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견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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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김초엽, 퍼블리온
1부
원하면 원할수록 지표면은 손 아래에서 닳아갔다. 태린은 끊임없이 생각했다. 나는 지상으로 가고 싶은 것일까. 지상을 얻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 지상을 쫓는 사람을 갈망하는 것일까.

가본 적도 없지만 이미 손안에 들어온 행성이 눈앞에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들 때마다 태린은 지구본을 돌렸다.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지상에도, 누군가의 마음에도 그렇게 쉽게는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연구 일지
범람체는 인류의 적이다. 범람체는 인간과 공존할 수 없다. 이제프는 누구보다도 그 전제를 절대적인 것으로 믿어왔고 누구보다도 범람체를 증오해왔다. 그러나 태린을 지켜볼 때면 의문이 들었다. 그러니까, 범람체는 정말로 인류의 적인가? 그 신념에는 틈이 없는 것인가? 물론 알고 있었다. 태린은 아주 특별한 예외였다. 예외를 전체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예외가 있다는 것, 그것이 이제프의 믿음 체계에 균열을 냈다.
때때로 죽음의 위험을 마주할 때마다 이제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빛나는 눈빛을 생각했다. 그 아이는 별을 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시 별을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인간이 쫓겨났던 이 세계로 다시 초청받게 될 것이다. 이제프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3부
눈앞의 세계는 평소에 태린이 두 눈을 통해 보던 세상과 같지 않았다. 그것은 촉각적인 세계였다. 무엇이 어디에 있든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보거나 듣는 대신 그 세상이 피부에 닿았다. 그것은 축축하거나 건조하거나 울퉁불퉁하거나 매끈했다. 가야 할 장소 쪽으로 뻗어 있는 실끈들은 조금 더 빠르게 진동했고, 반대편에서는 지금까지 왔던 길을 기억하는 실끈들이 느리게 춤췄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몸을 동시에 움직이고 동시에 감각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 수천 개의 몸 중 일부를 활성화시켰다가, 전체를 감각했다가 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무엇을 겪고 무엇을 감지할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활성화되지 않은 순간에도 태린의 일부는 예리하게 감각의 말단을 세우고 있었고, 정보는 시차를 두고 수만 갈래의 몸체 사이를 흘러다녔다.
범람체의 연결망에 전이자들이 유입되면서, 이들은 행성 전체를 아주 느리지만 연결된 형태로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 범람체는 이 행성 전체에 퍼져 있었다. 인간이 개체중심적인 존재이기만 했을 때, 그들은 개인 혹은 작은 집단만을 생각했을 뿐, 행성 전체를 고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범람체와 결합된 인간은 연결망 속에서 사고하고, 그렇기에 자신이 행성 전체의 일부라는 점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였다. 지상의 일부를 인간의 터전으로 삼더라도, 지금 늪과 연결된 이들에게는 무작정 뻗어나가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연결망을 통해 생각한다는 것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전체로 이어진 생각 체계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고 스스로의 생각을 재검토하는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경계 지역을 구경하고는 혐오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눈빛이 반짝이고, 얼마 후 자스완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묻기도 한다. 지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특별한 조건이 있냐고. 그러면 자스완은 미소 지으며 대답한다.

”그야 당신이 오직 당신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환상을 버린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지구본과 은목걸이가 범람 그물망 위에 놓엿다. 처음에는 잠잠한가 싶었는데, 곧 여기저기서 실끈 같은 가지들이 두 물건을 뒤덮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본도, 은목걸이도 전부 범람체에 덮여버렸다. 이제프와 태린을 이어주던 물건들은 이제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 한동안은 범람체로, 그리고 또 다른 물질들로 거듭 변해가며 이 행성의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