수·합병, 사업구조 재편 등 수많은 영역에서 의사결정과 실행이 축적되는 과정이다.
AI는 극복해야 할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성장 엔진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전략적으로 빠르게 내재화하고, 더 과감하게 투자하며, 더 효과적으로 협력 생태계를 확장하느냐다. 기회는 기업 리더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상위 수준의 제조 역량과 빠른 디지털 적응력을 동시에 갖춘 드문 시장이다. 규제 혁신과 인재 육성 그리고 기업 간 협업을 결단력 있게 추진한다면 한국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를 넘어 새로운 산업 질서를 선도하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도약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