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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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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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그들은 상대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듯 ‘~거든요’라는 종결어미를 즐겨 썼다.
때로는 그녀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의 얼굴에 흥미롭다는 미소가 어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1939년에 죽었거든요. 누군가 그렇게 말하면 흥미롭게 바라보다 아니죠, 1941년이죠, 라고 수정해주는 식이었다. 그녀가 버지니아 울프로 박사논문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그녀를 가르칠 수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이 정교수의 수업이나 남자 강사의 수업에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의 그런 무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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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없다는 건,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건 그저 무관심일 뿐이고, 더 나쁘게 말해서 기득권에 대한 능동적인 순종일 뿐이라고, 글쓰기는 의심하지 않는 순응주의와는 반대되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순응주의, 능동적인 순종. 그런 말들에서 나의 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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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그녀는 이미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세상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언제나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썼다. 그럴 때면 벌어진 상처로 빛이 들어오는 기분이었다고, 그 빛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
선생님.
어느 날 퇴근하던 길, 나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부르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의 숨은 흰 수증기가 되어 공중에서 흩어졌다. 나는 그때 내가 겨울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겨울은 사람의 숨이 눈으로 보이는 유일한 계절이니까. 언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며 긴 숨을 내쉬던 그녀의 눈앞에 보일 것처럼 떠올랐다.
그 모습이 흩어지지 않도록 어둠 속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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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그녀는 그런 상황에 체념한 채로, 그 모든 일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통스러웠지만 살아졌고, 그녀는 살아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살아진다. 그러다보면 사라진다. 고통이, 견디는 시간이 사라진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이상 겉돌지 않았고,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진입했다. 모든 건 변하고 사람들은 변덕스러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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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기록하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같은 날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꺼번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이 있거든. 아마 수감 생활을 하면서부터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아. 나는 그때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글을 썼어.
넌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가끔은 너에게 미련이 생기다가도 네가 나를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는 나이에 나와 헤어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상처가 나도 금방 회복할 수 있는, 살아온 모든 시간을 망각 속에 던져버릴 수 있는 나이에 너는 나를 떠나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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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그런 나였는데도 경멸조의 말을 듣는 언니의 모습을 보는 건 참기가 힘들었어.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상황에 자기 자신을 몰아넣은 언니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지. 그래, 언니를 비난할 수 없다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은 그런 순간순간마다 언니를 원망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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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 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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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언니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내게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했지. 어리고 약한 나를 보호하는 역할을 자처했어. 그건 책임감이 크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강하고 독립적인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거야. 그게 언니 자신이 믿는 스스로의 모습이었고 언니를 언니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날 언니의 믿음을 완전히 부정했지. 언니의 삶을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망가진 것으로 취급했어. 내가 언니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언니를 가르치려 했어. 언니의 삶이 망했다고 판결했어.
그것이 나를 어린 시절부터 돌봐준 언니에게 내가 한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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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신
너는 내게 다시 왜냐고 물어. 나는 답하지. 사랑하는 언니를 보호하고 싶어서, 언니가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져서는 안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그렇게라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너는 왜냐고 물어. 나는 대답해. 때때로 사랑은 사람을 견디지 못하게 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하니까. 왜? 너는 말간 얼굴로 내게 다시 묻지. 그럼 나는 답해.
나도 그 이유를 알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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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에게
“저건 건물주 문제야. 계단이 뭐라고 어르신이 일일이 닦게 하나……”
아빠는 혀를 차며 말했다. 집안에서는 숟가락 하나도 자기 손으로 챙기지 않으면서, 엄마나 이모가 없으면 밥통에 밥이 있어도 상을 차리지 않으면서, 늘 누군가 닦아놓은 변기를 사용하면서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쪼그리고 앉아 바닥을 걸레질하는 이모를 멀뚱히 바라보던 아빠의 얼굴이 떠올라서 나는 마음이 차가워졌다.
page.246
이모에게
나는 안정과 독립에 대한 갈급함으로 입시에 매진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나를 몰아세우자 놀랍게도 나를 아프게 하는 생각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건 가학적으로 귀를 막으면서 진짜 문제들을 뒤로 미루는 방식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꽤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다.
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노트에 결심을 적어놓았다.
사관생도가 될 것. 군인이 될 것.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 나의 나약함과 싸워 이길 것.
절제할 것. 사람에게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엄격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