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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Grit Han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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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조남주
오빠는 “나 꽃다발 들고 무릎 꿇고 그런 로맨틱한 거 못해. 알지? 그냥 용건만 말할게. 결혼하자” 했습니다. 오빠는 되게 남자답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오빠 자아도취고요, 정작 청혼을 받은 저는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청혼이든 권유든 부탁이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에 들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허락을 받을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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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평화, 최은영
낮잠을 자다 눈을 뜨면 자기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 정순의 얼굴이 보였다. 울어서 눈이 부어 있을 때도 있었고, 울고 있을 때도있었지만 가장 두려웠던 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정순의 구겨진 얼굴이었다. 조금만 마음의 방향을 틀면 엄마가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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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평화, 최은영
정순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이 집의 부부가 자신과 남편이 아니라 남편과 시어머니라는 사실을 곧바로 이해했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유대 속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다. 남편은 월급 전부를 시어머니에게 줬고,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생활비를 주고 매달 가계부 정산을 요구했다. 정순이 자기 몫의 속옷이라도 사면 그 사치를 타박하며 이러려고 우리 아들이 고생하는 것이냐고 나무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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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년 更年, 김이설
손발이맞아야 박수를 치지. 내가 간신히 공들인 규칙들은 남편의 생색내기에 곧잘 무너지곤 했다. 아이들이 제 아빠를 믿고 꾀를 부리는 건 괜찮다. 그것이 아빠의 선심이라는 것 정도는 아이들도 아니까. 다만 나는 아이들 앞에서 내 의견이 묵살당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버리는 것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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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년 更年, 김이설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아들아이가 만난 여자애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도 생리를 할 텐데, 걔들도 처음엔 무섭고 떨렸겠지. 누군가 그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너희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엄마, 엄마도 울어? 왜 울어. 나 안 울게, 울지 마.”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내 등을 쓰다듬던 딸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는 생리대를 혼자 붙여보겠다고 끙끙댔다. 그렇게 어린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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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제자리에
일상의 풍경들이 삽시간에 회색의 폐허로 무너지는 것과는 정반대로 일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았고 온통 잿빛인 공간에 오히려 자꾸만 색깔이 덧입혀져서, 잿빛의 건물 속에서도 나는 무지개를 만나곤 했다. 때때로 그을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볕 조각이 폐허에 만든 조명들은 눈이 부실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웠다.