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Created by
  • Grit Han
찰스 디킨스, 펭귄북스
page.13
1부 1장, 시대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믿음의 세기이자 의심의 세기였으며,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희망의 봄이자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는 모든 것이 있었지만 한편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들 천국으로 향해 가고자 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말하자면, 현재와 너무나 비슷하게도, 그 시절 목청 큰 권위자들 역시 좋든 나쁘든 간에 극단적인 비교로만 그 시대를 규정하려고 했다.
page.25
1부 3장, 밤의 그림자
햇빛이 아무리 수면을 희롱해도 물은 빙판 아래 영원히 갇혀 있었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물가에 서 있었다. 내 친구도 죽고, 내 이웃도 죽고, 내가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도 죽는다. 죽음은 저마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비밀을 변함없이 공고화하고 영속화한다. 나 역시 내 비밀을 죽는 날까지 가져갈 것이다. 그렇다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보다 내가 지나가는 이 도시의 무덤에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나에게는 더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니, 나 자신도 이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수수께끼 같은 존재가 아닐까?
page.44
1부 4장, 준비
아버님이 오랫동안 방치되셨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감옥에 갇히셨는지 조사하는 것은 무익하다 못해 해롭습니다. 지금은 어떤 조사도 그렇습니다.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언급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영국인이어서 안전한 저나 프랑스 정부에 신임을 얻을 만큼 막강한 텔슨 은행조차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극비 임무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자격증이고 입국 허가증이고 메모 따위가 모두 ‘되살아났다’라는 한 줄로 통하고, 그 말에 모든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page.49
1부 5장, 술집
늙은이를 젊은이로 바꿔주는 마법의 맷돌은 분명히 아닌 맷돌 속에서 끔찍하게 갈리고 또 갈린 적이 있는 몇몇은 모퉁이에서 떨었다. 그들은 모든 집을 들락날락했고, 창문으로 낡은 옷자락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그들을 갈았던 맷돌은 젊은지를 늙은이로 만들어주는 맷돌이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찌들었고 목소리에는 근심이 배었으며 그들의 얼굴에나 어른들의 얼굴에나 세월의 고랑이 파였고, 새로 생긴 고랑은 굶주림의 표시였다.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page.74
1부 6장, 구두 짓는 사내
새벽이 오기 전 춥고 불안한 시간 동안 유령들은 또다시 자르비스 로리의 귀에 대고 예전 질문들을 속삭였다. 로리는 묻혀 있다가 파내어진 지 얼마 안 된 이의 맞은편에 앉아 그에게서 섬세한 감각이 사라졌는지, 회복될 수는 있을지 궁금해하던 터였다.
”되살아나고 싶은가?” 대답은 그때와 같았다.
”잘 모르겠소.”
page.154
2부 7장, 도시의 후작 나리
그 당시에는ㅡ그 후로도 언제나 그랬지만ㅡ 좋은 혈통의 훌륭한 신사라고 하면,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마련인 문제에 관심이 부족한 산물로 알려졌는데, 나리의 접견실이야말로 그런 결핍 상태를 적느라하게 보여 주는 모범 사례였다.
page.177
2부 9장, 고르곤의 머리
“우리의 철학은 탄압뿐이다. 이 지붕이 있는 한 우리를 두려워하고 노예근성에 젖은 개들은 우리의 매질에 복종할 것이야.” 하지만 그 철학은 후작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오래가지 못하리라. 만약 그때로부터 불과 몇 년 후 그의 가문과 쉰 개의 가문이 어떻게 변했는지 그날 밤 그에게 보여 주었다면, 그는 과연 불에 타 재가 비처럼 쏟아지는 으스스한 숯덩이를 자신의 집이라고 우겼을까.
page.202
2부 11장, 이상적인 배우자
“그래서 충고하겠는데,” 스트라이버가 말했다. “자네 미래를 직시하기 바라네. 나는 조금 다른 식으로 미래를 생각해 왔지. 하지만 자네는 자네 방식으로 미래를 생각해야 해. 결혼을 하게. 누군가에게 시중을 들어달라고 해야지. 자네가 여자에게 흥미가 없거나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연애애 요령이 없는 것은 상관하지 말고. 여자를 찾아. 재산도 어느 정도 있고 남 보기에 괜찮은 여자를 찾아서 결혼하게. 여인숙 여주인이나 하숙집 주인 같은. 병들고 돈 떨어질 때를 대비해야지. 자네에겐 그런 여자가 필요해. 잘 생각해 보라고, 시드니.”
”생각해 보지.” 카턴이 말했다.
page.253
2부 16장, 아직도 뜨개질
그리하여 사소하든 위대하든 간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모두 별이 한 번 반짝거리는 사이에 일어났다 사라진다. 게다가 인간의 미미한 지식으로도 광선을 쪼개고 그 구성 요소를 분석할 수 있으니, 하물며 더욱 숭고한 지능은 이 땅의 희미한 빛만으로도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생각과 행동, 선과 악을 읽을 수 있으리라.
page.306
2부 21장, 울리는 발소리
런던의 어느 캄캄한 창가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동안, 멀리 생탕투안은 한번 찍히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붉은 발자국으로 뒤덮였고, 광란의 위협적인 발들은 분노에 차서 닥치는 대로 목숨을 짓밟으며 자국을 냈다.
