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근희의 행진

Created by
  • Grit Han
이서수, 은행나무
page.16
미조의 시대
계속 같은 말만 하네. 언니는 내가 무슨 말이냐고 물어도 대답을 않더니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는 길에 알려주었다. 전단지를 찔러주면서, 다 됩니다, 다 돼요, 계속 이 말만 했어. 언니는 짧고 날카롭게 웃었다.
그게 무슨 뜻인데? 나는 뒤미처 무슨 뜻인지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언니는 뭘 그런 걸로 심각해지냐고 말했다. 난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넌 내가 온종일 어떤 걸 그리는지 알면 기절할걸.
page.51
엉킨 소매
초음파 검사는 늘 불쾌하다. 몸속으로 진찰 기구가 들어왔을 때 나는 아팠고, 아프다고 말했다. 나와 함께 태아를 확인한 경현은 진찰실에서 나오자마자 말했다. 그게 아팠어? 작던데, 아팠냐고. 나는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서 경현을 쳐다보았다. 내 거가 저 기구보다 작은 것처럼 느껴졌어.
page.83
엉킨 소매
집이든 몸이든 뭐든 그냥 다른 사람들이나 떠들라 하고 우리는 이렇게 아이처럼 장난이나 치며 살까. 하지만 자꾸 울고 싶은 일이 생기는 걸 어쩌나. 어떻게 막을 수가 있나. 시간이 흐르면 또 다른 사건이 우리 가슴에 유성처럼 떨어질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 소매가 엉킨 채로 함께 걸어갈 것이다. 6주가 사라진 지 36시간이 지났고, 나는 주영 씨의 손을 잡고 있었다. 해정은 우리를 열심히 끌고 갔다. 놀이터가 끝나는 지점을 향해. 웃음이 그치는 곳을 향해.
page.103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내가 모르는 일들을 사영은 아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응급실에서 벌어지는 기가 막힌 죽음을. 두 눈을 의심하게 하는 끔찍한 상처를.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을. 극적인 회생을. 나는 근무복을 입고 응급실을 뛰어다니는 사영을 떠올렸다. 내가 한 줄의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고 다리를 떨며 앉아 있을 동안, 사영은 사경을 헤매는 사람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할 것이다. 그렇게 이 세상으로 돌아온 사람을 보고 안도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응급실에 실려온 또 다른 사람에게 달려가 그 사람을 구하겠지. 사람을 구하는 사영은 너무나 멋지다. 반면에 나의 문장은 도대체 누굴 구하고 있는 걸까. 나조차 구하지 못하는 건 확실했다.
page.120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인간들이 독하게 그렇게 했어. 내려앉으려는 참새만 보면 계속 내쫓았어. 결국 참새는 공중을 계속 날다가 힘없이 떨어져 죽었어. 너무나 고단하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견디다가. 근데 사영아,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집이 없는 우리도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정착하지 못하는 우리가 바로 그 참새 같다는 생각. 어디에도 내려앉아서 쉴 수가 없잖아.
page.217
나의 방광 나의 지구
그녀의 남편은 업무 회의 시간에 실금을 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그는 바닥 친 자존감을 어쩌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소중한 연차가 하루 사라졌다. 그녀는 남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좀 쉬어. 내가 해볼게.
내 집 장만 전투에서 패배한 뒤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출근하기 시작한 남편의 얼굴에 실존주의를 고민하는 철학자처럼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투자한 신탁 상품에서 큰 손실이 났다.
page.225
나의 방광 나의 지구
내가 회의 시간에 바지에 오줌 싼 날 있잖아. 그날 은행 가서 듣고 온 소리가 그거였어.
그녀는 뒤늦게 모든 걸 이해했다. 그녀의 남편이 회의 시간에 고양이 눈물만큼 오줄을 배출해버린 것은 방 빼기라는 걸 처음 알고 큰 충격을 받아 자율신경계에 이상이 생긴 탓이었다. 그녀 역시 방 빼기를 안 순간 갑자기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page.230
나의 방광 나의 지구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녀는 식단에서 죽은 동물의 살을 빼고, 초록색 채소로 빈자리를 채워넣었다. 그러면 다른 생명을 짓밟지 않고 다른 생명의 권리를 빼앗지도 않고 그녀의 보금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잠시 들었다. 그건 그녀가 이 세상에 원했던 거의 유일한 것이었고, 포기한 전부였다.
page.247
재활하고 사랑하는
눈을 뜨지 않고 기정의 손을 잡고 가만히 있었다. 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심이 잡혔다. 기정은 내 손을 한참 동안 잡고 있더니 힘없이 놓았다. 나는 눈을 떴고 벤치에서 천천히 일어나는 기정을 보았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물었고 기정은 더워서 그런다고 답하며 내 눈길을 피해 앞서 걸었다.
page.290
현서의 그림자
아내가 자기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들어둔 걸 알지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라면서. 그간의 세월이 모두 헛짓이었다고 내게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말하면서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거야. 그리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어.
놀라지 말고 들어. 너는…… 외계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