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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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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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나는 쇼코의 팔짱을 풀려고 애썼지만 쇼코는 안간힘을 내서 내 팔을 붙잡았다. 나는 일어서서 팔에 붙은 쥐라도 떼어내듯 쇼코를 떼어냈다. 좁은 마당에서 노인과 나는 마주보고 섰다. 고개를 돌린 노인의 굳은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하지만 그 미소도 얼굴에 이는 작은 경련을 가리지는 못했다. 노인도 나도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잠시 서있었다.
”저 남자는 나에게 집착하고 있어.”
쇼코는 노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영어로 조그맣게 말했다.
”빌어먹을 새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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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나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게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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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의 미소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이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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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이모와 엄마는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모는 최종 재판에 참석했었다고 말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주제를 돌려야 하는데 그 생각에 부딪히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면 엄마는 어색하게나마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결혼생활의 한심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친정 식구들과 절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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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지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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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영주
“천국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영혼의 상태라는 결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카로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잘 모르겠어.”
”너는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니?”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과는 다른 곳일 거라고 생각해. 사랑하고 사랑받기만 하는 상태. 순진한 생각이라고 비웃어도 좋아.” 카로가 말했다.
”죽음 뒤의 삶이 영원하다면, 영원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지금의 삶은 왜 존재하는 거지? 천국은 이런 삶에 대한 보상이라는 거야?”
”이런 삶?” 카로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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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와 영주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 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