그날 아침, 생탕투안에서는 초라한 몰골과 우울한 표정을 한 거대한 무리가 앞뒤로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강철 칼날과 총검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굽이치는 수많은 머리 위로 번쩍거렸다. 생탕투안의 목구멍에서는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고, 숲을 이룬 헐벗은 팔들이 허공을 향해 내지를 때의 모습은 찬바람에 흔들리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았다. 손가락들은 온갖 무기와 저 마음 깊은 곳에서 복받쳐 오르는 무기 비슷한 것들을 부들부들 떨릴 만큼 꽉 움켜잡았다.
page.316
2부 21장, 울리는 발소리
석방된 죄수 일곱 명과 창끝에 꽂힌 피투성이 머리 일곱 개, 튼튼한 여덟 개의 탑이 있는 저주스러운 요새의 열쇠, 발견된 몇 개의 글자와 오래전에 심장이 터져 죽은 죄수들의 다른 기념물 등등, 그리고 1789년 7월 중순 파리의 거리를 크게 울렸던 생탕투안 사람들의 발소리. 아아, 신은 루시 다네이의 상상을 무찔렀다. 신은 이 발들이 그녀의 인생을 짓밟지 못하게 하실까! 그들은 흥분하고 광기에 사로잡힌 위험한 자들이었다. 드파르주 술집 문 앞에서 포도주 통이 깨진 지 몇 년이 흘렀건만 그 붉게 물든 발자국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page.340
2부 24장, 자석 바위에 이끌리다
처지가 뒤바뀐 피난민 나리들이 늘 하는 이야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 땅의 영국인들이 그 무시무시한 혁명에 대해 말할 때 입에 올리는 정설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뿌리지도 않았는데 거둔다는 식으로, 아무 짓도 안 했고 아무 일도 없었는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이었다. 또, 마치 프랑스 국민 수만 명이 유린당하는 광경과 국민이 이용해야 할 자원을 가진 자들이 남용하고 오용하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했으면서도, 이런 사태를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page.388
3부 4장, 폭풍 속의 고요
박사의 말에 따르면 어떤 죄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기쁨에 거리로 뛰쳐 나갔다 미친 사람으로 오인받아 창에 찔렸다. 박사는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간청에 감옥 밖으로 나갔다가 착한 사마리아인들의 팔에 안겨 있는 그를 발견했다. 사마리아인들은 다름 아닌 자신이 죽인 희생자의 몸뚱이를 깔고 앉아 유린했던 장본인들이었다. 그 기괴할 정도로 모순적인 행동에 박사는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꾸는 듯 느껴졌다. 의사를 도와 근심 어린 말을 건네며 부상자를 치료하던 사람들이ㅡ다친 사람을 위해 짚을 깔고 그 위로 부상자를 조심스럽게 옮기기도 했다ㅡ돌아서서 무기를 들고 다시 잔인하게 칼로 찔러 학살하는 모습을 보며 박사는 손으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기절을 하기도 했다.
page.390
3부 4장, 폭풍 속의 고요
폭력에는 중단도, 동정도, 평화도 없었으며 약해진 마음으로 휴식하는 기간도 없고, 시간을 재어 일정 시간만 휘두르는 일도 없었다. 시간이 처음 생겼을 때처럼 낮과 밤이 정기적으로 순환할 뿐이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어떤 환자가 열이 날 때처럼 나라 전체가 열병에 걸려 날뛰는 바람에 시간의 추이를 잃어버렸다.
page.463
3부 10장, 그림자의 실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미친 개자식 같으니! 농노 새끼! 기어이 내 동생이 검을 뽑아 들게 만들더니, 검에 찔려 쓰러졌소. 제까짓 게 마치 신사라도 되는 양 말이오.”
그 대답에는 동정도, 슬픔도, 인간애도 없었다. 말하는 사람은 하필 자기 집에서 다른 계급의 생명이 죽어가는 게 못마땅하고 그런 기생충 같은 부류는 그에 걸맞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소년과 소년의 운명에 대해 아무런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page.515
3부 14장, 뜨개질은 끝나고
“작은 시민, 그 신호를 말이오.” 드파르주 부인이 엄격하게 말했다. “그 여자가 죄수한테 했다는 신호. 오늘이라도 기꺼이 그걸 봤다고 증언하는 증인으로 설 수 있지요?”
”아, 그럼요. 못할 이유가 없지요!” 나무꾼이 소리쳤다. “매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두 시에서 네 시까지 항상 신호를 보냈다니까요. 가끔 어린 것을 데려올 때도 있고 안 그럴 때도 있고. 난 내가 본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요. 내 눈으로 틀림없이 봤어요.”
나무꾼은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이 보았다는 무수한 신호를 갖가지 손짓, 발짓으로 흉내 냈지만 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page.537
3부 15장, 영원히 사라진 발소리
처녀는 그의 입술에 키스한다. 그도 처녀에게 키스한다. 그들은 엄숙하게 서로를 축복해 준다. 그가 처녀의 손을 내려놓을 때 처녀의 여윈 손은 떨지 않는다. 참을성 많은 얼굴은 담담하고 맑으며 굳은 의지만 보인다. 처녀가 그보다 앞서서 올라간다. 먼저 죽는다. 뜨개질하는 여인들이 수를 센다. 스물둘.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page.538
3부 15장, 영원히 사라진 발소리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생명을 내려놓음으로써 다시는 보지 못할 그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평화롭고 보람되고 번창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딴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나이 들고 허리는 구부정해졌지만 건강을 되찾은 그녀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환자를 정성것 돌보며 편안하게 지내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십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들을 풍요롭게 해준 인자한 노신사가 그에 대한 보답으로 편안히 세상을 떠나리라는 것을.

(중략)

그리고 들린다, 감격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리가.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그 어떤 행위보다 훨씬 더 숭고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없이 편안한 곳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